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 8월 ‘박대통령에게 직접 얘기하자’ 대원 24명 서울난입
3년 훈련기간 동안 7명 사명, 생존자 4명 사형집행전 애국가 불러

최초의 무장 난동사건이 벌어져
선발대의 북파작전이 다시 수포로 돌아가자 실미도 훈련대원들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했다. ‘주석궁 폭파’를 위해 창설된 ‘도깨비 부대’가 북파공작을 하지 못한다면 자신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대원들은 활력을 잃었고 70년 봄 연병장에서 야간영화를 상영하던 중 3명의 대원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들은 부대의 유선통신망을 절단한채 탄약고에서 실탄과 수류탄까지 챙기고 무의도로 숨어들었다.

전 대원과 기간병들은 무장을 한 채 무의도로 향했고 무의초교 관사에서 마을주민과 교사 학생 등 16명을 인질로 잡고 있는 탈주대원들과 대치하게 됐다. 다행히 바다를 헤엄쳐오는 바람에 이들은 총과 실탄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훈련교관들이 설득하려 했지만 탈주대원들은 ‘24시간 이내에 자폭하겠다’며 불응했다. 결국 5명의 특공조를 편성해 몽둥이를 든채 창문과 현관으로 난입해 제압하기로 했다. ‘돌격’하는 신호와 함께 뛰어들자 두 명은 갖고있던 칼로 자살을 기도해 숨졌고 한명은 목을 찔린채 숨을 쉬고 있었다. 다행히 인질들은 모두 무사했지만 앞서 무의도에 놀러왔던 아가씨 2명이 탈주대원들에 의해 성폭행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현장에서 목숨을 부지한 한 명은 결국 부대로 돌아와 훈련교관 하모씨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제 31명의 684부대원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24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시 언론에는 무의도 무장난동사건이 단 한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인천 사창가로 단체외출
684부대원들의 무의도 인질 강간사건이 벌어지자 중정에서는 사기진작책으로 단체외출을 시켜주도록 지시했다. 이에따라 인천 북평동에 미리 물색해둔 여인숙에 24명의 공작원을 단체투숙시켰고 사전에 선발해 보안교육까지 시킨 직업여성들을 각 방으로 들여보냈다. 20대의 피끓는 훈련대원들은 3년만에 회포를 푼 셈이었다. 지하계단 구조의 여인숙 입구와 출구는 기간요원들이 밤새 불침번을 서야했다.

밤새 만리장성을 쌓는 과정에서도 일부 대원들은 여자들의 손톱이나 미리 준비해준 계란의 껍질 등에 주소를 적어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기간요원들은 아가씨들에 대한 몸수색까지 벌여 겨드랑이에 적은 글씨까지도 철저하게 지워버렸다. 새벽 5시 인근 해장국집에서 속을 푼 이들은 하룻밤 ‘세상 나들이’를 접고 다시 실미도 공작선에 몸을 실었다.

중단된 북파공작, 버려진 684부대
70년 8월 15일 박정희대통령은 남북한 상호비방 금지, 교류협력 증진 등을 제시한 이른바 ‘8·15선언’을 하게 된다. 이듬해 남북 적십자회담이 가동되기 시작했고 실미도 684부대는 살벌한 훈련이 없어지고 평범한 일반 파견부대의 생활로 변해갔다. 주민들의 부대 근접 어로행위도 그대로 묵인하는 상황이었다. 중정도 남북관계 해빙에 따라 684부대를 잊어버렸고 보급과 부식이 날이 갈수록 악화됐다. 고급담배는 화랑으로 바뀌었고 심지어 훈련대원들의 월급도 지급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기간요원들과 훈련교관들도 돈과 빽을 동원해 육지 부대로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심지어 특수교육도 받지않은 교관으로 대치되는 경우도 발생했다. 71년도에 접어들면서 훈련대원이나 교육대장, 훈련교관들은 실미도 684부대의 장래에 대해 최고조의 위기감을 느꼈다. 부대간부들은 정보부와 공군에 수차례 사후처리 방안을 질의했지만 이렇다할 답변도 없었다.
마침내 8월 중순 대원들의 사격훈련중에 무의도 어민이 유탄에 맞는 사고가 발생했고 김방일 훈련교관은 부상어민을 후송하기 위해 인천으로 향했다. 다시 공작선을 타고 실미도로 돌아가려는 순간 부둣가 파견초소에서 약혼녀의 전화가 왔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러자 함께 탔던 교육대장이 김씨에게 외박을 허용했고 ‘천우신조’로 다시 뭍을 밟게 된다.

결국 다음날인 23일 새벽 6시께 24명의 훈련대원은 집단적인 무장난동을 일으킨다. 교육대장을 비롯한 기간병들에 대해 무차별적인 살육전을 벌여 12명의 무고한 목숨을 빼앗았다. 가까스로 이들의 눈을 피해 살아남은 기간병은 6명으로 현재 ‘실미전우회’(회장 김방일)를 구성해 정례적인 모임을 갖고 있다. 무의도에서 어선을 동원해 인천으로 잠입한 난동대원들은 시내버스를 탈취한채 서울로 향했다. 청와대에서 박정희대통령을 만나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직접 하소연하겠다는 뜻이었다.

5시간에 걸친 광란의 도심 난동극
무장군복으로 인천에 내린 난동대원들은 제일 먼저 목욕탕에 들른 것으로 나타났다. 아마도 실미도의 피비린내를 먼저 씻겨내려는 의도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이후 시내버스를 탈취했다가 직행버스로 옮긴 뒤 10여명의 승객을 인질삼아 서울로 향했다. 이때 버스를 제지시키려던 교통경찰이 이들의 조준사격에 의해 첫 민간인 희생자가 된다.

당시 신문보도에 따르면 직행버스 승객이었던 이강인씨(당시 40세)는 이들이 승객들에게 한 말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조금만 훈련받으면 팔자고치게 해 준다고 약속해놓고 4년이 지나도록 십원짜리 동전한닢 구경조차 시켜주지 않았다. 깡보리밥에 매만 실컷 두들겨맞고 죽을 고생을 했고 심지어 동료 가운데는 맞아 죽은 사람도 있다” 승객 이씨의 증언은 폭발직전의 실미도 684부대원들의 심정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서울에 접어들면서 버스기사가 감시눈길이 소홀한 틈을 타 도망쳤고 할 수없이 대원중에 한 사람이 운전대를 잡았다. 하지만 운전이 미숙해 결국 대방동에서 잠복중이던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졌고 버스는 국정교과서 앞에서 길가 가로수를 들이받은 채 멈춰섰다. 잠시후 3발의 수류탄 폭음이 터졌고 마침내 5시간(인천 잠입이후)에 걸친 무장 난동사건은 자폭으로 막을 내렸다. 이들과 경찰의 교전으로 경찰, 민간인 6명이 사망했고 16명이 부상당했다. 여기에 실미도에서 사살된 기간병을 합치면 사망자는 18명으로 늘어난다. 또한 훈련대원들은 실미도에서 숨진 2명과 자폭한 18명을 포함, 총 20명이 숨졌고 4명이 현장에서 살아남아 군사법정에 서게 된다. 생존자 4명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듬해인 72년 3월 10일 공군비행장에서 총살형이 집행됐다. 이들은 사형집행직전 애국가를 불렀고 대한민국 만세를 3번 외친 뒤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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