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전 9시, 학교 운동장에는 청주농고 전교생 600명이 모두 집합했어요. 당시 학생들은 검은 교복에 모자까지 썼으니 운동장이 온통 새까맸었지요. 학생들은 농기구와 플래카드를 들고 독재타도를 외치면서 운동장을 빠져나와 시내로 행진을 시작했죠. 긴장감 속에 정의감으로 팽배해진 학생들의 구국 행렬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청주 4.19학생운동에 불을 지핀 연규인씨(전 공무원·당시 청주농고 3학년)는 당시를 회상하며 만면의 미소를 지었다. 50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기억들은 아직도 오늘인 듯 생생하다.

"학교를 나온 전교생들은 경찰의 저지를 뚫기 위해 철로를 이용해 시내로 향했어요. 경찰과의 투석전에 대비해 철로에 깔린 돌을 교복 주머니 속에 넣고 시내로 진입했습니다. 거리에는 난생처음 보는 학생시위대를 구경하기 위해 시민들이 우르르 몰려나왔어요."

교사와 시민들의 은근한 지지 속에 학생 대열은 내덕동을 통과해 대성여고 길을 따라 시내 진출을 꾀했다.

"내덕동에서 경찰과 첫 대치상황이 발생했지만 학생들의 기세에 눌려 경찰이 물러섰어요. 이후 대성여고 앞에서 경찰과 맞닥뜨려 행렬이 두 개로 갈라졌어요. 그리고 청주여고 앞에선 기마병들이 나타나 물대포와 경찰봉으로 시위대를 저지하면서 학생 중 부상자가 발생해 시위 참가자들의 감정이 격앙됐어요."

부상자 소식에 학생들은 격해져 인근에 있는 도청 진입을 시도한다. 대기 중이던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 저지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부상자가 속출한다.

"이날 도청 앞에선 가장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어요. 지금은 복개돼 안보이지만 시위대가 서 있는 곳을 축으로 하천 양쪽에 경찰이 포진해 최루탄을 마구 쏘아댔고, 경찰은 곤봉으로 보이는 사람마다 마구잡이로 때렸어요. 도랑에 빠진 학생도 부지기수였고, 도망치다 숨어들어간 집이 경찰집이었다는 후일담도 있었죠."

연규인씨는 19일 중 가장 긴박했던 도청 앞 30분은 참으로 더디고 긴 하루였다고 말했다. 학생 대열은 도청에서 후퇴해 당시 대성동에 있는 세광고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시내 진입 통로가 한 곳밖에 없는 길을 선택한 것이 결국 함정이 되었다.

"기마대의 물대포를 피해 간 곳이 당산이었습니다. 200여명의 학생들은 무장경찰에 빙 둘러싸인 채 대치하다가 경찰 인도 속에 인근 중앙초등학교 강당으로 이동했어요. 강당에서는 무장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사찰과장이 쌍권총을 들고 단상에 올라와 주동자 색출 작업이 벌어졌어요. 빨갱이라며 체포한다고 위협했죠."

이때 살벌한 분위기를 잠재운 것은 다름아닌 서정일 교장 선생님이었다.

"주동자를 색출하겠다고 눈이 벌개진 경찰 앞으로 교장 선생님이 다가가시더니 학생들은 죄가 없으니 나를 체포하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자 김상현 학생위원장이 벌떡 일어서서 자신이 주동자라고 외쳤어요. 동시에 강당 안에 있던 학생들이 일제히 내가 주동자요 하며 소리쳤어요. 정말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죠."

영화 속 장면 같은 감동은 당시 경찰국장의 자제 호소와 함께 전원 석방을 발표한다. 이로써 1960년 4월 19일 5시간 동안 벌어진 청주 4.19 학생운동의 대서사시는 역사적 획을 그으며 4.19혁명으로 기록됐다.

그리고 50년, 이제 사회 일선에서 비켜 서 있지만 인생 후배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시 국민들은 배만 안 고프면 된다고 생각했던 때라 정치에 대해선 까막눈이었어요. 정치인들도 감히 나설 수 없는 시대였고, 민주주의는 더 더욱 생각할 수도 없었어요. 현재는 그런 시간 위에 만들어진 시대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바람이 있다면 개인주의 사고를 좀 더 확장해 사회에 기여하는 인생을 살아가길 꼭 당부하고 싶습니다."

그날의 함성에 덧붙인 연규인씨의 당부의 말이 잔잔한 울림이 되고 있다.

19일 무장경찰이 당산을 빙 둘러싼 가운데 교사와 학생들이 대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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