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124군부대 보다 무장행군 능력 앞서, ‘인간병기’ 훈련
70년 이수근 사건직후 북파명령, 비행정 탔다가 작전취소

‘3개월안에 북파능력 숙지시켜라’
68년 7월 7일, 행운의 숫자가 겹친 날 ‘684부대’ 일명 ‘주석궁 폭파부대’는 실미도에서 자체적인 부대 창설식을 가졌다. 684부대는 68년 4월 부대 창설이 결정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창설초기 중정이 직접관리하는 조직답게 모든 보급과 처우는 최상급이었다. 훈련대원의 사기도 충천해 훈련성과가 눈에 띄게 향상됐다. 하지만 외줄타기 유격훈련 과정에서 2명의 대원이 바위위로 떨어져 큰 부상을 입었다. 후송치료를 받았지만 부러진 다리가 정상회복이 불가능해 모두 취사병으로 내정됐다.

대원들은 북한식 행진과 군가도 배웠고 말투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도록 학습시켰다. 훈련강도가 높아지면서 최초의 부대이탈 사고가 발생했다. 야간 독보법 훈련 과정에서 새벽 6시까지 부대로 복귀하도록 했으나 8시가 되도록 2명의 대원이 보이지 않았다. 몇시간뒤 마을 민가의 부엌 아궁이속에 숨어있던 2명이 출동한 기간요원과 대원들에 의해 붙잡혔고 이들은 ‘배신자’로 낙인찍혀 포박당한채 부대로 끌려왔다.

포박당한 2명은 훈련대장의 지시에 따라 뭉둥이를 든 동료 대원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684부대는 당초 이탈자에 대해서는 ‘군법에 의하지 않고 처단한다’고 숙지시켰던 것이다. 중정은 당초 3개월간 훈련을 완성시키고 곧바로 북파시킬 계획이었다. 훈련개시 2개월뒤 훈련대원들의 48kg 완전군장 산악행군 능력이 시속 13km에 달해 김신조의 124군부대가 자랑하는 시속 11.7km를 이미 능가했다. 사격훈련도 대원 1인당 하루 450발을 소모할 정도였고 낙하훈련과 단검·도끼 던지기까지 습득해 완벽한 ‘인간병기’로 연마됐다. 하지만 8월말 무장 4km 수영훈련 과정에서 또 한 대원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작전이 개시되기도 전에 3명이 사망하고 2명은 훈련불능의 부상을 입은 셈이었다.

지연되는 북파공작, 커지는 욕구불만
3개월 훈련시한이 꽉찬 9월, 684부대는 작전명령만을 학수고대하는 입장이었다. 훈련대원들은 어차피 목숨을 저당잡힌 입장에서, 특수임무를 완수하고 하루빨리 약속된 대가를 얻기를 바라는 심정이 컸다. 하지만 당시 미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으로 북미간의 협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중정은 독자적인 북파공작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결국 9월 작전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부대는 반복훈련을 거듭하는 상황이었다. 긴장이 느슨해진 가운데 이른바 ‘하극상’ 사건이 벌어졌다. 땔감을 구하기위해 산에 간 훈련대원 A가 경비감시를 위해 따라간 기간요원을 폭행했던 것. 특히 훈련대원 중에서도 왕초노릇을 하던 A는 동료대원들을 화장실로 불러내 성폭행하는 등 원성이 자자했던 상황이었다.

훈련대원 기강해이에 위기감을 느낀 훈련대장은 하극상을 이유로 A씨를 포박시킨채 대원들의 몽둥이 ‘즉결심판’을 지시했다. 결국 또 한사람의 청년이 숨을 거뒀고 몇 달 전 탈주하다 적발돼 죽임을 당한 두명의 시신과 함께 모두 자체 화장처리했다. 이미 대한민국 호적에서 이름이 사라진 훈련대원들의 신병처리는 아무런 적법절차도 필요없었다. 한 인간의 목숨을 빼앗는 과정은 즉흥적이고 잔혹한 ‘정글의 법칙’으로 통했다.

이수근 사건직후 북파침투 명령 떨어져
69년 1월 귀순한 이수근이 콧수염 변장을 하고 김포공항을 빠져나갔다가 베트남 사이공 공항에서 검거돼 한국으로 압송됐다. 이수근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기소돼 재판을 받았고 같은 해 7월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이수근 사건직후 중정에서는 나름대로 북파공작 시기를 결정했고 684부대에 1개조(9명)의 북파공작원을 선발하도록 지시했다.

선발된 공작원들은 발대식을 갖고 서해안 북쪽 침투기지로 이동했다. 이들은 수소를 채워 정적부량으로 공중을 나는 경비행기인 ‘베론’을 타고 북한 평양 상공까지 침투키로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베론’은 기체를 빼면서 서서히 착륙해 흔적도 없이 땅속에 묻으면 그만이었다. 마침내 D-DAY 전날밤 중정 책임자는 양주파티를 열었고 훈련대원들은 술기운에 번지자 연신 ‘김일성 주석궁을 폭파하라, 체포되면 자폭하라’는 구호를 외쳐댔다.

다음날 밤 9시 비행선 ‘베론’에 수소를 채우고 풍향과 풍속을 체크했다. 마침내 새벽 3시 침투시각이 다가왔고 실미도 북파공작원 9명이 베론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이 순간 상부로부터 무전연락이 떨어졌다. ‘북파 침투 중지’ ‘전 공작원은 베론에서 하선하고 대기하라’ 이로부터 1개월 가량 침투기지에 더 머물던 북파공작원들은 다시 실미도로 돌아와야만 했다.

청주출신 ‘단검의 귀재’가 있었다

김방일씨, ‘왜곡 바로잡기 위해 출간 결심,
아직도 못다한 말 있다’김방일씨의 ‘실미도의 증언’에는 청주출신 훈련대원 김동주(가명)에 대한 추억이 5쪽에 걸쳐 실려있다. 청주 영운동 출신으로 청남초교를 졸업하고 대전으로 가출해 구두딱이를 하다가 곡마단장을 만나 서커스판에 끼어들게 된다. 김동주는 단검투척을 장기로 배웠고 전국을 유랑하며 7-8년을 보냈다. 공연장에서 정보기관 요원을 만나 포섭된 뒤 아무도 모르게 실미도로 향했다.

김방일 당시 훈련교관은 김동주와 청주생활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중 김동주의 아버지가 부친의 친구임을 눈치챘다. 하지만 특수부대 훈련교관의 신분이기 때문에 감출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고향 청주에 내려갔을 당시 김동주 부친과 마주친 적도 있었다는 것. 김방일씨의 아버지와 동네 대포집에서 술을 마시다 휴가차 내려간 친구 아들을 만났고 “우리 셋째가 자네와 같은 나이인데, 집에 있었다면 군대에 가 있을텐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통 연락이 없어”라며 안타까워 했다는 것. 김방일씨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채 답답한 심정을 삭여야만 했다.

기사탈고를 앞두고 취재진은 지난 18일 김방일씨와 전화연락을 취했다. 전날 서울에서 열린 영화 ‘실미도’ 시사회에 다녀온 김씨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영화로 구성된 장면을 보면서 실미도의 3년 생활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구천을 떠돌고 있을 대원들의 원혼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김씨는 청주 출신 김동주의 실존여부에 대해 “사실이며 현재 가족들의 연락처는 알지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실화소설 ‘실미도의 증언’ 발간 동기에 대해서는 “수년전에 실미도를 소재로 발간된 소설내용 가운데 납득하지 못할 부분이 많았다. 실미도 684부대의 처음과 끝을 모두 알고있는 내가 최대한 진실을 밝혀야만 왜곡된 ‘실미도’가 바로잡힐 것 같아 나서게 됐다. 하지만 모든 것을 밝히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고 말했다. ‘실미도의 증언’은 대형서점을 통해 판매되고 있지만 언론매체를 통한 서적광고를 하지 않고 있다. ‘실미도의 증인’ 김방일씨가 자신의 실화소설이 상업적으로 비쳐지는 것을 꺼려하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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