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 일제 불교 간판 내리고 금천리에 ‘금강도총본부’ 시대 열어
1930 금강도덕문(金剛道德門) 건립, 미륵불 천명, 음양평등 교리 확립
1934 충남도청 강연회 이유로 일제 강제연행 만행, 병세 악화돼 열반

▲ 성경대(일제의 감옥에서순도한 도인들의 의성심을 상징하는 탑)
1923년(개도 50년)을 맞아 현재의 연기군 금남면 금천리를 도장의 기지로 삼아 법당을 건설하고 불상을 봉안했다. 당시 일제는 우리 민족의 신종교를 사교(邪敎)로 몰아부쳐 탄압했기 때문에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이때 창도주이신 토암은 “우리 배달민족이 단군국조의 신령스런 감화를 모두 받았고 단국 국조의 현묘지도(玄妙之道)가 실로 삼교(儒·佛·仙)를 포함하나니 그 가르침이 높고 크도다. 따라서 우리들이 마땅히 단군의 성상을 높이 받들어야 할 것이나, 일제의 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니 실로 통탄할 일이다. 그러나 스스로 천운이 돌아올 날이 반드시 있으리니, 지금으로서는 방편의 도리를 취할 수밖에 없도다”하고는 불상을 조성하고, 그 안에 단군의 성상을 비밀리에 봉안하였다.

1926년에는 일본 불교의 일파인 ‘진종동붕교’의 간판을 내리고 ‘관성교지부’로 바꾸었다가 이듬해 ‘금강도총본부(金剛道總本部)’로 내걸었다. 당시 제자들이 “금강도사(金剛道師)이신 우리 대성사부님을 옳게 믿기 위해 금강도(金剛道)로 이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제안해 토암이 마지못해 허락하였다고 한다. 이때 토암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의 귀한 바는 다만 심성수련과 도덕 실천일 따름이니, 교의 이름이야 무엇이면 어떠랴? 만일 실상으로 닦지 않으면 먼저 이름으로 실행함만 같지 못하리라”고 가르쳤다.

금강도장의 건설과 교세 확장
같은 해 12월 자암이 열반하자 제자들은 인생 삼은(三恩), 즉 나라, 부모, 스승의 은혜를 똑같이 갚는다는 충, 효, 성경의 교리를 실천하기 위해 모두 중복(重服)을 입고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했다. 1928년 자암의 산소를 옮기는 양례를 하는데 제자들 간에 복제 문제로 말이 많아지게 됐다.

이에 토암은 “너희들이 사모를 위하여 중복을 입은 것은 비록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지는 모르나 군사부일체의 의리로써 미루어 보면 실로 예에 합당함이 있는 것이다. 다만 예는 정에서 나오는 것이라 했는데, 너희들 중에 마음은 없으면서 체면치레로 복을 입은 자가 있으니, 이는 스승을 위하여 마음으로 거상(居喪)하는 도리가 아닐 것이다. 곧 이 자리에서 일제히 복을 벗어 불살라 버리도록 하여라”고 엄하게 지시하니 모든 제자들이 울면서 복을 불살랐다고 한다.

1929년(개도 56년) 4월 ‘문창재(文昌齋)’를 세우고 제자 봉추(峰秋) 유치흥(兪致興)을 강사로 삼아서 육영사업에 전념케 하니,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몰려와 금강도덕과 학문을 연마하여 도촌(道村)으로서의 금천리의 이름을 더욱 높이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일부에서는 “모모교에서는 술수로 포교하여 입도자가 많으나 우리 금강도는 오로지 도덕으로만 포교하는 고로 입도자가 적다”는 불만을 제기했다.

▲ 일제시대의 금강대도총본원 전경
이에 토암은 크게 꾸짖으며 “도덕지언(道德之言)은 담담하여 맛은 없으나 유시유종(有始有終)하니 장구한 도요, 술수는 달아서 맛은 있으나 유시무종(有始無終)하니 장구한 도가 아니니라. 또 천(天)은 천도(天道)를 행하고, 지(地는) 지도(地道)를 행하니, 사람이 그 사이에 처하여 능히 체천측지(體天則地)하여 인도(人道)를 행하면 천지에 참여하여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으리니, 이것이 바로 대인(大人)의 일인 것이니라”고 깨우쳤다.

무리한 교세 확장을 위해 술수를 동원해온 일부 신종교와 달리 금강대도는 창도주인 토암이 도덕적 수범과 수양을 포교의 대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개도137년이 지나도록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례가 단 한 번도 없었던 점이 눈에 띈다.

선도포덕(宣道布德) 과 열반
1930년 토암은 금강도덕문(金剛道德門)의 현판을 걸면서 “너희들이 은진 미륵(彌勒)이 관 쓰고, 도포 입고, 띠를 둘렀다고 하니 본 일이 있느냐? 만일 그러한 미륵을 보지 못했거든 나를 보도록 하여라”하면서 자신이 미륵불임을 천명하였다. 또한 여자의 도리를 묻는 한 연화도인에게 답하여 말하기를 “만일 아들은 없고 딸만 있다면 외손봉사(外孫奉祀)는 옳지만 양자를 세움은 소용이 없고, 여자가 청춘에 남편을 잃고도 음심(淫心)을 품지 않고 수절하는 사람은 열녀(烈女)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개가함이 옳은 것이고, 만일 체면상 수절은 하되 안으로 음심을 품는 사람은 내생에 기생을 면치 못하리라”고 하여 당시 전근대적 사회 풍조에 비춰 매우 파격적인 음양평등의 여성윤리를 설파했다.

▲ 일제의 탄압으로 훼철된 백옥사(사당)
1934년 경성, 경기, 영동, 호서, 관서 등에 지부를 설치해 전국적인 포교망을 갖춘 금강대도는 같은 해 3월 대전의 중심부인 충남도청 광장에서 선도포덕과 민족정신 앙양을 위한 강연회를 추진했다.

이때 태극기와 사구기(四九旗)를 든 많은 도인들과 수천 명의 일반 청중들이 강연을 듣고자 모여들었으나 내부자의 밀고로 정보를 미리 파악한 일본 경찰은 많은 제자들을 체포해 수개월동안 감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토암은 아들 청학(靑鶴)까지 옥고를 치르는 수난을 겪으면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병세가 심해지자 인근 제자들을 모두 불러 마지막 가르침을 주었다.

“나의 남천(南遷)과 너희들이 고향을 떠남이 어찌 다를 바가 있겠느냐? 다만 심성을 수련하여 천부(天賦)의 본성을 회복하고, 도성덕립하여 썩지 아니할 좋은 이름을 전하여, 위로는 과거 여러 성인들의 도통을 잇고, 아래로는 장래 중생들의 밝은 길을 여는데 있는 것이, 비록 천만번 거꾸러진다 해도 도심을 변치 말고 더욱더 깊게 살펴서 희마(戱魔)에 흔들리지 않도록 하여라” 마침내 11월 2일 자시(子時)에 창도주 토암은 열반에 들었고 제자들은 모두 중복을 입고 3년간 그 성은을 추모했다.

토암의 대성적, 한국 신종교 새 지평 열어

토암은 한국 신종교의 공통 사상이라고 일컫는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과 분명한 거리를 두었다. 본래 개벽이란 천개(天開) 지벽(地闢)이라 하여 천지가 닫혔다 새로 열리는 파천황(破天荒)의 대파국(大破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토암이 오늘날의 세계를 선후천(先後天)이 교역(交易)하는 시기로 보는 것은 다른 신종교와 유사하지만 그것을 천지가 개벽하는 시기로 보지 않고, 다만 인간의 도덕이 개화(開化)되는 시기로 보고 있다는 것은 큰 차이점이다.

▲ 일제의 탄압으로 훼철된 삼종대성전
예를 들어 증산(甑山)은 “나의 일은 천지를 개벽함이니 곧 천지공사(天地公事)라” 하면서 한서(寒暑) 풍우(風雨)를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죽은 자를 살려 내는 등의 일을 한 것으로 증산도 경전에 전하고 있다. 사실 토암이 살던 당시 종교적 상황은 어떤 면에서 술법적인 종교가 강하게 어필되던 그런 시대였다.

시대적인 모순이 복합적으로 터져 나오는 커다란 위기의식 속에서 대중은 기복신앙과 비결(秘訣)사상, 정감록(鄭鑑錄) 등의 혁세사상에 쉽게 빠져들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신종교들이 이러한 대중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일어났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토암 또한 이 같은 시대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였을 리 없다.

하지만 토암은 이를 부정하고 초극하여 새로운 인도주의 전통을 세우려고 노력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술수와 술법의 유혹을 벗어나 의연하게 자신이 믿는 정도(正道)를 지켰던 것이다.

토암도 포덕을 하는 과정에서 기적과 같은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수많은 영험과 이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자신의 신비한 능력이라 내세우지 않고, 언제나 제자들 각자의 정성(精誠)으로 돌리고 있음이 주목된다. 병자를 살려내고, 수천리 밖의 일을 내다보고, 고금에 없는 문장을 말하면서 결코 자신을 과시하지 않았다.

 다만 “너희들이 정성이 지극하면 어떤 병인들 낫지 않으며, 어떤 액인들 면하지 않겠느냐” “정성이 지극하면 어찌 신명의 감응이 없을쏘냐. 네 마음 중에 만 가지 이치가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라”하는 등 오로지 인간의 정성과 공경된 자세를 가르치는데 주력했다.

▲ 일제의 탄압으로 훼철된 학몽사(사당)
결국 토암은 인간을 신 앞에 수동적이고 나약한 존재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능력에 대한 무한한 잠재력을 키워 주려 했던 것이다. 20세기 초 혹세무민의 기복(祈福)과 술법이 난무한 가운데 그에 대한 제동으로서 어떤 균형감각을 찾으려 했던 사상사가 우리나라에 한명쯤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금강대도 삼교합일(三敎合一)의 특징은 무엇인가

금강대도에서는 토암·청학·월란의 3부자(父子)와 부인들인 자암·보단·향련을 건부(乾父)와 곤모(坤母)로서 짝을 이루는 절대자로 신봉한다. 이들에 대한 공식 호칭은 삼신일체(三神一體) 삼불세존(三佛世尊) 대도덕성사건곤부모(大道德聖師乾坤父母)이다. 이 같은 호칭에는 유·불·선의 각 요소들이 혼재하고 있다.

이 같은 삼교합일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금강대도는 선천의 여러 성인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계승자임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토암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사용했다. “석가세존은 오른쪽 갈빗대에서 나온 고로 우도(右道)를 위주로 하고, 태상노군은 왼쪽 갈빗대에서 나온 고로 좌도(左道)를 위주하며, 공자는 가운데 문에서 나온 고로 중도(中道)를 위주로 하니, 이것은 삼성이 각각 일도(一道)를 위주로 한 것이요. 지금 나의 도는 삼도(三道)를 합일하여 일도를 이루었나니, 비유컨대 사람 몸이 좌우중(左右中)이 갖추어진 것과 같다” 삼성을 인정한 가운데 금강대도의 포괄성을 강조한 것이다.

둘째, ‘건곤부모’라는 용어에서 보이듯이 금강대도에서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전통적인 동양적 세계관, 또는 천·지·인의 통합 하에 신을 생각했던 한국 고대인의 사유구조를 거의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셋째, 한국적인 미륵불 신앙의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도주를 삼신일체의 미륵대불로 신봉하며 기성 불교와는 차별성을 드러내고 있다. 즉, 과거 불교는 가족을 버리고 혼자 산에 들어가 수도하는 절륜(絶倫)의 종교였지만, 미륵신앙은 부자·부부·형제가 가화성도(家和成道)하며 함께 생극락(生極樂)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넷째, 한국적 신선사상, 또는 도교신앙의 요소를 살펴 볼 수 있다. 토암은 신도설교(神道說敎)로 천하를 귀의케 한다고 했고 ‘노자 앞장 이토암’이라 하여 선도와 노자를 높였다. 또한 도주는 천명(天命)을 받은 존재로 인정하고 금강대도 3세대를 만법교주, 동화교주, 통천교주라 일컬어 삼신일체의 체계를 세웠다.

이는 단군신화에서 나타나는 환인, 환웅, 환검의 삼신일체설과도 그 구조가 일치한다. 모든 우주만물을 3수의 개념화로 보려는 한국인의 독특한 사유구조가 엿보이며 금강대도의 신앙대상도 이와 같은 세계관에 입각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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