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숭배, 신사참배 거부, 일본 불교 통합 거부 총독부 눈엣가시돼
1941년 신사사변, 일경 한밤중 습격 도주·도인 53명 연행·11명 사망
1942년 금천리 160간 대성전 강제철거, 한국 신종교 사상 최대 탄압사례

▲ 60년만에 복원한 삼종대성전(현재)
금강대도 창도주인 토암(土庵) 이승여(李承如)는 1910년 강원도 통천에서 충남 논산군 두마면으로 남천포덕(南遷布德)을 단행했다. 이후 10년간 교세가 급성장해 1923년 현재의 연기군 금남면 금천리에 대성전을 건립해 총본산의 위용을 갖추게 된다. 도주가 직접 태백산을 답사해 재목을 골라 뗏목으로 운반했으나 기와도 특별히 도안해 만들었다. 당시 도세가 전국에 뻗쳐 멀리 함경도, 제주도까지 분관을 만들었고 신도수는 20만명에 달했다.

금강대도의 사회적 영향력이 커지자 충남도 경무부 고등계는 1930년대 들어서면서 정식으로 사찰을 명령했고 지시를 받은 조치원경찰서 형사들의 발길이 금천리에 잦아졌다. 당시 토암은 “우리 백성들은 유교다 불교다 하고 서로 배척해서는 안된다. 태양은 하나며 만 백성의 태양인데, 내 것이다 네 것이다하고 싸워서는 안되고 적대해서도 안된다. 우리 단군 할아버지의 후손들은 귀하고 천함, 남과 여를 가리지 말고, 민본사상에 따라 서로 위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이같은 발언은 일본 경찰의 귀를 긴장하게 했고 특히 ‘단군 할아버지’를 내세운 자체에 대해 배일단체(排日團體)로 규정하게 만들었다. 금강대도에 대한 일제의 1차적인 억압책은 간도 강제 이민정책을 통해 시도됐다. 총독부는 1937년 1만2천명의 조선인을 간도로 이주시키기로 하고 충남도 할당된 인원 가운데 상당수를 금강대도 도인들을 포함시키려 했다.

▲ 한국민속촌 내에 있는 금련사(일제시대때 금강대도의 건물 자재였던 것으로 지어짐)
▲ 한국민속촌내에 있는 금련사 일주문(일제시대때 금강대도의 건물 자재였던 것으로 지어짐).
온갖 회유와 협박이 뒤따랐다. 금강대도 김도현 전 종심원장(宗審院長)은 “군과 면에서 번갈아 나와서 간도이민을 권유했다. 마을에 이민 안내서를 붙이고 달콤한 말로 유혹하다가 아무도 도장찍는 사람이 없자 위협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앙들이 강해서 끝까지 버텼고 아무도 끌려간 사람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에앞서 1923년 만주 이민차출 때는 일제의 위협으로 열차를 탔던 일부 신도들이 중간에 모두 탈출해 귀향하기도 했다.

3개 경찰서 무술 경찰 100여명 동원

간도 강제이민의 회오리 바람을 잘 이겨낸 금강대도에 대해 일제는 호시탐탐 탄압의 명분을 찾으려 했다. 이때 문제가 된 것이 2대 도주 청학(靑鶴) 이성직(李成稷)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본 천황의 사진에 경배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당시 총독부는 공공기관과 학교 등에 천황을 사진을 게시토록하고 아침저녁으로 경배하도록 했다. 하지만 청학은 “우리 배달민족은 단군의 자손이며 천황의 자손일 수 없다. 따라서 신도들은 심사참배와 일본 천황을 경배할 수 없으며 그 날조된 논리에 귀기울여도 안된다. 또한 우리는 신민(臣民)이 되겠다는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같은 보고를 들은 총독부 시오하라 학무국장은 정교원 충남지사에게 ‘금강대로를 굴복시키던가, 아니면 없애버리라’고 긴급 명령을 내렸다. 일본의 황민화(皇民化) 정책과 일본 불교와 통합을 거부해 온 금강대도에 대해 총독부 경무총감과 충남도경 경무부장은 말살정책을 강행하기로 했다. 실제로 충남도경 고등계 형사 ‘야마모도’ 경부에게 실무책임을 맡겨 작전을 짜도록 했다. 이때 야마모도는 “금강대도는 하나의 조직을 가진 나라와 같다. 섣불리 손을 댔다가 우리가 당할 수 있다”며 은밀한 기습작전을 시도하기로 했다.

마침내 일본 경찰은 종교 행사가 거의 없고 시국의 흐름이 유리한 12월 7일 밤에 금천을 급습해 도주와 주요 간부들을 강제연행키로 했다. 이들은 당시 서울-부산을 오가는 급행열차의 이름을 따서 ‘아까즈끼 작전’이라 명명하고 공주, 조치원, 대전 등 3개 경찰서에서 병력을 동원시켰다.

이들은 각 경찰서에서 무술솜씨가 좋은 경찰 40명씩 100명이 넘은 인력을 차출했다. 도인 1가구당 2명씩을 담당하고 도주와 간부들은 10명씩 배치해 가옥을 포위할 정도로 동원했다. 마침내 1941년 12월 7일, 일제가 미국 하와이 기습공격을 감행하기 하루 전날, 아침부터 함박눈이 내리는 가운데 금천은 고요속에 잠겨있었다.

옥중 고문 후유증 등으로 11명 사망

▲ 금강대도 이청학 제2대 도주님 옥중서한문

그날 아침, 야마모도 경부는 각 경찰서에서 차출된 형사들에게 “밤 11시까지 금천리 뒷산에 빠짐없이 집합, 11시 30분에 각자 맡은 집을 확인하고 12시 정각에 일제히 집안으로 들어가 신도들을 검거하고 모든 도서와 서류를 압수한 다음 새벽 1시 30분까지 감성 국도에 집합하라. 만약 실수가 있어 한 사람이라도 놓치게 되면 그 책임을 묻겠다”고 엄명(嚴命)을 내렸다. 밤이 되어도 눈은 그치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직접 겪고 감옥살이까지 했던 유치흥(兪致興. 작고)은 다음과 같이 그때를 회고했다. “그날 아침 대전에 갖다 오는 길에 얼굴을 아는 형사를 만났나, 나를 보더니 희죽희죽 웃음면서 ‘오늘은 따뜻한 면바지’준비했느냐’고 하길래 무슨 농담을 저렇게 하나 하고 생각했는데 나중에야 그 형사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밤 12시가 되자 집집마다 담을 뛰어넘어 작전을 개시했다. 유옹이 집밖으로 끌려나와보니 사방이 소란스럽고 부녀자들의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 뿐만 아니라 온 마을에 일제 경찰이 들이닥쳤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됐다.

하지만 도주를 검거하려던 일경은 저항이 완강하자 사태를 수습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당시 청학은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질테니 나머지 도인들은 즉시 석방하라”고 요구하며 그러지 않으면 검속에 응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도주와 경찰이 이렇게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이를 알아챈 젊은 도인들은 각자 집을 빠져나와 마을 고갯길에 숨어있다가 경찰을 습격해 도주를 구출해 내기로 합의했다. 이윽고 새벽 2시가 됐을 무렵, 수갑과 포승에 묶인 신도들의 행렬이 나타났고 도주 청학의 모습도 보였다. 이때 기다리고 있던 젊은 도인들이 일제히 ‘야’하고 고함을 치며 일본 경찰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무술로 단련된 일본 경찰을 당하지 못하고 붙잡혀 오히려 검속자만 늘어나게 됐다.

도인들이 일경에 끌려가던 밤, 금천리 마을은 대지진을 만난듯 슬픔과 혼란에 빠졌다. 구심점이 됐던 도주를 잃은 도인들, 남편을 빼앗긴 아낙네들, 아버지를 잃어버린 어린 아이들.....그들의 비통함과 절절함이 하늘과 땅에 메아리쳤다.

도주 청학, 수감중에 일본 패망 단언

▲ 일제의 탄압으로 철거된 금강대도 대성전
▲ 광복 후 삼종대성전을 신축하고 간부들 기념사진
일본 경찰은 연행한 도인들을 3개 경찰서에 분산 수용했는데 그 수가 53명이나 됐다. 도주 청학은 대전경찰서에 수감됐는데, 바로 그날 일본이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공급해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그러자 청학은 갑자기 얼굴이 밝아졌고 이상하게 여긴 간수가 ‘무엇이 좋아 그러느냐?’ 물어보자 “좋을 수밖에 없다. 이제 너희 일본이 망할 날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이 전쟁에서 틀림없이 망하고 말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튿날부터 일경은 연행자들을 한명씩 불러내 모진 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신앙을 버리고 일본 천황의 신민이 되겠다는 각서에 서명하라는 요구를 거절하자 고문은 더욱 악랄해 졌다. 거꾸로 매달아 놓고 물을 먹이기, 추운 밤에 발가벗겨 놓고 찬물을 끼얹기, 전기 고문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마침내 1개월이 지나자 목숨을 잃는 도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도인 김창희가 모진 매와 고문에 못이겨 사망했다. 하지만 일제는 3개월이 되도록 정식 기소도 하지 않은채 유치장에 같혀있는 도인들에게 만주 이민, 금강대도 거부, 천황 신민 각서 서명을 요구하며 괴롭혔다.

옥살이에 지쳐 숨진 도인이 이미 11명에 달했다. 금천리 가족과 도인들은 매일 대전경찰서로 몰려와 연행자 석방을 요구했다.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일본 경찰의 막무가내식 행태에 대한 여론도 악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공주법원 곤도검사는 경찰의 강압수사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경찰서장에게 “어째서 피의자들을 장기간 감금시키고 깃소를 하지 않느냐? 계속 사망자가 생기는 문제는 누가 책임을 질 것이냐?”고 추궁했다. 조사가 끝나지 않아 기소를 못하고 있다고 둘러대자 결국 곤도검사는 직권으로 조사하겠다며 9개월만에 공주법원에 기소조치했다. 한밤중에 납치되듯 끌려간 지 9개월만에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곤도 검사는 구속된 도인들을 상당히 온건하게 대했고 도주 청학을 신문하는 과정에는 “당신들의 입장을 이해한다. 따라서 내 손으로 당신들을 처벌한다는 것도 괴롭다. 그러니 당분간 침묵이라도 지켜 줄 수 없겠는가?”고 종용했다. 이에 청학은 “나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신앙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소. 우리는 신앙에 따라 행동하고 말할 따름이요”라고 거절했다. 결국 곤도 검사는 1942년 8월 청학을 병보석으로 석방조치했다.

해방후 반민특위 금강대도 사찰 복원 약속

하지만 보석조건으로 도주의 주거를 금천리가 아닌 조치원읍 신흥동으로 제한시켰다. 도주가 거처하는 신흥동 집 주변에는 형사들을 배치해 감시케 하고 신도들의 출입도 금지했다.
이러한 혹독한 시련 속에서 청학은 일경의 감시가 심한 중에도 도인들에게 광복을 암시하는 <봄노래>를 만들어 가르치며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김갑순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자 일제는 비상시국 경찰임시조치법에 따라 다시 청학 검거령을 내렸다.

청학은 삼태봉(三台峰)에 토굴을 만들어 은신하다가 충북 청원군 오창면 장대리로, 또 낭성면 삼산리 두문동으로 은거지를 옮겨가며 피신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금강대도에게 1945년 8·15 광복은 포덕의 자유를 되찾았음을 의미한다. 금천리로 돌아온 청학은 도장(道場)을 복구하고 성전을 재건하는 등 10여 년간 제자들을 교화하고 대도 포덕에 혼신을 노력을 기울였다.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이 방문해서 저간의 사정을 듣고는 금강대도의 사찰이 복원되도록 힘쓰겠다고 약속한바 있으나, 이승만 정부의 묵인 아래 특위가 해산됨으로써 공식 지원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출처-실록 충남반세기>

철거한 대성전 부재, 친일파 김갑순에 팔아
유성온천장 건립에 사용, 일제 당시 소송제기

청학의 병보석과 함께 일제는 금강대도의 본전을 비롯한 모든 주요 건물을 철거키로 하고 공작을 꾸몄다. 그들은 우선 청학에게 일체의 모든 건물을 충남도나 총독부에 기증하라고 요구했다. 물론 이같은 허무맹랑한 요구를 들어줄 리 만무했다. 도주가 건물 무상 기증을 거부하자 경찰이 나서서 일부 간부 도인을 위협해 기증서에 서명을 하도록 강요했다. 도인들을 잡아다 고문을 가하고 정신을 잃게 만든 후 건물 기증서에 지장을 찍게 했다.

또한 허위의 기증서를 든 깡패들이 트럭에 작업인부를 태우고 금천리로 들이닥쳤다. 도인들은 기증서를 인정할 수 없다며 철거 반대농성을 벌였으나 경찰의 비호를 받는 깡패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금천리엔 다시한번 울음소리가 메아리쳤고 160간에 달하는 신성한 성전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충남도는 폭력과 불법으로 철거한 건물 부재를 충남의 갑부이며 당시 중추원 참의를 지낸 매국노 김

김갑순(金甲淳)에게 경매로 넘겨버렸다. 김갑순은 당시 전국 제일의 온천지인 유성에 여관을 짓고 또한 역대 조선총독 열전각(列傳閣 )이라는 해괴한 건물을 지었다. 한국전쟁으로 한식 호텔은 불타 버렸고 뒷뜰에 누각 하나가 남아 있다. 건축 부재의 규모만 보더라도 당시 금천리 삼종대성전의 건물이 얼마나 웅장했던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유성온천장을 지었던 자재는 후에 용인에 있는 한국민속촌의 “금련사”를 짓는데 자재로 사용되었다.

결국 일제는 단군 숭배를 통해 우리 고유 의식을 고양하고 일본 신사 참배와 불교 통합을 거부해 온 금강대도를 위험한 배일집단으로 규정해 철저한 말살정책을 감행한 것이다. 도주와 도인들을 한밤중에 군사작전을 하듯 강제연행한 뒤 11명의 목숨을 빼앗았고 결국 선교포덕의 근원이 되는 대성전 건물까지 초토화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금강대도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우리 근대 신종교에 가해진 박해 가운데 가장 잔혹한 사례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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