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에 빠르고 경쾌한 리듬으로 음악애호가들을 즐겁게 했던 팝송  '인디언 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을 기억하면 지금도 실소가 난다.  팝송을 즐기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지만 노래의 가사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듣는 이는 별로 없다. 다만 음악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다.  당시 이 노래는 일반인들에겐 제목에서 우러나오는 이미지(?) 때문에 좋은 의미로 각인됐다.  한국말로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이름붙여졌기 때문에 마치 인디언을 특별히 배려하는 무슨 특구처럼 인식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디언 레저베이션은 인디언의 보호구역이 아니라 인디언의 '유폐지'였다.  인디언은 그곳에서 처참한 삶을 영위하다가 병들어 굶어죽거나 백인들에 의해 도륙당했다.

 아메리카의 건국과정은 백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프런티어, 개척정신의 발현이겠지만 인디언들에겐 침략과 협잡과 겁탈의 역사였다. 기름진 옥토와 돈이 되는 광산을 탐냈던 백인들은 총을 앞세워 인디언 영토를 야금야금 침범했고, 그들의 터전을 강탈했다. 미국의 서부영화중엔 '야만인' 인디언을 주살하는 것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인디언 역사는 백인, 미국인의 배신과 권모술수, 기망으로 점철됐다. 기껏 화친을 맺고서도 이를 번번이 배신하고 인디언을 학살하며 영토를 빼앗은 것은 백인들이었다.

 백인들은 자신의 이런 악행을 오히려 역사적 혹은 고상한 차원으로 승화시키기에 혈안이 됐는데, 그 때 동원된 말이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다.  명백한 운명이란 유럽인들과 그 후손들이 운명에 의해 신대륙을 다스리도록 정해져 있으며, 백인들은 곧 지배민족으로 당연히 인디언에 대해 그들의 땅과 재산을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명백한 운명은 인디언 역사를 송두리째 짓밟은 원흉이며 백인 착취의 상징이었다. 그렇게 해서 광활한 평원과 산림을 빼앗긴 인디언들은 풀이 자라지 않는 황무지나 늪지대로 쫒겨 가게 됐고, 바로  이곳이 문제의 '인디언 보호구역'인 것이다.  

 이라크 파병이 초읽기에 들어 간 가운데 노무현정부의 최종 결정이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파병은 곧 '죽임'이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미국의 기만술에 국가의 정조마저 그대로 상납하는 꼴이다. 그래도 주전파들은 파병을 못해서 환장하고 있다. 황당하게도 이들 주전론자의 다수가 본인은 물론 자식까지 군면제의 병역을 갖고 있다.

 이라크 전쟁은 명백한 침략전쟁이다. 과거 백인들이 인디언들을 때려 잡을 때 '인디언들은 사람을 죽이고 머리가죽을 벗기는 야만인들'로 매도했듯이, 미국은 이라크를 '화확무기와 대량 살상무기를 보유한 천하의 망난이'로 몰아 전쟁을 일으켰지만 이를 입증할만한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지금 이라크인들은 과거 인디언들이 그랬듯이 미국에 의해 '보호구역'으로 쫒겨 나고 있다. 이런 일에 한국군이 일조한다면 이는 무조건 침략이다.  그래서 파병은 안 된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