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관계의 근간은 상호 존재 인정” 진리 다시 일깨워
강경론끼리 정면충돌…협상능력 고갈시켜

한국네슬레 사태가 145일만에 극적으로 정상을 회복했지만 사상 초유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길었던 분규기간만큼 숱한 문제점과 후유증을 동시에 남기게 됐다. 우선 한국네슬레 사태는 노사관계에 있어서 양측 모두 유연한 협상능력을 잃었을 경우 삶의 터전인 사업장을 얼마나 파국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지난 11월 28일 새벽 한국네슬레 노사가 임단협 합의안을 극적으로 도출해 냈을 때 주변은 환호성보다는 허탈감이 감돌았다. “겨우 이런 정도(?)의 합의안을 도출해 내는 데 145일이나 소모해야 했는갚하는 당연한 의문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한국네슬레 노사는 지난달 27일 오후 3시 임금협상을 위한 제 26차 본회의를 위해 협상테이블에 다시 앉은 후 무려 13시간이 넘는 마라톤 협상 끝에 28일 새벽 4시 30분 임금 및 고용안정에 대해 극적인 합의안을 도출해 냈다.

“이렇게 길게 끌어야 했나”
충북지방노동위원회에서 열린 이날의 본회의에서 한국네슬레 노사는 ▲ 고용안정에 대한 중요성을 함께 인식, 경영상의 구조 조정으로 근로조건의 변경 또는 감원 발생이 예상되는 경우 ‘근로조건 및 고용유지 위원회’를 설치하여 상호 협의 또는 합의하기로 한 내용을 포함, ▲기본급 대비 3%(호봉승급 포함 5.5%) 임금인상 ▲2003년에 한하여 적용하는 희망퇴직의 경우 희망퇴직위로금을 월 평균 임금에 근속연수를 곱한 금액의 1.5배로 산정해 지급키로 하는 내용 등 주요 안건에 대해 잠정 합의했다. 이 안은 즉시 노조원 찬반투표에 부쳐진 결과 75%이상의 압도적인 찬성률로 가결됨으로써 노사분규사태는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됐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 이번의 한국네슬레 사태는 노사 모두에게 일정 부분 귀책사유가 있었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회사측의 이해 못할 초반 대응이 상대방(노동조합)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했다고 하는 게 보다 타당할 것 같다.

이삼휘 사장은 임단협 초창기인 지난 여름 노조의 강력한 협상참여 요구에도 불구하고 칭병(稱病)삼아 미국으로 훌쩍 나가버렸다. 회사에서는 “신병치료를 위해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도미였다”고 설명했지만 노조 측은 “이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이 노조를 진지한 협상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며 불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경영진이 노조를 무력화하려는 전략을 갖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제기하는 등 비판 수위를 높였다. 실제 이 사장이 노사간 협상 테이블을 떠나 노조를 공격하는 등 외곽에서 언론 플레이를 하면서 노조의 대경영진 불신은 극에 달했었다.
네슬레 사태를 지켜본 노동당국이나 정보라인에서는 “현 노조집행부에 대한 경영진의 안티정서가 있었던 것”으로 분석했다. 노동당국의 한 관계자는 “네슬레 노조가 본래부터 강성노조는 아니었는데 경영진이 구사한 초반의 강경대응책이 사태를 악화시킨 일면이 크다”고 말했다. 경영진의 이같은 경직된 태도는 노조로 하여금 네슬레 본사가 있는 스위스에 원정투쟁단까지 보내는 미증유의 사태를 몰고 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노조도 최후의 저항수단인 파업을 너무 일찍 선택, 곧바로 벼랑 끝 대치 국면으로 몰고 간 것은 성급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번 사태가 결국 충북지방노동위원회의 중재로 노사가 여러 차례 만난 끝에 합의점에 이른 사실도 양측의 경직된 태도를 반증하고 있다.

갈등 후유증 해소 과제 남아
그러나 경영진이 노조의 파업에 대항, 직장폐쇄에 이어 “사업장 철수” 운운하며 계속적으로 강경일변도의 전략을 구사한 것이 경영진에게는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특히 협상기간이나 쟁의기간 중에 사업장 철수 검토설을 흘린 경영진의 처사는 소위 ‘OECD 가이드 라인 위반’ 논란을 촉발했고, 이를 계기로 경영진은 공세적 입장에서 수세적처지로 몰리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노조나 경영진 모두 넉달이 넘는 초장기 파업사태를 겪으며 많은 교훈을 얻게됐고, 궁극적으로 어느 일방의 완벽한 승리로 분규사태가 종식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협상의 기운을 조심스레 싹 틔우기 시작했다. 막후에서 점진적이나마 노사간 입장차이를 좁혀간 것이 26차까지 갔지만 결국 대타협을 이끌어 낸 것도 이 때문이다.

한동안 서로가 자신들의 원칙만 고수하며 융통성을 발휘할 여지를 스스로 없앤 것이 노사양측 모두의 협상력을 고갈시킨 현실을 자각한 것이다.
결국 협상이란 현실적인 것으로, 상호 주고받는 양보를 전제로 해야 타협이 가능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보여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만시지탄은 있지만 노사 모두 상대를 협상의 상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중대한 진전으로 보인다. 노사가 분규기간 발생한 상호간의 고소고발 사건을 모두 취소하기로 한 것도 눈 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인해 상대적으로 노사평화지대로 인식돼 온 청주산업단지에 나쁜 인상을 남긴 것에 대해 다른 기업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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