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만에 털어놓은 ‘실미도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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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만에 털어놓은 ‘실미도 증언’
  • 권혁상 기자
  • 승인 2003.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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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김방일씨 실화소설 발간, 684부대 창설부터 폭파까지 증언
31명의 민간인 훈련대원 중 ‘청주 출신 1명 있었다’ 확인

실미도 북파공작원의 훈련교관이었던 김방일씨(59·청주 거주)의 경험담을 토대로 쓰여진 실화소설 ‘실미도의 증언’ 출판기념회가 11일 청주 명암타워에서 열렸다. 청주에서 건설업을 하고 있는 김씨는 민간인출신으로 구성된 ‘실미도 북파공작원’ 훈련을 지휘하고 71년도 서울진입 난동사건 직후에는 훈련막사를 폭파시키는등 사후수습을 한 장본인이다.

일명 ‘김일성주석궁 폭파부대’로 알려진 실미도 북파공작원 훈련부대는 68년 김신조 무장간첩단 서울침투 직후 보복공격 차원에서 창설됐다. 당시 공군 특수부대 중사였던 김방일씨는 안기부로부터 훈련교관으로 차출돼 3년간 이들을 훈련시켰다. 하지만 남북관계 해빙으로 북파공작이 중단된 상황에서 보급등 대우가 열악해지자 훈련대원 24명은 71년 8월 기간병을 사살하고 실미도를 탈출,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하겠다며 서울로 진입하다 군경의 제지에 가로막혀 자폭했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4명은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됐다.

훈련대원들은 전과자 출신이 많았으며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은채 부대를 운영했다. ‘실미도 특수부대 난동사건’은 남북관계의 비밀스런 사안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진실이 은폐됐으나 지난 99년 김방일씨가 <충청리뷰>와 단독인터뷰를 가졌고 MBC가 ‘이젠 말할 수있다’ 프로그램을 통해 진상을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김씨는 자전소설 ‘실미도의 증언’을 통해 훈련대원 가운데 청주 출신 인물이 있었으며 유가족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다고 밝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국가권력으로부터 탈법적인 방법으로 차출돼 살인적인 훈련을 받고 비명에 사라진 31명의 원혼에 대해, 과연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실미도의 증언’ 가운데 핵심내용을 요약 정리해 본다.

‘김일성 주석궁을 폭파하라’박대통령 직접지시

1945년 충주시 교현동에서 태어난 김방일씨는 초등학교 시절 청주 금천동의 빈민촌이었던 ‘갱 변’으로 이사왔다. 일제 당시 금천동 뒤쪽 이정골에 금광이 있었기 때문에 마을 이름도 ‘갱 변’으로 불렸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한 김씨는 세광고교로 입학했고 고교시절 태권고 유도 유단자이면서 학생회 간부를 맡는등 남다른 통솔력을 보였다.

생활고로 대학진학을 포기한 김씨는 공군하사관 모집공고를 일고고 입대를 결심한다. “하사관을 이수하면 대학도 보내주고 외국유학도 시켜준다는 특전을 보고 65년도에 공군하사관 27기로 입대해 정보특기를 부여받았다” 김씨는 하사관 임관후 서울 오류동 공군 정보부대인 2426전대에 배속됐고 낙하훈련을 받기도 했다. 특히 67년 특수공작훈련 제1기생으로 차출돼 국내 훈련뿐만 아니라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정보교육과 필리핀 정글에서 생환교육까지 끝내 전문적인 ‘특수공작원’으로 거듭났다.

이듬해인 68년 1·21 김신조 무장간첩단 서울침투 사건이 발생했고 같은 해 6월 김씨는 중앙정보부에 차출돼 느닷없이 청와대 방문을 하게 된다. 실미도 교육대장 김준철 준위와 중앙정보부 담당국장·부장 그리고 김씨 등 4명이 직접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했다. 당시 박대통령은 “김일성이가 내 모가가지를 딴다 했단 말이야, 임자들 그말을 어케 생각하나? 내가 김일성이의 모가를 따야 하는게 아냐?”라며 ‘김일성 주석궁을 폭파하라’고 직접 지시했다는 것. 박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김씨의 중사 계급장을 떼어내고 소위 계급장을 달아주며 격려했다.

특수훈련 장소 중정이 물색했다
박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앞서 중앙정보부는 이미 3개월전에 보복공격 방침을 정하고 은밀하게 북파공작원 훈련장소를 물색했다. 중정 공작과장과 조정관이 직접 공군 정보부대 공작선을 타고 서해안 일대의 무인도를 둘러봤다. 북방한계선에 인접한 연평도, 우도 인근은 사격과 폭파훈련으로 인해 북측과 신경전이 벌어질 수 있어 배제됐고 최종적으로 무의도와 연결된 실미도가 낙착됐다. 하루중 낮 6시간 동안만 바닷길이 열려 무의도 왕래할 수 있기 때문에 훈련대원의 이탈방지과 보안유지에도 적합했다.

이에따라 1개월뒤인 68년 4월 중정의 지시에 따라 공군정보부대 출신인 실미도 교육대장 김준철준위과 특수공작교육이수자인 소대장 4명을 비롯해 경비 등을 맡을 기간요원 31명이 은밀하게 실미도에 발을 디텼다. 이들은 실미도 파견 한달전부터 일체의 화기, 장비에 새겨진 공군마크와 부대번호를 지우는 작업을 벌였다. 실체는 있지만 아무런 흔적이 없는 ‘도깨비 부대’로 만든 것이다. 실제로 외부 보안유지를 위해 대형장비도 없이 2개월동안 기간요원들이 식수개발, 막사 건립, 특수훈련장 조성 등 막노동을 실시했다.

민간인 훈련대원 어떻게 차출했나
민간인으로 구성된 31명의 훈련대원들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직접 포섭한 20대 청년들이었다. 주로 서울, 경기, 충청권에서 끌어들였으며 폭력등의 혐의로 형사처벌 기로에 놓인 주먹꾼이나 부모가 없는 서커스단 곡예사, 직장을 못잡고 빈둥대는 실업자 등 사회 비주류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연좌제의 굴레를 벗겨주겠다’ ‘형사처벌 면제해 주고 먹고 살도록 해주겠다’ ‘직장 잡아주고 평생 보장해주겠다’는 달콤한 유혹에 쉽게 빠졌고 스스로 ‘악마의 섬’을 선택했다.

중정요원들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접근한 뒤 “군대 한번 더 가는 셈치고 특수목적만 달성하면 팔자를 고친다”고 설득했다. 포섭당한 20대 청년들은 ‘가족들에게도 절대 비밀’을 당부한 중정요원들의 말에따라 은밀하게 약속된 서울역 부근 태흥빌딩 2층 기관원 사무실로 모여들었다. 여기서 인천 차이나타운 여인숙으로 이동한 뒤 새벽 4시께 실미도로 향하는 공작선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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