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충주고 2년 휴학중 ‘참교육 열망’ 유서 남긴채 투신자살

▲ 고 심광보 군 90년 9월 7일 저녁 8시 30분께 충주시 성서동 3층 건물 옥상에 솟아오른 작은 불기둥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인도로 떨어진 불기둥은 마지막까지 무엇인가를 소리치고 있었지만 놀란 행인들은 쉽사리 다가서지도 못했다. 19세의 꽃다운 청년, 심광보군(당시 충주고 2년 휴학생)은 이렇게 꽃봉오리를 접었다. 87년 6·10 항쟁이후 민주화의 열망이 넘쳐나던 시절, 청년 심광보는 ‘참교육 세상’을 염원하는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를 불태웠다. 당시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현장 목격자 진찬송씨(당시 충주공전 1년)는 “시내버스 승강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건물옥상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서 올려다보니 온옴이 불길에 휩싸인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심군은 상태가 위독해 서울 강동 성심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이튿날인 8일 새벽 5시께 숨을 거뒀다. ‘민주화 분신정국’의 단초가 됐던 고교 휴학생 심광보군의 분신 자살사건이 13년만에 재조명되고 있다. 민주화운동 보상신청을 받은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가 심군의 죽음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보상심의위원회는 민주화운동 최종판정을 보류키로해 지역 재야 진보인사들의 가슴을 졸이게 하고 있다. 고 심광보군의 분신자살 경위를 되짚어보며 고인의 삶을 정리해본다. 참교육·사회개혁 목마른 학생 심군은 가난한 충주 앙성면 농가에서 5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제적 무능력자였고 심군은 고교 진학마저 어려운 형편이었다. 학교 성적은 뛰어났지만 실업고 진학을 고민했고 결국 친척의 도움으로 당시 비평준화 지역의 명문고교인 충주고로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신입생 시절인 89년은 전교조 출범과 정권의 탄압으로 교육현장이 어수선하던 시기였다. 특히 심군의 1학년 담임교사도 전교조에 참여했다가 해직당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는 심군이 사회적으로 눈뜨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전교조의 고교생 모임인 ‘정다운 교실’에 적극 참여하는등 전국 고교생 학생운동의 불씨를 지피는 주역이 됐다. ‘정다운 교실’은 이듬해 ‘사람사랑’으로 이름을 바꾸고 충북지역 고교생연대모임을 꾸리는 계기를 마련한다. <고 심광보열사 6주기 기념자료집>에 따르면 심군은 친척의 재정지원이 끊기면서 2학년 재학중인 90년 5월 학교에 휴학계를 낼 수밖에 없었다. 휴학신청을 한 심군에게 학교측에서는 “우리 학교는 수천만원을 내고서라도 전학오겠다는 학생이 줄을 서있다. 차라리 자퇴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종용해 자신의 글에 ‘무서운 학교’로 낙인찍게 했다. 심군은 ‘사람사랑’과 독서모임인 ‘책사랑방’ 회원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사회과학의 안목을 키우게 된다. 또한 가정형편을 비관해 88년 음독자살한 형의 부재는 청년 심광보에게 세상의 불평등을 바로보고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겠다는 믿음을 심어준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평소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농촌선교를 하겠다는 소박한 꿈을 털어놓기도 했다.세상 변화의 ‘때를 고대하며’ 궁박한 집안살림을 걱정했던 심군은 서울로 상경해 지하철 가판신문 장사로 변신했고 숨지기 직전에는 영업회사 외판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생전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는 진작부터 죽음을 예감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8월 25일 편지글에는 “한가지 묻고 싶다, 우리들의 친구가 얼마나 더 죽어야 참교육이 이루어 지나”라는 구절이 눈에 띈다. 이후 9월 6일 민주사회와 참교육을 갈망하는 내용의 편지를 전교조충북지부와 친구들에게 미리 발송한다. 죽음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세상 가장 큰 울림을 전하고자 했을까? 9월 7일 저녁 온몸에 신나를 뿌린 심군은 ‘오, 그대들이여! 인내하고, 싸워야 합니다’라는 절규의 글을 남긴채 몸을 던진다. 심군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지역 재야단체에서는 지현성당에 장례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민주학생장’을 준비했다. 하지만 경찰은 서울에서 내려오던 운구버스를 탈취한채 심군 부모의 참석을 종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경찰과 장례준비위의 대치가 계속된 가운데 마침내 9월 10일 시신을 넘겨받아 지현성당에서 공식적인 장례식을 거행했다. 이어 모교인 충주고를 방문해 간단한 노제를 지낼 예정이었으나 학교측은 경찰을 불러 교문을 봉쇄한 채 막아섰다. ▲ 지난 96년 심광보 군의 6주기 추모제를 취재보도한 월간지 ‘충청리뷰’기사. 심군의 분신사건은 고교생이라는 점때문에 언론에서 소홀하게 다룬 측면이 있다.
경찰·교사 막아선 운구차

심군의 같은 반 친구였던 이태희씨(32)는 “그날 아침 교련조회를 거부하고 많은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영정사진을 반입해 초혼제를 지냈다. 학교측에서 제지하려 했지만 방송반을 통해 학생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후에 운구차가 도착했을 때는 경찰병력과 교사, 교련간부 학생들까지 동원하는 바람에 먼발치서 눈물만 흘렸다. 광보가 생전에 그리워하던 교정을 마지막으로 밟아보지 못한 것이 너무도 서글펐다”고 말했다.

충주지역 재야단체와 심군의 친구들은 91년부터 해마다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올해는 13주기 추모제를 맞아 기념사업회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전교조충북지부 교사들은 2001년 ‘광보장학회’를 구성, 생활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또한 당시 구성된 심광보열사 장례준비위원회는 이후 지역의 민주역량을 한데 모으는 구심적 역할을 해왔다. 고 심광보 열사에 대한 세상 기록은 인터넷 ‘다음’ 카페 ‘심광보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를 기리는 카페는 이렇게 열린다. ‘삶이 힘겹게 느껴져도 우리가 너와함께 있다는 사실을 잊지마’

광주 김철수열사 민주화운동 인정받아

지난 91년 5월 광주 보성고 운동장에서 분신자살한 김철수군(18·3학년 재학중)의 장례식은 전남지역 고교생,전교조 해직교사 등 1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모교 운동장에서 치러졌다.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주도해 ‘민주국민장’ 영결식을 마친뒤 김군의 주검은 광주 망월동 ‘5·18묘역’에 안장됐다.

숨진 김군은 학생회 주최로 교내에서 열린 ‘5·18광주민중항쟁 11주년기념식’이 끝날 즈음 운동장 동쪽에서 화염에 휩싸인채 ‘노태우정권 퇴진하라, 이것이 민주화냐’라는 ’구호를 외치며 30여m가량 뛰어나오다 쓰러졌다. 김군의 분신자살은 이미 지난해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해 보상 대상자로 분류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심광보군의 경우 1차 조사결과 심의위 회부를 보류한 것으로 알려져 지역 민주인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심광보열사 추모제준비위원회 신건준사무처장은 “민주화운동 당시 분신 희생자들을 비교평가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광주와 충주의 지역상황이 크게 달랐다는 점이다. 민주화의 성지였던 광주에서는 교정에서 학생, 교사, 주민들까지 모여 ‘민주국민장’을 치렀지만 충주는 시신을 탈취당했고 학교와 경찰이 교문앞을 막아선 상황이었다. 특히 심군의 분신자살은 고교생 분신의 첫 사례였기 때문에 언론 등에서 소홀히 취급한 측면이 있다. 충주지역 민주화 운동의 큰 족적으로 삼고있는 심광보 열사의 추모제가 13년째 계속되고 있는 이유를 민주화보상심의위에서 신중하게 판단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도종환·권영국 교사 등 생전에 심광보군을 만났던 인사들과 추모제를 준비해온 친구들은 민주화보상심의위에 개인 의견서와 심군의 활동자료를 제출하며 공정한 심사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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