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시간 ‘가림막’에 이어 등장한 ‘오름길 학습’ 왜? 무엇 때문에?
군대에서 통하는 희망조사가 초등학교까지…이것이 정부의 교육관인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진행되는 정책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몰상식으로 치닫고 있음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법에 따라 지위와 임기가 보장되는 기관·단체의 장들에게 사임을 종용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검찰을 동원해 수사를 하거나, 온갖 구실을 만들어 기어코 끌어내린 후 줄줄이 정권의 측근 인물들을 앉히는 ‘낙하산 인사’를 단행하는 것은 벌써 전설이 됐다.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4대강 정비 사업에 들어가는 천문학적 예산을 충당하느라 다른 사업들은 쪽박 차고 손가락만 빠는 처지가 됐다. 안 그래도 겨우 시늉만 하던 복지예산을 대폭 삭감하는가 하면 심지어 가정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지원되던 결식아동 급식비까지 중단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상식이 있는 국민이라면 걱정을 안 할 수가 있겠는가.

선택이 통하지 않는 학교현장
미국 쇠고기 수입부터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을 열거하자면 입이 아프고 숨이 찰 정도로 숱하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런 비상식적인 일들을 대놓고 보란 듯이 한다는 것인데, 내게는 이런 황당한 경우가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왔다. 새 학기가 시작된 첫날, 올해 6학년이 되는 아들 녀석이 학교에서 만들었다고 보여주는 것이 시험시간에 쓰는 가림막이었다.

MB정부 들어 진단평가니 일제고사니 해서 아이들을 시험과 경쟁으로 몰아넣는 것이 마땅찮았던 차에 새삼 씁쓸했는데, 다음날엔 안내문을 한 장 들고 왔다. 학교장 이름으로 작성된 안내문은, 아이들 학력 신장을 위해 방과 후에 ‘오름길 학습시간’을 운영하며, 기초학습력이 부족하거나 학력신장을 원하는 어린이, 가정에서 학습이 어려운 어린이 등의 참여를 적극 권장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아래에는 학부모의 희망 여부를 표시할 수 있도록 칸을 만들어 두었다.

▲ 만평=연규상
지난해 일제고사 결과 우리 지역이 거의 꼴찌 수준이어서 교육청에서 학력신장 대책을 세우느라 야단이 났다더니, 그래서 초등학교 아이들까지 보충수업을 시킨다더니 여기도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

‘보충수업’이란 말에 여론이 안 좋은 터에 ‘오름길 학습’이란 말을 만들어내느라 속깨나 끓였겠다고 생각하니 쓴웃음이 올라왔다. 어쨌든 안내문은 선택하는 형식이었으므로 아이에게 의사를 물었더니 놀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싫다고 대답했다. 나 또한 아이가 기초학습이 부족하다고 생각지도 않고 더 이상의 학력신장을 원하지도 않았으므로 ‘불희망’에 ○표를 하고 도장을 찍어 아이에게 돌려주었다.

그런데 아이가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 말인즉, 담임선생님이 안내문을 나눠주며 한 사람도 빠짐없이 꼭 ‘희망’에 ○표를 받아오라고 누누이 강조했다는 것이었다.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음을 눈치 챘지만, 선생님이 그런 불합리한 요구를 할 리가 있겠느냐는 말로 얼버무리고 그대로 들려 보냈다.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자기가 ‘희망’으로 고쳐서 제출했다고 털어놓았다. ‘불희망’을 선택한 아이가 하나도 없었고 혼자 선생님에게 찍혀서 질책 받을 것이 두려워 그리했다는 말을 들으며 화가 치솟았다.

하지만 저 나름대로 선생님과 부모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받았고, 노는 것을 포기하고 보충수업을 감당하겠다는 아이를 나무랄 수만도 없었다. 그런 문서는 선생님과 학부모 사이에 일종의 대화인데 네가 임의로 수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설명으로 울먹이는 아이를 달랬다. 후환이 두려워 스스로 자기를 꺾는 것은 비겁한 일이라는 말은 부끄러워서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아이가 받을 스트레스를 우려해서 나는 전화라도 한 통 해야겠다는 생각을 접고 말았으니까.

나는 화를 삭이며 두 가지 정황을 생각했다. 하나는 아이 말대로 스스로 자기검열을 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선생님의 종용으로 바꾼 경우였다. 물론 후자의 경우는 생각하기도 끔찍한 일이므로 아이 말을 믿기로 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도 학교에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긴 마찬가지다. 나는 그런 상황을 군대에서 경험했다. 무슨 교육을 마치는 마당엔 꼭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에 따라 다음 사람들에게 괴로움(?)이 전가될 것이 분명한 터에 불만을 표출한다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으니 애초부터 결과가 빤한 조사였다.

상명하복을 생명으로 삼는 폐쇄적인 조직에서나 하는 짓을 초등학교에서 대놓고 해서야 말이 되겠는가. 보충수업이든 ‘오름길 학습’이든 빠짐없이 해야 한다면 그냥 하면 될 일이지 학부모 의견을 묻기는 왜 묻는가 말이다.

그렇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만든 자료를 근거로 ‘100% 찬성’이라고 여론을 호도할 꿍꿍이라면 정말이지 절망적이다. 그러고는 낯이 뜨거워서 어떻게 아이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정의사회를 운운하며 교육이란 말을 입에 올린단 말인가. 아니, 그런 것이 현 정부의 교육관이라면 일선학교에서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 셈이 되겠지만…….

학교가 학원과 같아서야…
한 세대가 이룩한 가치를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학교가 필요한 것은 그러한 사회적 가치를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고, 교사를 선생이라 높이고 특별히 예우하는 그렇게 큰일을 담당하고 있는 까닭이다.

기초학습도 중요하지만, 점수를 위한 문제풀이에만 한껏 혈안이 돼 있다면 학교가 사설학원과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일선 교사는 교장 눈치를 봐야 하고, 교장은 교육청 눈치를 봐야 하고, 교육청은 정부 눈치를 봐야 하고, 정부는 청와대 눈치를 봐야 하는 먹이사슬 구조를 딱하다손 치고, 선생님의 그런 고충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아이에게 물었더니 이해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아, 이제 갓 열세 살 먹은 아이에게 전할 가치가 없어서 독단과 술수를 가르치고 있단 말인가. 실용을 부르짖는 MB시대의 교육이 이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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