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에 떠난 매화기행에서 고고한 선비의 향기 발견
경남 산청의 덕천서원·산천재·단속사지터·남사예담촌 방문

▲ 정미경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 자연의 친구들
ㅣ정미경ㅣ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 자연의 친구들

청주충북환경연합이 ‘풀꿈생태문화탐방 초록에 풍덩’이라는 이름 아래 지난 10여년간 계속하고 있는 생태문화탐방이 올해도 시작됐다. 풀꿈생태문화탐방은 시민, 회원들과 함께 매월 1회 산, 들, 강, 바다를 찾아다니며 자연을 바라보는 눈을 새롭게 하고 생태적 감수성을 키우는 환경생태교육 프로그램이다. 본지는 3월부터 오는 12월까지 진행될 ‘풀꿈생태문화탐방’ 기행문을 시리즈로 연속 보도할 계획이다.

2010년을 힘차게 열어젖힌 첫 생태문화탐방은 ‘이른 봄에 떠나는 매화기행’이라는 주제로 지난 3월 13일에 진행되었다. 이제 걸음마를 막 뗀 3살 어린 아기부터 60세를 훌쩍 넘긴 어르신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과 나이를 가진 시민· 회원 96명이 참가하였다. 경남 산청의 덕천서원, 산천재, 단속사지터, 남사예담촌 등을 찾아 남도의 봄내음을 가슴 한가득 안고 돌아왔다.

경남 산청은 꼿꼿한 절개를 지닌 선비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평생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심혈을 기울인 남명 조식선생과 민중의복에 일대 혁명을 가져온 삼우당 문익점선생 같은 분들의 숨결이 스며있는 고장이다. 거기에 매서운 꽃샘추위에도 끝내 꽃망울을 터뜨리고 마는 봄의 전령, 지조와 절개의 상징인 산청삼매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 청주충북환경연합 회원과 시민 등 96명이 함께한 매화기행은 경남산청에서 진행됐다.
가장 먼저 만난 것은 덕천서원과 세심정, 그리고 산천재의 남명매이다. 조식선생 사후 그의 제자들이 선생의 뜻을 받들기 위해 세운 덕천서원 앞에는 시원스레 흐르는 덕천강을 바라보며 지어진 세심정이 자리하고 있다. 세심정에 앉아 보니 아직은 싸늘한 봄바람이 몸을 휘감고 지나간다. 그 바람에 세상사에 찌든 마음의 때가 다 실려 날아가는 듯 상쾌하기만 하다.

청주충북환경연합의 생태문화탐방은 날씨까지 섭외한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보다. 전날까지 날이 궂어 걱정을 많이 했는데 날씨 또한 기가 막히다. 덕천서원 넓은 뜰 한구석, 따사로이 내려앉는 봄볕에 큰개불알풀이 어여쁜 보랏빛꽃을 활짝 피웠다. 그 이름이 우스꽝스러워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이 봄햇살속에 투명하게 부서져 내린다.

조식선생은 한평생 벼슬을 마다하고 재야에 묻혀 후학을 양성하며 날 선 상소문으로 조정을 서늘하게 한 강직한 선비이다. 선생이 공부 하시던 산천재에는 손수 심으셨다는 450년 연륜을 헤아리는 우직한 남명매가 따사로운 양지에 자리를 잡고 서 있다.

향기로 존재를 드러내는 매화
매화에는 네 가지 귀함이 있다고 한다. 부유하지 않고 야윈 것, 어리지 않고 늙은 것, 활짝 피지 않고 봉오리 진 것, 빽빽하지 않고 성긴 것이 바로 고매한 인품을 가졌던 선비들이 매화를 좋아했던 이유이다. 열매를 얻기 위해 대량으로 심은 것이 아니라 꽃을 보기 위해 앞마당에 한 두 그루 고이 심은 매화나무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디며 늙고 병든 몸에 가까스로 피워낸 듯 감히 손대기도 조심스러워 보이는 작고 여린 꽃몽우리가 이제 막 터지려는 듯 매달려 있다. 겉모습이 화려하지 않은 매화는 그 향기로 자신을 드러낸다. 바람을 타고 실려오는 깊고 그윽한 향에 곁에 다가가기도 전에 그만 취해 버렸다.

매화를 온몸으로 느끼기 위한 ‘오감으로 느끼는 매화향기’ 라는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눈으로 매화의 네 가지 귀함을 보고 코로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 매화는 일생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을 음미해 본다. 입으로는 말린 매화 한 송이 잔에 띄워 서서히 피어나는 꽃향기의 기막힌 맛을 보고,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비로소 매화향을 맡을 수 있다는 말에 두 귀를 바짝 대본다.

손이 아닌 마음으로 고고한 절개를 지닌 매화의 속내를 헤아려 본다. 오감을 통해 매화를 느끼는 동안 언뜻 보기에 비슷해 보이는 벚꽃이나 살구꽃과는 분명히 다른 아름다움이 있음을 저절로 알게됐다. 수백년을 묵었어도 크지 않은 키, 정제되지 않는 투박한 줄기에 세월의 흔적인 지의류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겨우 한 두 송이씩 줄기에 바짝 매달려 피어 있는 매화는 부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을 보인다. 때문에 벚꽃보다 화려하진 않지만 수수함속에서 피어나는 매화의 절제된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630년된 정당매는 안타깝기만…
지금은 쓸쓸히 터만 남은 단속사지에서 수령이 가장 높다는 630년된 정당매를 만날 차례다. 번성한 신라의 유물이지만 철학이 달랐던 조선의 사대부들에 의해 훼손된 단속사의 슬픈 운명만큼 정당매의 모습도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나 정당매를 바라보며 진행된 ‘붓으로 그려보는 고매’ 프로그램은 어느새 우리의 가슴에 매화의 향이 한가득 배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사뭇 웃고 떠들며 즐겁기만 했던 아이들이 따사로운 봄볕이 내려앉는 돌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진지한 얼굴로 작품을 만들어 내는 모습은 이번 기행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모둠별 대표 발표자에게만 주려고 작은 봉지에 말린 매화꽃을 담아 가져간 선물은 저마다 발표를 하겠다고 길게 늘어선 아이들 때문에 그 양이 한참이나 모자라 즐거운 탄식이 터져나오게 했다.

전통가옥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남사예담촌에서는 안타깝게도 원정매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오래된 것들의 묵은 향기에도 취해 보았다. 400년전 지어졌다는 이씨고가의 회화나무, 수없이 개보수를 거쳤을 담쟁이돌담, 배고픈 백성들을 고려해 낮게 지은 최씨고가 굴뚝의 그을음, 무너진 기와지붕의 싱그런 초록이끼, 힘겹게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700년 된 감나무둥치에서 피어오르던 옛 향기, 세월의 향기….

우리가 찾은 곳은 흐드러지게 군락을 이루어 화사하게 눈길을 잡아 끄는 축제현장이 아니었다. 고요한 마음가짐과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떠났던 이번 매화기행은, 저마다 제 목소리를 내려고만 하는 소란스런 이 시대를 올곧게 살아가려는 우리들에게 작은 용기를 주었다. 아직도 코 끝에 매화향이 남아 있는 것 같다는 한 참가자의 소감이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4월에 진행될 ‘벚꽃비 내리는 고궁의 봄’은 어떤 향기로 그 모습을 드러낼지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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