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서거 1주년, 충북 6인 김대중 납치사건 현장을 가다

韓日 참가자 울린 승무 이수자 육영임의 살풀이
권희돈詩 인동초 족자, 후루노·이희호 여사 전달
 

1973년 8월 발생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사건을 통해 고난과 화해, 평화를 모색하는 현지순례 행사가 일본과 서울을 오가며 열린 가운데 행사에 참석했던 충북인사들의 활약이 화제가 되고 있다.

청주 출신 무용가인 육영임씨가 살풀이와 승무로 일본인 참가자들의 눈시울을 적시고 권희돈 청주대 교수가 1997년 대선 직후에 쓴 시(詩) 인동초가 족자로 제작돼 납치사건 당시 마이니치신문 서울특파원이었던 후루노씨 등에게 전달된 것이다. 족자의 글씨는 박수훈 민예총 서예위원장이 썼다. 

▲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맞아 1973년 발생한 일본 납치사건의 현장을 둘러보는 행사가 열렸다. 충북에서는 주관단체 행동하는 양심 한종만 사무처장 등 6명이 참여해 비중있는 역할을 했다. 사진은 오사카에서 열린 추도식 광경.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1주기를 맞이한 가운데 사단법인 ‘행동하는 양심’은 7~9일 도쿄와 오사카, 서울에서 ‘고난과 용서 화해와 평화의 여정 순례(이하 고난과 용서 순례)’라는 다소 긴 이름의 행사를 가졌다.

행동하는 양심은 지난 3월26일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신과 가치를 계승시키기 위해 만든 단체로 이해동 목사, 김한정 전 청와대 부속실장 등 집권 당시 청와대 관계자들과 재야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번 고난과 용서 순례는 납치사건이 발생했던 일정에 즈음해 이뤄진 것이다.

방문단은 이해동 이사장을 비롯해 박창일 신부, 이명식·최경환 상임이사 등 모두 37명으로 구성됐는데 충북출신으로는 한종만 행동하는 양심 사무처장을 비롯해 권희돈 청주대 국문과 교수, 변은영 민주당 정책실장, 유수남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 전문위원, 육미선 청주시의원, 육영임 무용가 등 6명이 참여했다. 

납치 호텔, 감금 맨션 등 둘러봐

방문단은 7일 김 전 대통령이 망명시절 기거했던 도쿄 하라다 맨션과 납치장소인 그랜드팰리스 호텔을 답사한 것을 시작으로 8일에는 오사카로 이동해 감금장소였던 오카모토 맨션, 중앙정보부 공작선에 실렸던 나루오 항구 등을 둘러봤다.

방문에 맞춰 두 도시에서는 추도식과 강연회가 열렸다. 도쿄 행사에는 이토 나리히코 쥬오대 명예교수와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가 참석해 각각 ‘김대중 도쿄납치사건 증언’ ‘한일우호증진의 새로운 과제’에 대해 강연했다. 오사카에서는 양관수 오사카경제법과대학 교수가 ‘김대중 평화사상과 한일우호발전’을 주제로 마이크를 잡았다.

와다 하루키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는 “작년 김 대통령의 서거 후 열린 국장에서 김 대통령이 평생 추구한 남북화해, 한반도 평화구축의 열정이 국민들을 울렸다. 그런데 남북관계는 경색되고 최악의 상태에 빠진 것이 유감스럽다”며 “올해는 한일병합 100년이 되는 해다. 일본사람은 슬픈 역사에 대해 정확한 역사적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양국 정부, 특히 일본정부의 사건 해결을 위한 노력을 촉구했다.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해온 이토 나리히코 일본 쥬오대 명예교수는 “한국정부는 그동안 진상규명을 실시했지만, 일본정부는 조사에 대해 아무런 성의도 없었다. 미국도 입을 다물고 있다”며 각국 정부의 진상규명 및 사죄를 주문했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은 죽음의 위기에서 생환했지만, 당시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책임을 지는 것이 일본정부에 있었다“고 일본정부의 진상 규명 및 사죄를 요구했다.

일본석학들, 일본정부 사죄 요구

추도식에서 한일 양국의 참석자들은 “김대중 대통령 도쿄 납치사건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자행된 정적납치살해기도 사건이었다”며 “한일 간 과거에 일어난 불행한 일이었다는 점에서 한일 양국 정부는 사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 측과 한일 양국 국민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밝혔다.

방문단은 강연을 한 이토 나리히코 쥬오대 명예교수,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 명예교수 외에도 후루노 요시마사 전 마이니치신문 서울특파원 등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방문단은 9일 귀국과 함께 동교동을 찾아 미망인 이희호 여사를 예방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 했다.

육미선 청주시의회 의원은 “국내에서 납치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교포들이 눈물을 흘려가며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일본인들이 무게감을 갖고 고민하는데서 많은 걸 배웠다”고 말했다. 변은영 민주당 충북도당 정책실장은 “그동안 자료로만 알고 있었는데 여정을 밟을수록 상황을 곱씹으면서 일치됨을 느꼈다”고 당시의 감동을 전했다. 

행사를 주관한 한종만 사무처장은 “고난과 용서 순례를 통해 정치인 김대중에서 인간 김대중으로 보다 이해가 넓어졌다”며 “김대중 납치사건은 한일 간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됐던 사건이다. 앞으로 평화와 인권 등의 문제를 한일 민간영역에서 공동으로 진행하는데 있어서 김대중이라는 인물을 매개로 이뤄나갈 수 있음을 확인한 뜻 깊은 자리였다”고 설명했다.

몸짓으로 흐느끼고

▲ 승무 이수자 육영임씨가 도쿄에서 열린 추모제에서 살풀이를 추고 있다. 육씨의 춤사위는 우리 문화에 낯선 일본인들마저 눈물짓게 만들었다.

행사에 참여한 충북인사들의 활약이 돋보였다는 것은 먼저 한일 참가자들을 감동에 휩싸이게 만든 육영임씨의 공연에서 비롯됐다. 육씨는 도쿄에서 살풀이를, 오사카에서 승무를 공연했다. 도쿄 행사에는 50여명, 오사카 행사에는 300여명이 참석했는데 한일 참가자들 모두 춤사위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눈물을 머금었다는 뒷얘기가 들려온다.

유수남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 전문위원은 “일본인들이 낯선 우리 춤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에서 문화의 힘을 느꼈다”며 “그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겪은 고난정에 대해 공감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했다”고 말했다. 

육영임씨는 “언어와 달리 춤은 몸으로 느끼고 호흡하는 장르이다 보니 말이 통하지 않는 일본사람들도 깊은 감동을 느꼈던 것 같다”며 “평소 DJ를 생각했을 때 그가 겪었을 고난만을 생각했는데 이번 행사를 통해 용서와 화해, 평화를 가슴 깊이 새기고 이제 우리가 이뤄내야 할 것들을 고민하게 됐다. 그 중에 하나가 통일이다”라고 밝혔다.

육씨는 8월2일 김대중 도서관 컨벤션홀에서 열린 ‘시와 음악, 춤으로 만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꿈과 사랑’ 행사에도 출연해 춤사위를 선보였다. 청주대에서 무용을 전공한 육씨는 청무회장 등을 맡아 지역에서 활동하며 중요무형문재 27호 승무 보유자인 이애주 교수로부터 승무를 이수했다. 현재는 한국전통춤회 소속이다.   

詩語로서 소리치다

▲ 권희돈 청주대 교수가 DJ 당선에 맞춰 쓴 詩 인동초를 박수훈 충북민예총 서예위원장의 글씨로 액자를 만들어 후루노 전 마이니치 기자, 이희호 여사에게 전달했다.

오사카 행사에서는 1973년부터 3년 동안 마이니치신문 서울특파원을 맡았다가 일본에 돌아간 뒤에도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을 밝히는데 힘쓴 후루노 요시마사씨(73)에게 족자로 만든 선물을 증정했다.

후루노는 73세라는 고령에다 병중이라 이날 행사에 직접 참석하지 못했는데 지난 5월 ‘김대중 사건-마지막 특종’이라는 책을 펴냈을 정도로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열정을 보여왔다. 

화제가 된 것은 행사 참가자이기도 한 권희돈 청주대 교수가 쓴 ‘인동초’라는 시를, 박수훈 충북민예총 서예위원장이 목간체로 써서 족자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같은 형태로 제작된 또 하나의 족자는 9일 이희호 여사에게 전달됐다. 

인동초는 권희돈 청주대 교수가 2007년 12월18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에 맞춰 쓴 시다. 시집에는 수록하지 않았지만 며칠 뒤 열린 도내 축하행사에서 직접 낭독한 뒤로 DJ 열성지지자들에 의해 복사 또는 필사로 전파됐다. 권 교수는 2일 김대중 도서관 컨벤션홀에서 열린 행사에서도 인동초를 낭송했다.

권 교수는 “인동초는 DJ 당선 후 민주화를 갈망하는 과정에서 싸우고 죽었던 사람들과 기쁨을 나눌 수 없다는 안타까운 소회를 적은 것인데 조금씩 알려져서 사랑을 받게 됐다”며 “정서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사실을 기록하는 것보다 때로는 오래가고 반향이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감격스러웠다”고 강조했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김대중 납치사건은 일본으로 망명 중이던 김대중이 1973년 8월8일 도쿄 그랜드팰리스호텔 부근에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납치됐다가 8월13일에 서울의 자택 앞에서 발견된 사건이다.

김대중은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해 민주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97만 표 차이로 석패했다. 박 대통령은 신승을 거뒀지만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김대중에게서 위기감을 느꼈다. 선거 뒤 김대중은 교통사고를 가장한 암살 시도로 인해 골반관절 부위에 부상을 당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김대중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이후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망명해 일본과 미국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을 진행했다.

1973년 8월8일 김대중은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열릴 반(反) 박정희 집회 참가를 앞두고 그랜드팰리스 호텔 2212호에 투숙하고 있었다. 오후 1시쯤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던 양일동 한국민주통일당 대표와 회담을 끝내고 나오던 도중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했고 비어있던 2210호실에 감금됐다. 김대중은 이 방에서 마취약이 투여돼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오사카로 옮겨져 납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대중은 나중에 “배에 탈 때 다리에 추를 달았다”라고 증언했다. 바다에 수장되려는 순간 동해 일본 측 해안에서 해상자위대 함정이 추격해왔고 사건이 발각될 것을 우려한 요원들은 계획을 변경해 김대중을 부산까지 데려가서 풀어줬다. 김대중은 납치사건 닷새 뒤 서울 자택 앞에서 발견됐다. 이 사건은 김대중이 망명상태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한일 외교갈등의 불씨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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