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와 함께하는 역사기행 (22) -삼년산성

“얘들아, 고려 태조 왕건 알지? 그 사람이 충신 복지겸 장군과 함께 후백제가 차지한 상당산성을 빼앗았어. 그런 다음 10만의 군사를 데리고 삼년산성을 내친김에 뺏으러 갔단다.  그런데 가다보니 밥도 먹고 물도 마셔야했지. 그 때 청주에는 한란이라는 호족이 살았어. 한란이 만든  ‘방정’이라는 우물로 군사들에게 밥도 해주었지. 지금도 이 우물이 용암동에 있어. 밥과 물을 먹은 군사는 기운을 차리고 삼년산성을 치러 갔단다. ”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며  왕건이 뺏으려고 갔던  보은의 삼년산성으로 발길을 옮겨보자. 보은에 들어서면 산중턱에 희끗희끗한 성의 모습이 보인다. 멀리서도 성의 모습이  눈에 띄지만 가까이가면 까마득하니 중국의 만리장성만큼이나 높아 보이는 성이다. 이 성은 보은의 또 다른 문화유산인 속리산의 법주사보다도 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나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가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고구려 백제와 충돌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인 자비왕13년(470)에 쌓았다고 한다.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려 삼년산성이라 했지만 오정산에 있다해서 오정산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마을의 뒷산처럼 높지 않고 골짜기인 이곳에 왜 성을 쌓았을까. 삼국시대 신라의 충북지역 진출은 두 축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계립령과 죽령을 넘어 남한강의 요충지인 충주로 가는 북쪽길이다. 또 하나는 추풍령을 넘어 보은에 이르는 길이다. 신라의 세력은 추풍령을 넘으며 커지는 반면 백제는 점차  기울어간다. 실제로 삼년산성 서문에 서면 서쪽으로 옛 백제땅과 정면으로 대치한다. 지도상으로도  공주 쪽과 일직선상에 있다. 그리고 성문 형태도 특이하다.

보통 성문은 밖에서 안으로 열게 되어 있지만 이문은  반대로 성안에서 밖으로 열게 된 것으로 보아 성안의 군사가 갑자기 출동할 때 편리하도록 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삼년산성은 신라가 백제를 겨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삼년산성을 거점으로 자꾸만 세력이 커지는 신라를 옆구리에 두고 있던 백제는 얼마나 불안했을까.

삼년산성은 많은 역사적 사건을 간직하고 있다. 백제의  성왕이 대가야군과 연합해 관산성으로 쳐들어오자 신라군이 처음에는 고전하다  삼년산에서 출병한 신라군에게 의해  성왕과 군사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백제는 점차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통일 신라 때에도 여러 가지 치욕적인 역사가 남아있다.  태종무열왕때 신라는 당나라 군사와 연합해 황산벌에서 백제의 계백이 거느린 군사들을 멸망시켰다.  이때 백제 유민의 저항이 계속되자 당나라는 웅진도독을 파견하는데 태종무열왕이 당나라의 왕문도를 맞이했던 곳이다. 남의 힘을 빌었던 대가를 치르던 치욕적인 장소인 셈이다. 또한 지금 우리에게는 교과서에 많이 나오는 웅진도독이라는 말을 실감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서까지 통일을 해야했을까. 우리 세대는 신라를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나라라고 배웠다. 하지만 신라의 삼국통일 덕분에 우리는 저 북쪽 만주 넓은 땅을 잃어버렸다. 요즘 세대에게는 다른 역사관을 심어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또한 헌덕왕때 웅천주(공주) 도독인 김헌창이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왕의 진압군에 의해 삼년산성에서 진압되었다. 이렇게 많은 역사의 발자취를 담은 삼년산성은 어떻게 축조되었는지 성곽을 돌아보자.

삼년산성의 동쪽과 서쪽벽은 내탁외축 방식이고 남쪽과 북쪽은  내외협축 방식이다. 이 성은 능선을 따라 병풍처럼 이어지고 안은 골짜기를 이룬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구들장처럼 납작한 자연석인 점판암을 우물정(井)자로  엇물려 촘촘하게 쌓았다.  이 축조 방식으로 볼 때, 전에 소개던 단양의 온달산성도 같은 때, 같은 방법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삼년산성에는 네 개의 문이 있지만 지형상 서문과 동문을 많은  사람이 이용한 듯 하다. 북쪽에서 동쪽으로 성을 오르다 보면 군데군데 무너져 내린 성벽의 흔적을 보게된다. 북쪽 길은 위험해서 성벽 밑 절 쪽으로 가는 게 안전하다.  동문부근에 오르면 보은읍 종곡리가 내려다보인다. 논과 밭, 옹기종기 붙어있는 집의 모습이 가을걷이를 끝낸 농부의 여유로움처럼 한가롭게 보인다. 종곡리는 동학운동의  시발점이며 끝이었다. 시간이 되면  동학농민운동의 현장을 한번 찾아 가보기로 하자. 또한 여기에 서면 청주와  상주 가는 길이 훤하게 보이니 아이들과 함께 지리 감각을 익힐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동문에서 남문으로 걷다보면 아직도 튼튼하게  남아있는 거무스름한 성벽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벽을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날 만큼 상당히 아슬아슬하다. 많은 세월이 흘렀으면서도 허물어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신라인들의 장인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성을 한바퀴 돌아 서문으로 내려오면 성벽이 점판암계가 아닌 화강암으로 복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옛것과 현대의 것이 불균형도 문제지만, 제대로 지켜나가야 할  문화유산에 흠집을 낸 건 아닌지 아쉬움을 준다. 아이들에게 문화유산을 복원할 때의 문제점을 한번 생각하게 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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