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 ·전 CBS 사장
김소월의 스승이며 수많은 시와 번역시를 남긴 초기 한국 문단의 거목 김억[金億, 호는 안서(岸曙), 1886-1950?]. 김억 시인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번역시 가운데 하나가 황진이(黃眞伊, 1500년대 초반, 생몰년 미상)의 <꿈>이다. 그것이 60년 전인 1950년 작곡가 김성태씨에 의해 가곡 <꿈>으로 재탄생 했다.


황진이 작, 김억 역시, 김성태 곡

1절:
꿈길밖에 길이없어 꿈길로 가니
그 임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 지고

2절:
꿈길따라 그 임을 만나러 가니
길떠났네 그 임은 나를 찾으려
밤마다 어긋나는 꿈일양이면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 지고

이 시를 찬찬히 읽어보라. 또 눈을 감고 아름다운 선율의 이 노래를 들어보라.

다시는 만날 길 없는 사무치게 그리운 사람. 행여 꿈속에서는 만날 수 있을 건가. 허나 꿈속에서도 자꾸 어긋나니 서러워라. 소원컨대 꿈속에서라도 같은 시(時)에 같은 길 떠나 도중에서 서로 마주치기를.(필자의 풀이)

▲ <꽃다발>(1944년)에 실린 번역시 <꿈> 원본
시공을 뛰어넘어 역사속의 황진이와 역자 김억이 이 시간 당신과 교감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김억이 이 시를 번역할 당시(1944년)에는 여기에 훗날 곡이 붙여져 널리 불려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역자 본인의 말대로 ‘원시(原詩)의 시상을 떠올리며’ 자신의 시적 감각에 따라 우리말 번역시로 재창작 하였던 것이다. 김억은 1943년에 펴낸 한시 번역시집 <동심초> 서문에서도, 번역시에 대해 설명하면서 “원시의 뜻을 따다가 소위 김안서 식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토로하고 있다.

이 번역시는 1944년에 나온 한국여류 한시번역시집 <꽃다발>에 처음 등장한다. 첫 번역시의 내용은 이렇다. (원본 형식에 따름)

꿈길 밖에 길 없는 우리의 신세
님 찾으니 그님은 날 찾앗고야.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떠나 노중(路中)에서 만나를 지고.

相思相見只憑夢 (상사상견지빙몽)
儂訪歡時歡訪儂 (농방환시환방농)
願使遙遙他夜夢 (원사요요타야몽)
一時同作路中逢 (일시동작로중봉)
黃眞伊(황진이)

님찾아 꿈길가니 그님은 나를 찾아
밤마다 오가는길 언제나 어긋나네
이后(후)란 같이떠나서 路中逢(노중봉)을 하과저.
<꽃다발> (1944년)

▲ 신윤복의 미인도
시집에는 황진이의 한시 원문을 가운데 두고 4행 번역시와 우리 시조형식의 번역시를 앞뒤로 붙여 놓았다. 원시(原詩)엔 제목이 없다. 그런데 이것이 5년후인 1949년에 나온 번역시집 <옥잠화>에서는 원시 앞뒤의 번역이 이렇게 바뀐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그님은 나를찾아 길떠나셨네.
이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떠나 노중(路中)에서 만나를지고.

이렇게 앞의 1, 2행이 다소 개작되었듯이 시조풍의 번역에도 조금 손질이 가해졌다.

꿈길로 님찾으니 그님은 날 찾았네
밤마다 오가는길 언제나 어긋날시
이후(后)란 같이떠나서 路中逢(노중봉)을 하과저.
<옥잠화> (1949년)

앞서 <꽃다발>에 실렸던 첫 번 번역은 기생이었던 황진이의 신분을 의식하였던 것 같다. ‘꿈 밖에 길 없는 우리의 신세’가 그렇다. 그러나 ‘신세’란 말이 처량했던지, <옥잠화>에서 김억은 이 대목을 ‘꿈길 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로 바꾼다. 더불어 몇 군데를 더 다듬는다.

1950년 어느날, 작곡가 김성태씨는 김억의 번역시 <꿈>을 읽으며 그 아름다움에 끌려 작곡에 들어간다. 김억은 6.25가 발발한 이해 납북됐다.

노래 1절은 김억의 두 번째 번역시 그대로이다. 2절은 1절과 같은 내용인 마지막 4행을 빼놓고는 가사를 곡의 흐름을 따라 새로 만들어 넣은 것으로 보인다. 완전히 새로 만들었다기 보다는 김억의 두 가지 번역과 시조풍 번역의 내용을 적절하게 잘 소화하여 내용이 잘 이어지도록 하였는데, 감정의 흐름이 어색하지 않다.

가곡 <동심초>의 2절은 그간 알려진 것 처럼 ‘가필’이 아니라 같은 한시의 다른 번역임이 밝혀졌지만, 이 <꿈>의 2절은 그야말로 ‘가필’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다. 이상은 순전히 나의 탐색의 결과이므로 실제 상황은 이와 다를 수 있다고 본다. 이와 다른 상황이라면 나의 글은 당연 고쳐져야 할 것이다.

▲ 개성의 박연폭포 (사진=이정식, 2008년 8월)
한편, 송도3절[松都三絶, 송도(지금의 개성)의 세가지 유명한 것이란 의미로,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를 지칭]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명기(名妓) 황진이는 뛰어난 시인이었다. 노래도 매우 잘 불렀다고 전해온다. 자유분방하고 자존심이 강했으며 남자같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풍류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런 황진이가 꿈 속에서라도 다시 만나고 싶어한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황진이가 그리워한 이가 그녀가 대면하였던 수 많은 남성중에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시 역시 그녀의 가슴속에 담겨있던 깊은 한(恨)의 한가닥을 풀어낸 것이리라.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