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형 청주 송절중 교사

금년은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한해였다. 그중 유난히 기억되는 슬픈 일은 우리사회의 존경받는 어른들인 김수환 추기경과 김대중 전대통령,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이은 죽음이었다.

그 분들이 죽을 때까지 놓지 않았던 가치, 평생을 바쳐 만들고자 했던 세상은 개개인의 인권이 존중되는 자유로운 사회, 권력과 자본에 의해 억압받지 않는 평등한 사회, 그리하여 다양성이 공존하고 어우러지는 사회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이러한 가치들이 퇴조되거나 부정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겨울공화국으로 돌아간 것은 아닌가 하는 짙은 회의심을 갖게 한다. 파시즘의 망령이 우리사회에 퍼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에서 망령처럼 되살아나고 있는 파시즘은 유럽에서 파시즘이 배태되던 배경과도 유사하다. 세계적인 극심한 경기침체,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의 이익추구를 위한 압력,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국내정치의 부패와 무능, 이들로 인해 사회에 퍼진 불안과 절망감 등이 비합리적인 정치적 반동을 잉태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은 국가에 있으며, 국가에 반항하는 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파시스트의 구호처럼, 파시즘은 국가가 전체주의,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개인생활 전반을 통제하려 하는 현상이다. 대중사회이론의 입장에서는 현대사회의 모든 강권적·독재적·비민주적 성격을 띠는 정치행태를 파시즘이라고 정의한다. 파시즘은 불평등과 폭력을 기본원리로 하여, 정부에 대한 비판과 반대를 금지하고 억압한다. 우리사회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 우려스러운 여러 징후들과 본질적으로 닮아있다.

그 첫 번째는 우리의 사유 밑바닥에 숨어있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전체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고, 국익을 개인의 권리보다 우선시 한다.

용산 미군기지의 이전부지로 선정된 평택 대추리 철거주민들의 반발과 시위는 한미관계와 국익을 해치는 반국가적인 행동으로 간주된다. 수도권 개발계획에 걸림돌이 되는 용산 철거민들의 저항은 소수의 몰지각한 이기주의로 매도된다. 경기침체를 극복하기위해 다같이 노력해야 할 이때에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의 극한투쟁은 있어서는 안될 좌경세력의 사회혼란 책동으로 호도된다.

두 번째는 어떠한 반대도 용인하지 않는 일방주의적 독선이다. 국민 대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되는 4대강 사업과 미디어법 날치기처리 등이 일방주의의 전형이다.

특히 파시즘에서 언론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도구이며, 선전과 선동의 도구로 중요시 된다. 그래서 미디어법은 언론을 자본과 정권의 지배하에 두려는 파시즘의 색깔이 농후하다.

또한 언론의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도 허용되지 않는다. 국가시책을 비판한 광우병 보도진에 대한 이례적인 사법처리, 정부에 비판적인 시사프로그램의 대대적인 개편조치, 심지어는 100분토론 진행자 손석희씨나 예능MC 김제동의 중도하차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세 번째는 국가의 공권력 행사를 가장한 폭력이 일상화 된 것이다. 평화적 촛불시위에 대한 경찰의 과잉진압, 용산참사를 불러온 철거민에 대한 폭력적 진압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사태들은 공권력의 행사라는 미명하에 정당화되고 합법화된다. 파시즘을 극복해간 유럽 지식인들의 저항의 역사를 돌이켜 본다. 지식인은 잠수함 속에서 산소가 사라지는 것을 가장 먼저 느끼고 경고하는 토끼처럼, 세상의 흐름과 변화를 민감하게 읽어내고 치열하게 경고해야 하는 존재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큰 안목으로 거시적인 흐름, 시대의 보편성을 읽어내야 한다. 역설적으로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워 온다고 하지 않던가? 먼저 새벽을 준비하고 새벽이 오고 있음을 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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