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 간도성장 윤태동 생가에는 3억원 쏟아 붓고
항일투사 류자명 생가 복원약속은 5년째 나 몰라라

충주시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가정과 자신의 목숨을 뒤로 하고 항일운동에 뛰어든 독립운동가의 생가복원은 수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반면, 일제강점기 조선인으로서는 최고관직에 오르며 나라를 버린 친일파의 생가는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돼 20년 넘게 관리해 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비난이 일고 있다.

충주시 엄정면 미내리 133번지에 위치한 중원윤민걸가옥은 1984년 1월 10일 중요 민속자료 제135호로 지정돼 정부와 충주시의 관리를 받고 있다. 이 고가는 말 그대로 윤민걸이 살던 가옥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만주국 젠다오(간도)성 성장을 지낸 윤태동(1900~?)의 생가이기도 하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주영 박사는 “지금으로 치면 도지사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고위관직 중의 하나로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 지위”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대표적인 친일파인 이범익 간도성장의 비호아래 순탄한 관료생활을 영위하며 해방 후 이범익과 함께 소련홍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다”고 덧붙였다.

▲ <사진설명>간도성 성장을 지낸 대표적인 친일파인 윤태동의 생가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돼 수차례의 보수공사를 통해 완벽한 고가로 재탄생된 반면, 독립운동가 류자명 선생의 생가는 없어진지 오래다. 지금은 터마저도 논으로 변해 있어 씁쓸함이 더하다.
국방헌금·위문대 헌납 수행
윤태동은 지난해 11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거뜬히(?) 이름을 올렸다. 윤태동은 도쿄(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수로 근무하다 경성제국대학 예과 강사로 임명됐고, 수원고등농림학교와 보성전문학교, 중동학교에도 출강했다. 경성제국대학 예과 교수로 재직하던 1934년 간도성 이사관에 발탁돼 간도성 교육청 학무과장을 맡았다.

1940년에는 수도계림분회에 참여해 대표적인 간도성장 이범익을 비롯해 최남선·박석윤 등과 활동하며 일본에 국방헌금과 위문대 헌납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그는 또한 일본 기원 2600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일본국민과 협화정신'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만주국 협화회 일원으로 활동하던 윤태동에 대해 “각지에 분회를 조직해 만주국 지배체제 안으로 민중을 끌어들이면서 항일운동에 대한 내부교란과 파괴공작, 선전선무공작을 수행하는 한편 전시동원조직으로서 역할을 담당했다”고 기록했다.

윤태동의 만주에서 친일행적은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해 알려져 있지만, 그의 생가인 엄정면 미내리 고가는 친일파의 생가라는 사실을 덮어둔 채 국민이 낸 세금으로 공들여 보존되고 있다. 이 고가에 대한 설명 어디에도 윤태동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단지 1873년 가옥을 지은 윤태동의 조부 윤양계가 사헌부 감찰을 지낸 관료라는 것이 전부다.

충주시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이후 지금까지 초가지붕인 뒤채 이엉 얹기에 해매다 210만원의 예산을 책정하고 있고, 지난 2005년에는 대문채를 복원하고 화장실을 설치하는데 1억 4000만원을 들였다. 또한 2006년 배수로 정비공사에 3000만원, 2009년 소화전 설치에 3200만원을 들였고, 최근에는 안채를 일부 보수하고 사당 뒤 해체보수에 1억원을 쏟아 부었다. 친일파의 생가를 유지·보수하는데 3억원 이상의 비용이 소요된 것이다.

이에 대해 충주시 문화재 담당자는 “조선말 관료들 가운데 상당수가 친일을 했다”고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문화재청이 이 가옥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한 것은 살았던 사람이 어떤 일을 했느냐가 기준이 된 것이 아니라 건축양식이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느냐가 기준이 됐다”고 설명했다.

지역의 한 원로는 “아무리 잘 지은 집이면 무슨 의미가 있나. 어떻게 지은 집이냐가 아니라 어떤 정신이 담겨있고 누가 살던 집인지가  중요하다. 문화재 관련 공무원들의 무지의 소산”이라고 일갈했다.

박걸순 교수(충북대 사학과)는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다. 부끄러운 역사지만 그 또한 역사라며 조선총독부 건물을 존치하자는 주장과 민족정기를 살리기 위해 철거하자는 주장이 대립했다. 하지만 결국 철거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 류자명 선생의 생가터. 손자 유인탁 씨가 관리하고 있다.
충주시 생가복원 의지 있나
이와 달리 충주는 물론 충북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 평가받고 있는 류자명 선생(1894~1985)이 태어난 충주시 이류면 영평리 생가터는 논으로 변해 있었다.

2004년 충주MBC가 류자명 선생의 독립운동사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것을 계기로 선생의 활동이 재조명됐다. 2006년 1월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1월의 독립유공자로 선정했고, 충주시도 ‘류자명 평전’을 발간하는 등 충북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의 생가복원 움직임도 활발히 진행됐다. 중국 창사에 거주하고 있는 아들 류전휘 씨도 이 무렵 충주시를 방문해 아버지의 유품 250여점을 시에 기증했다. 이를 통해 ‘류자명 선생 유품 특별전’이 열리는 등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 했다.

하지만 이 같은 분위기는 쉬 시들어버렸다. 예산 등의 이유로 제자리걸음을 하던 생가복원은 시장이 바뀌면서 기억 속에서 조차 잊혀져갔다. 그러던 지난해 신순철 전 시의원이 충주시에 생가복원과 기념관 건립사업에 대한 서면질의를 했고, 꺼져가던 불씨를 살렸다.

하지만 충주시가 진정으로 선생의 생가복원과 기념관 설립에 대한 의지가 있는지는 의심스럽기만 하다. 5년째 생가복원 사업을 맡았던 충주시 문화체육과의 답변은 “지금까지는 문화재 관련부서에서 담당했지만 류자명 선생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은 만큼 보훈사업으로 가야한다. 지난해 시의회의 문제제기 후 사업추진을 위해 주민지원과로 담당부서가 옮겨졌다”는 것이었다.

선생의 독립운동 공훈을 기려 정부가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한 것도 1968년의 일이고, 국민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은 것도 이미 오래전인 지난 1990년의 일이다. 업무를 인계받은 주민지원과 관계자는 “국가보훈처와 협의를 통해 예산을 마련할 계획”이라면서도 “예산 확보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세우지 못했다”고 말했다.

박걸순 교수는 “지난달에도 중국 창사에 살고 있는 아들 류전휘 씨를 만났다. 유 씨가 충주시에 유품을 기증할 당시 이와 관련해 충주시장이 영평리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 건립을 약속한 것으로 안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시장 개인의 약속이 아니라 충주시의 약속이고, 대한민국의 약속이다. 마땅히 이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충주문화대전,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로 둔갑
충주시가 지역의 역사와 문화유산 등 정보를 담아 편찬한 디지털충주문화대전이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정확한 고증없이 내용을 수록해 문제가 일고 있다. 친일파 윤태동에 대한 인물정보에는 대표경력으로 현존하지도 않았던 간도임시정부의 초대 수석으로 기재돼 있다.

포털사이트에서 관련 인물명을 검색했을때 가장 상위에 링크되는 것이 디지털충주문화대전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크다. 윤태동에 대해 집필한 작가는 "인물은 시에서 정해서 내려왔다. 친일행적에 대해 적극적으로 피력하지 못했다. 지역 인물에 대해 지역내에서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말했다. 글쓴이로 인해 역사가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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