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군의 같은 반 친구였던 이태희씨(32)는 “그날 아침 교련조회를 거부하고 많은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영정사진을 반입해 초혼제를 지냈다. 학교측에서 제지하려 했지만 방송반을 통해 학생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후에 운구차가 도착했을 때는 경찰병력과 교사, 교련간부 학생들까지 동원하는 바람에 먼발치서 눈물만 흘렸다. 광보가 생전에 그리워하던 교정을 마지막으로 밟아보지 못한 것이 너무도 서글펐다”고 말했다.
충주지역 재야단체와 심군의 친구들은 91년부터 해마다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올해는 13주기 추모제를 맞아 기념사업회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전교조충북지부 교사들은 2001년 ‘광보장학회’를 구성, 생활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또한 당시 구성된 심광보열사 장례준비위원회는 이후 지역의 민주역량을 한데 모으는 구심적 역할을 해왔다. 고 심광보 열사에 대한 세상 기록은 인터넷 ‘다음’ 카페 ‘심광보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를 기리는 카페는 이렇게 열린다. ‘삶이 힘겹게 느껴져도 우리가 너와함께 있다는 사실을 잊지마’
광주 김철수열사 민주화운동 인정받아
지난 91년 5월 광주 보성고 운동장에서 분신자살한 김철수군(18·3학년 재학중)의 장례식은 전남지역 고교생,전교조 해직교사 등 1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모교 운동장에서 치러졌다.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주도해 ‘민주국민장’ 영결식을 마친뒤 김군의 주검은 광주 망월동 ‘5·18묘역’에 안장됐다.
숨진 김군은 학생회 주최로 교내에서 열린 ‘5·18광주민중항쟁 11주년기념식’이 끝날 즈음 운동장 동쪽에서 화염에 휩싸인채 ‘노태우정권 퇴진하라, 이것이 민주화냐’라는 ’구호를 외치며 30여m가량 뛰어나오다 쓰러졌다. 김군의 분신자살은 이미 지난해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해 보상 대상자로 분류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심광보군의 경우 1차 조사결과 심의위 회부를 보류한 것으로 알려져 지역 민주인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심광보열사 추모제준비위원회 신건준사무처장은 “민주화운동 당시 분신 희생자들을 비교평가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광주와 충주의 지역상황이 크게 달랐다는 점이다. 민주화의 성지였던 광주에서는 교정에서 학생, 교사, 주민들까지 모여 ‘민주국민장’을 치렀지만 충주는 시신을 탈취당했고 학교와 경찰이 교문앞을 막아선 상황이었다. 특히 심군의 분신자살은 고교생 분신의 첫 사례였기 때문에 언론 등에서 소홀히 취급한 측면이 있다. 충주지역 민주화 운동의 큰 족적으로 삼고있는 심광보 열사의 추모제가 13년째 계속되고 있는 이유를 민주화보상심의위에서 신중하게 판단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도종환·권영국 교사 등 생전에 심광보군을 만났던 인사들과 추모제를 준비해온 친구들은 민주화보상심의위에 개인 의견서와 심군의 활동자료를 제출하며 공정한 심사를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