<시인과 노래>53년 작곡가 변훈 첫 발표회 혹평에 충격받아

▲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 ·전 CBS 사장
‘감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감푸른 바다’라고 하면 ‘깊고 푸른 바다’이면서도 웬지 갑갑하고 무거운 어두움 속의 바다가 아닌, 아늑하고 좋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종종 가사집 등에 ‘검푸른’으로 잘못 인쇄되어 있기도 한데, 그것은 착각에서 비롯된 오류다. 가곡 <명태>는 바로 이 ‘감푸른 바다’로 시작된다.

명태
양명문 시 변훈 작곡

감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고 춤추며 밀려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이집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소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짜악 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 시인 양명문 ▲ 작곡가 변훈 ▲ 바리톤 오현명

이 시는 양명문(1913~1985) 시인이 6.25전쟁 발발 후 낙동강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9월에 쓴 것이다. 당시 양명문은 종군작가였다. 경북 안동에서 같은 국군 정훈국 소속이던 작곡가 변훈(1926~2000), 김동진(1913~2009)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어느날 양명문은 변훈, 김동진 두 사람에게 자신의 시인 ‘명태’와 ‘낙동강’ 등 2편을 주며 작곡을 부탁했다. 그리하여 ‘명태’와 ‘낙동강’이 두 작곡가에 의해 가곡으로 세상에 나왔다. 김동진의 작품 중에도 <명태>와 <낙동강>이 있는 이유이다.

<변훈>의 명태는 1951년 작곡되어 1952년 가을 부산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노래는 굵직한 목소리의 베이스 바리톤 오현명(1924~2009)이 불렀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는 동안 객석에서 키득 키득 웃음소리가 나오는 등 분위기가 이상했다.

음악회가 끝난 뒤, 음악평론가 이성삼(李成三)씨가 <연합신문>에 쓴 평론에서 ‘이것도 노래라고 발표하나’라고 혹평을 했다. 남성적인 힘이 넘치는 노래였으나 홍난파 류의 얌전한 가곡에 익숙해져 있던 청중들에게 <명태>의 출현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가히 도발적이었다.

<명태>에 대한 지독한 혹평에 변훈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당시 작곡해 놓았던 다른 가곡의 악보까지 모두 찢어버리고 작곡가의 길을 접는다. 변훈은 대학(연세대) 시절 정치외교학도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작곡과 성악에 대해 개인 교습을 받았다. 그는 이 사건 다음해인 1953년 외무부에 들어가 직업외교관이 되었다. 오랜 세월 작곡의 세계에서 떠나있던 그는 1981년 주 포르투갈 대사를 끝으로 28년간의 외교관 생활을 마치고 다시 작곡가로 돌아온다. 아무튼 <명태>는 이처럼 그의 인생항로를 바꿔놓는다.

<명태>는 이후 10년 이상 수면 아래에 있다가 1960년대 중반부터 오현명이 부르는 <명태>가 어느날부터 갈채를 받기 시작하면서 곧 인기가곡의 반열에 오른다.

오현명은 2009년 6월, 별세 직후 나온 그의 자서전 <다시 부르고 싶은 노래>(세일음악문화재단)에서 가곡 <명태>에 관해 이렇게 회고 하였다.

“내가 (전쟁 때) 대구에서 공군 정훈 음악대 대원으로 활동할 무렵이었다. 하루는 UN군 제 7군단의 연락장교로 복무하고 있던 변훈이 나를 찾아와 뭐가 그리 급한지 무슨 종이 뭉치를 내게 던져주고는 황급히 돌아서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거 내가 쓴 곡들인데 한번 봐줘. 그리고 그중에 <명태>라는 곡이 있는데, 그건 특히 자네를 위해서 쓴 것이니까, 언제 기회 있으면 불러봐.”

--- 그런데 그 <명태>의 악보를 보니, 그게 아무래도 노래가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정겹게 느껴지게 되었다.“

그는 “나 자신이 변훈의 <명태>를 좋아하고 사랑하게 된 것은 그 노래에 깃들어 있는 한국적인 익살과 한숨 섞인 자조와 재치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명태>는 오현명이 세상 떠나는 날까지 그의 대명사 격인 노래가 되었다.

정작 시를 쓴 양명문이 가곡으로 유명해진 자신의 시 <명태>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남겼는지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이 시를 읽는 이들은 북어를 안주로 소주를 들이키는 시인이 양명문 자신이었을 것으로 짐작하며 전쟁으로 어렵고 위태로웠던 그 시절의 풍경을 상상한다,

“비록 너를 술 안주로 먹지만 그러나 네 이름은 길이 남을 것”이라고 입속에서 없어지는 명태를 위로하는 장면은 매우 서민적이고 해학적이다.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명태의 처지에 빗대어 노래한 것으로, 당시로선 시도, 작곡도 모두 파격이었다. 노래 중간에 읊조리는 레치타디보적인 가사의 처리도 특이했다.

한편, 청주의 한 음식점에 가보면 커다란 명태 그림이 걸려 있다.<사진> 상당구 내덕동의 <속초회냉면>집이 그곳이다. 급랭(急冷)시킨 명태포를 회냉면의 재료로 쓰는데, 명태포의 쫄깃한 맛이 독특하여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명태 그림 아래 명태의 갖가지 이름이 쭉 적혀있다. 생태부터, 동태, 북어, 황태, 코다리, 백태, 흑태 등 13가지 이름을 나열해 놓았는데, 새끼 명태를 가리키는 노가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명태의 이름은 이뿐만이 아니다. 진짜 동해안 명태를 말하는 ‘진태’ 등을 포함하면 스무개가 넘는다. 명태는 또한, 살, 내장, 알, 눈깔, 껍질 등으로 36가지 음식을 만든다고 한다.

명태는 고래로부터 우리 제사상에 없어선 안 되는 생선일 만큼 우리에게 친근하다. 그런데 동해 수온의 상승으로 81년부터 어획량이 급감해 요즘엔 희귀생선이 되었다. 요즘의 명태는 대부분 원양에서 잡아 온 것이거나 수입산이다.

비록 요즘 동해에서 명태가 잘 잡히지 않는다고 해도 한국인의 명태에 대한 추억과 애착은 오랫동안 변치 않을 것이다. 가곡 <명태> 또한, 이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오랫동안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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