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출신 이근택 3형제 매국 은사금 20억원

한일강제합병(1910년 8월29일) 100주년을 눈앞에 둔 시점인 7월12일 4년에 걸쳐 친일재산의 국가귀속을 추진했던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친일재산에서 역사를 배우다>라는 단행본을 출간했다.

이와 함께 언론에는 친일파들이 강제합병의 대가로 일왕에게서 받은 이른바 은사금(恩賜金)을 폭로하는 기사가 쏟아졌다. 현재의 화폐가치로 적게는 1인당 5억원에서 무려 166억원에 달하는 큰돈이 작위를 받은 친일파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친일재산에서…>에는 이밖에도 친일파의 재산형성과 국가귀속을 진행한 과정이 소상히 담겨있다.

그동안 친일 앞잡이들에게 붙여왔던 매국노(賣國奴)라는 표현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나라를 송두리째 넘긴 것에 대한 거래가 있었음이 낱낱이 드러난 것이다. 또 일본이 대한제국 황실과 친일파들에게 작위를 준 것은 한일병합이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었음을 가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기가 막히다.

은사금을 받은 자들은 합병에 협력한 대가로 작위를 받은 수작자(授爵者)들이다. 일제는 합병에 협조한 인물들을 향후 식민통치의 협력세력으로 육성하기 위해 선심을 쓰듯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등의 작위를 줬다. 이는 합병 당일 공포된 ‘조선귀족령’에 따른 것이다.

특히 대한제국 황실 관계자 가운데 공로가 있는 자에게는 일본 황족에 버금가는 공족이라는 칭호를 줬는데, 고종의 친형이면서 궁내부 대신이었던 이재면은 무려 83만엔(166억원)을 받았다. 그의 아들 이준용 역시 단군과 일본 왕실의 조상신을 함께 모시는 ‘신궁봉경회’ 총재로 활동하며 16만3000엔(32억6000만원)을 받았다.

순종의 장인인 후작 윤택영의 은사금은 50만4000엔(100억8000만원)에 달했고, 철종의 사위이자 조선귀족회장을 맡았던 후작 박영효는 28만엔(56억원)을 챙겼다. 

이어 백작 작위를 받은 이완용과 이지용에게는 각각 15만엔(30억원)과 10만엔(20억원)이 주어졌다. 이완용의 은사금이 더 많은 것은 을사조약, 한일신협약, 합일합병조약에 모두 관여했기 때문이다.

<친일재산에서…>에 따르면 조선귀족으로 임명할 76명의 명단은 이완용 등이 협의해 만들었다. 그러나 김석진은 망국에 분개해 자결했으며 조정구는 자결에 실패하자 작위를 거부하고 승려가 되는 등 민영달, 유길준, 윤용구, 조경호, 한규설, 홍순형 등 모두 8명이 작위를 거부하거나 반납했다고 한다.  

이근택 등 ‘형제는 용감했다’

조선작위를 받은 인물 가운데 충주가 고향인 이근택·근호·근상 형제는 3형제가 함께 수작한 것으로 소개됐다. 이들은 가세가 미약한 무반 출신이었으나 을사오적 가운데 1명인 이근택(1865~1919)이 일제강점 이후 자작 작위를 받았고, 형인 이근호(1861~1923)와 동생 이근상(1876~1920)은 1단계 아래인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이들의 작위는 모두 아들들에게 승계됐다.

이근택이 출세 길에 들어선 것은 임오군란 당시 충주까지 피난 온 명성황후의 눈에 띄면서부터다. 이근택은 러시아와 가까운 인물이었으나 러일전쟁 이후 친일파로 돌변해 군부대신, 육군부장 등을 거쳤으며 1905년 군부대신으로 을사조약 체결에 가담한다.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 따르면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의형제를 맺고 이토히로부미의 의자(義子)가 됐다”고 한다.

형인 이근호는 법부대신, 육군부장을 지냈고 아우 이근상은 중추원 고문까지 올랐다. 이근택 3형제가 한일합병의 대가로 받은 은사금은 이근택 5만엔(10억원) 근호, 근상은 각각 2만5000엔(5억원)씩으로, 모두 20억원에 이른다. 이들은 또 해마다 1600엔(3200만원)씩을 수당으로 받았다고 한다.



3.1운동탄압 청주군수 민영은
전쟁 앞잡이 충북지사 박중양

<친일재산에서 역사를 배우다>에는 이래저래 충북이라는 지명이 곳곳에 등장한다. 국가귀속 친일파 토지의 분포에 있어서 경기, 충남에 이어 3번째로 많은 곳이 충북(2,103,537㎡)으로, 전체 11,139,645㎡의 18.8%를 차지한다.

사적 212호인 상당산성은 ‘이런 땅도 친일재산’이라는 제목 아래 친일파 가운데 최고의 땅부자였던 민영휘의 후손들에게 상속됐던 11필지 301,568㎡(시가 31억원)가 2007년 8월 국가에 귀속된 것으로 소개된다.
벽초 홍명희의 조부이자 합병조약이 체결된 날 자결한 홍범식의 부친인 홍승목(중추원 찬의)도 국가귀속 토지면적에 있어서 157필지 517,736㎡로, 전체 168명 중 5위에 손꼽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나라의 곳간을 거덜 낸 공주갑부 김갑순은 원래 공주감영의 노비였으나 1900년대 초 충청북도 판임관 주사로 관직에 들어서면서 승승장구한다.

민영은(1870~1943)은 청주출신으로 합병을 전후해 괴산, 청주군수를 지냈다. 청주 최고의 부호로 손꼽혔 으며, 한일합병 이후 각종 친일단체에서 일하며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친일재산에서…>에 따르면 민영은은 3.1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직된 ‘청주자제회’의 발기인과 회장을 맡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 책에는 또 청주자제회의 회칙이 실렸는데 제1조는 ‘내선인의 융화를 도모하고 경거망동에 인하여 국민의 품위를 상함이 없기를 목적으로 함’이다. 이어 6조는 ‘불온한 행동을 하는 자를 발견할 때는 즉시 경무관헌에게 통지할 자를 회원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박중양(1874~1955?)
경기도가 고향이다. 1904년 일본육군 통역으로 친일의 길에 들어서 1908~10년 의병토벌에 나섰고 1915년 중추원 찬의가 됐다. 3.1운동 당시에는 자제단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는 등 독립운동 탄압에 앞장섰다. 그 공로로 1921년 황해도지사, 1923년 충북도지사가 돼 식민통치를 지휘했다.

박중양은 1927년 칙임관 대우의 중추원 참의가 돼1941년까지 중추원에서 활동했으며, 중추원 참의들을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도록 이끈 공로로 1945년 4월 일본 제국의회 칙선의원에까지 임명된 골수 친일파다.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특별법에 의해 활동했던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됐지만 친일청산은 이제 시작단계다. 앞으로는 정부부처가 그 역할을 맡아 마무리해야 한다. 어찌 보면 성역이었기 때문에 학문적인 접근조차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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