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삼일절’은 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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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의 삼일절’은 언제인가
  • 충북인뉴스
  • 승인 2009.10.1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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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대장 한봉수, 만세운동도 ‘신출귀몰’ 앞장섰나?
시민행동 표지석 제막 계기, 봉기시점 조명 본격화

1971년 발간 독립운동사- 의병장 한봉수, 7일 봉기
한봉수 면담 신경득 교수- 이튿날(2일) 첫 만세운동
충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 23일 봉화시위에서 발화


청주지역의 역사·문화단체 관계자들로 구성된 ‘3.1운동 90주년 시민행동’이 3.1운동 90주년을 맞는 2009년 3월1일 청주시 남주동 옛 우시장터(구 남주동사무소 자리)에 ‘3.1운동 표지석’을 제막하면서 지역 내 3.1운동사에 대한 조명작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 3월1일 ‘3.1운동 90주년 시민행동’ 청주시 남주동에 ‘3.1운동 표지석’을 제막하면서 청주지역 3.1운동 봉기 시점에 대한 논란이 불붙고 있다. 특히 청주 출신 의병장 한봉수 선생(사진 동상)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구술기록과 2차 사료가 논란의 핵심이다.
특히 청주지역의 3.1운동 봉기 시점과 관련해서는 1차와 2차 사료, 38년 전의 구술자료 등을 근거로, 각각 3월2일과 7일, 23일이 봉기일이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어 향후 정확한 고증이 필요한 상황이다.

시민행동이 이날 표지석을 세운 근거는 1971년 12월 독립유공자사업기금 운용위원회가 발행하고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쓴 ‘독립운동사 3권’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이 책의 청주군(淸州郡)편은 “3월7일 읍내 소장터(牛市場)에서 많은 장꾼들이 만세를 불렀다. 이날 의병장이었던 한봉수가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왔는데, 서문장터 우시장 입구 마차 위에서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고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한봉수(1883~1972)는 알려진 대로 이른바 ‘번개장군’으로 불렸던 청주 출신의 의병장이다.

횃불봉화시위 전국적 특이사례

실제로 이 책은 청주지역의 3.1운동 상황과 관련해 “3월2일 벌써 일제 경찰에게 독립선언서 286매가 발각되어 관계자가 검거돼 취조를 받았다”는 내용을 필두로 “청주농업학교 2학년 학생 31명이 3월10일 밤 시험 연기청원서를 학교에 제출했고, 또 1학년생 15명도 이날 밤 비밀리에 기숙사를 나왔는데 ‘서울에서 연락꾼이 내려온 기미가 있다’고 일제 측의 보고는 기록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한 연락꾼은 서울 중앙학교 재학생으로 3월1일 독립선언서를 입수한 뒤 청주로 내려와 이를 청주농업학교 학생들에게 전한 청주 출신의 신영호(1902~1947) 선생을 일컫는 것이다. 신 선생은 거사를 준비하다 체포돼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이 책은 또 청원군 강내면 태성리에서 조동식(1873~1949) 선생이 3월23일 횃불봉화시위를 벌인 것을 필두로 “청주군 내 청주면, 오창, 강외, 부용면에서 대 횃불운동이 벌어지고, 또한 북일, 북이, 옥산면 등에서도 일어남으로써 도합 8개면, 즉 청주군의 서북쪽 태반이 모두 불바다와 만세소리로 진동했다”고 기록하는 등 청주군(현재 청원군) 지역의 횃불봉화시위에 상당 지면을 할애하며 비중을 두고 있다.

박 교수 “독립운동사 공신력은 인정”
충북대학교 사학과 박걸순 교수는 이에 대해 “청주농업학교를 중심으로 한 3.1운동은 비록 모의단계에 그쳤지만 3~10월의 실형을 받은 공판기록이 있고, 조선족 최고위층으로 중국정협 부주석을 지낸 조남기 장군의 조부인 조동식 선생은 횃불봉화시위와 관련해 일제로부터 2년형을 선고받는 등 1차 사료가 분명하다”면서 “이에 반해 3월7일 한봉수 의병장의 만세운동이나 천도교인 민원식이 주축이 된 22일 시위는 2차 사료인 독립운동사(1971년 발간)에 처음으로 언급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그러나 “독립운동사가 나름대로 공신력이 있는 저술인데다, 1972년까지 생존했던 한봉수 선생의 구술 등을 거쳤을 것이기에 개연성은 충분히 인정된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공판기록에 근거해 충북지역의 3.1운동이 3월19일 괴산 장터에서 촉발돼 4월19일 제천 송학면 시위에 이르기까지 모두 44차례에 걸쳐 이뤄졌으며 1차 사료에 입각한 청주지역의 본격적인 시위는 3월23일 이후 번진 횃불봉화운동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신 교수 “한봉수 진술, 정황 구체적”
어찌 됐든 의병장 한봉수 선생이 도내 3.1운동의 첫 기치를 들었다는 점을 역사적 사료로 받아들이더라도 시점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란이 제기된다. 증평 출신인 신경득 경상대 국문과 교수가 한봉수 선생을 직접 면담한 것을 근거로 첫 시위 시점을 3월2일 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 교수는 “1970년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낙선하고 실의에 잠겨 있었는데 친구들이 한봉수 의병대장에 대한 소설을 써보라고 권유해 1971년 정초에 한봉수 의병장을 찾아갔다”며 “당시 한봉수 선생으로부터 동향 출신이자 민족대표 33인의 좌장격인 의암 손병희 선생의 지시를 받고 ‘3월2일 오전 8시 우시장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는 말을 직접 들었다”고 밝혔다.

한봉수 선생이 당시 신 교수에게 전한 발언의 요지는 고종황제의 인산(장례)을 앞두고 3월1일 새벽 서울의 의암 손병희 선생을 찾아갔다가 태극기와 문서를 받아 밤을 새워 청주로 내려왔고, 2일 오전 8시 남주동 싸전거리에서 장꾼들을 선동해 만세운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신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통신 및 이동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상황을 고려할 때 서울과 거의 동시에 청주지역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진 셈이다.

사료 확인되면 그야말로 ‘번개대장’
신 교수는 당시 상황에 대해 “(한봉수 선생이) 의병활동에 대해서 질문할 때는 ‘88세의 고령이라 기억이 희미하다’며 따님에게 대신 설명하게 했지만 3.1운동에 관한 대목이 나오자 순간 눈에서 불길이 일어나며 직접 진술을 했다. 당시 구술한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신 교수의 기록에 따르면 한봉수 선생이 군중을 선동한 내용, 기마경찰대와 몸싸움을 벌인 정황 등이 구체적으로 언급돼 있다.

신경득 교수의 주장에 대해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는 “역사는 기록에 의존하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은 사실이 묻힐 수는 있다. 한봉수 선생이 만세운동과 관련해 1년6개월을 복역한 사실이 있지만 당시의 공판기록은 선생이 고향인 청주군 사외일면(현재의 북일면) 세교리에서 4월2일 벌인 시위와 관련한 것뿐이다. 선생이 의병활동으로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청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다시 고향에서 이를 이어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으로 본다. 어찌 됐든 새로운 주장이 제기된 만큼 충분히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3·1운동 민족혼 서린 청주 3·1공원
1980년 우암산 자락에 충북출신 민족대표 동상 모셔
당초 6인 중 친일행적 정춘수 상 1996년 ‘강제 철거’


청주 시내에서 우암산 순환도로로 접어들면 먼저 '대한불교수도원'과거기에 인접한 ‘3·1공원’을 만나게 된다. 이 공원 바로 옆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어서 승용차와 버스로 가기에 용이하다.

이 공원은 1980년 8월 15일에 충청북도에서 설립한 것이다. 우암산 등산을 즐기는 시민이 여기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교육기관의 백일장, 그림그리기 대회 등의 행사도 자주하고, 정의를 주장하는 공명선거 결의대회와 같은 행사도 하는 이곳은 충절의 정신을 고양하는 장소로도 많이 이용되고 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계단을 올라서면 태극 구도로 된 앞쪽에 높은 좌대 위의 다섯 분 동상과 동상이 없는 하나의 좌대와 마주하게 된다. 이곳이 3·1운동 때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충청북도 출신의 동상을 모신 곳이다.

태극 모양의 바닥 중앙에는 독립선언서 비석이 있고, 그 앞에 헌화대가 있다. 여기서 묵념을 하고, 한글로 쓴 독립선언문을 꼼꼼히 읽고, 소나무와 대나무로 둘러싸인 동상을 본다.

가운데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 좌측으로 우당(憂堂) 권동진(權東鎭)과 동오(東吾) 신홍식(申洪植), 우측으로 청암(淸庵) 권병덕(權秉悳)과 은재(殷哉) 신석구(申錫九) 다섯 분이 있고, 좌측 끝 청오(靑吾) 정춘수(鄭春洙)는 동상 좌대만 서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대표였다. 1861년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서 출생하여 1882년(22세) 동학에 입교하였고, 1894년 동학혁명 때는 북접군 통령으로 싸웠다. 1897년 동학의 제3세교주가 되었으며, 진보회를 조직하여 자주독립 추진 세력을 양성하는 과정에서 동학을 천도교로 이름을 개명했다. 지금의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교와 동덕여대 전신인 동덕학교를 인수하여 인재 양성을 하면서 자주독립과 국운의 발전을 도모했다.

1919년 손병희 선생은 3·1운동을 주도했다. 천도교 대표 15명, 기독교 대표 16명, 불교 대표 2명, 합 33명이 합세하여 3?1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 사건 때문에 3년간 복역 중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1922년 5월19일 62세로 서거했다.

우당 권동진 선생은 1861년 11월 12일 괴산군 소수면 아성리 안심 부락에서 출생하여 8세 때 서울 인현동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한말에 함안군수 육군 참령을 역임하고 개화당에 들어가 혁신운동을 전개하여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의암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귀국 후 천도교를 지도하여 도사가 되었다.

3·1운동 때 천도교측 대표로 독립선언에 참가하고, 3년의 복역을 마치고 항일단체인 신간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약했다. 1929년 광주학생 운동에 연루되어 1년을 복역하고, 계속 독립운동과 민중의 개화에 힘쓰다 광복 후 신한민족당 당수로 건국사업에 공헌했다. 1947년 3월9일 87세로 서거하여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청암 권병덕 선생은 1868년 4월25일 청원군 미원면 종암리에서 출생하였다. 1885년 동학에 입도하고 청주 접주를 거쳐 25세에 충경포차 접주가 되었으며 1894년 동학혁명 때는 의암 선생과 함께 6만 군중을 이끌고 호응했으나 실패한 후 각처를 유랑하면서 동학 재건에 힘썼다.

1908년 천도교의 대정이 된 다음 요직을 두루 거친 후 의암이 마련한 인쇄소 보문관 관장이 되었다. 1912년 중앙학교 교장, 1918년 천도교 도사 등을 역임하다 3·1운동을주도한 민족대표로 참여하였으며, 2년을 복역한 다음 역사연구서 '조선총사' '이조전란사' '궁중비사' 등을 저술했다. 1944년 7월13일 77세로 서거, 국립묘지에 안장,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했다.

동오 신홍식 선생은 1872년 3월1일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에서 출생하였다. 1913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공주와 여러 도시에서 감리교 목사로 선교를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3·1운동 때는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로 기독교의 대표로 독립선언에 참여했고, 평안도 지방 만세 시위를 조직적으로 전개했으며, 2년의 복역 후 인천, 원주 등지에서 종교운동을 통한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1937년 1월27일 65세로 서거, 유해는 그의 고향 인차리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되었다.

은재 신석구 선생은 1875년 6월3일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에서 출생했다.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 서울, 개성, 춘천, 원산, 남포 등지에서 종교운동을 통한 독립사상과 민족사상을 고취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기독교 측의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선언에 참여했다. 2년의 복역 후 항일투쟁을 계속하여 신사참배 거부, 평남 용강에서 전승신 예배 거부 등으로 수차 투옥되었다. 광복 후 북한에서 반공운동을 전개하여 3?1절 기념 방송사건, 기독교 민주당 비밀결사 사건 등으로 투옥되었고, 1949년 4월 남포에서 반동 비밀결사를 영도하였다는 이유로 10년형 복역중 6. 25 발발 직후인 50년 10월10일 평양에서 총살되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되고 1968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청오 정춘수는 1875년 2월11일 청원군 가덕면 두산리에서 출생하였다. 경성협신학교 졸업후 목사로 전국 각지에서 종교운동을 통한 민족정신을 고취한 사실이 있고, 3·1운동 때 원산 남촌동 남감리교회 목사로 재직하여 동북지방의 독립운동을 영도하여 1년 6개월 복역하였으며, 1934년 비밀결사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105일간 옥고를 치른 바 있다.

1951년 10월27일 77세로 별세해 사회장으로 향리 강내면 궁현리에 안장하였다. 현재 그의 동상은 없고 좌대만 덩그마니 있다.

1996년 2월8일 충북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가 정춘수는 33인의 명단에 있어도 3?1운동 때 참여하지도 않았고, 그 후 여러 차례 친일한 사실이 드러났는데 그 가운데 일본에 전투기 구입을 위한 헌금, 교회 재산 헌납, 일본 징용 협조 등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 동상을 강제로 철거하였다. 독립운동의 공적에 비하여 친일 죄가 큰 것을 후세는 용납하지 않고 징계한 모습에서 숙연하지 않을 수 없다.


“군함도 대포도 없어 폭탄을 구했노라”
日 관리 처단, 관공서 파괴 꾀한 의열단원 곽재기


▲ 의열단원 곽재기 선생. 선생은 2002년 1월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이 달의 독립운동가다.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곽재기 선생은 1893년 청주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서울에 올라가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청남학교 교사로 일했다. 1909년 비밀단체인 대동청년당의 당원이 되어 80여명의 당원과 더불어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지하공작을 전개했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시위운동에 적극 참가했으며, 같은 해 7월 황상규, 윤소룡, 김기득 등과 함께 만주 길림성 동녕현 소수분으로 건너가 이성우 등 여러 동지와 알게 되면서 11월 9일 김원봉, 이성우,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등과 비밀결사인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했다. 의열단은 일제의 관리·밀정·관공서 등을 주살·파괴함으로써 항일정신을 고취하고 무력으로써 독립을 쟁취하려는 단체였다.

의열단을 조직한 뒤 제1차 거사계획은 폭탄으로 일제의 고관을 처단하고,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경성일보사 등을 파괴해 전국의 민심을 들끓게 만드는 것이었다. 황상규는 먼저 길림에서 폭탄 제조방법을 배우고 곽재기 선생은 김기득과 함께 상해로 가서 폭탄구입에 힘썼으나 자금관계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길림으로 돌아왔다.

이후 자금조달에 노력하다가 이성우와 함께 다시 상해로 가서 1920년 3월 폭탄 3개와 이에 필요한 약품을 구입한 다음 동지 조현상과 운반방법을 의논하고 임시정부 외무차장 장건상에게 의뢰했다.

장건상은 이것을 우편으로 안동 세관에 있는 영국인 ‘포인’에게 보내줬다. 곽 선생은 즉시 안동으로 와서 소포를 찾은 뒤 동지인 이낙준의 손을 거쳐 밀양청년단장 김병환에게 보냈다.

그리고 서울에 잠입해 상해임시정부가 보내온 폭탄 13개를 만드는데 필요한 탄피, 약품, 부속품 등과 미국제 권총 2정 및 탄환 100발을 짐짝에 담았다. 이 짐 역시 밀양에 있는 김병환이 받아 집에 숨겼다.

곽 선생은 1920년 6월 서울에서 동지들과 날마다 묵는 장소를 바꾸면서 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경성일보사 등을 폭파하고자 준비하던 중 이 사실을 탐지한 경기도경찰부에 동지 6명과 함께 피체됐다. 이후 경상남도 경찰부로 이송돼 극심한 취조를 받고 1920년 7월 31일 서울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됐다.
1921년 6월21일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의 손에서 예심이 종결되고 동년 6월7일 공판이 개정됐다.

당시 재판장이 입에 웃음을 띠며 피의사실에 대해 묻자, 곽 선생 역시 웃으며 “재작년 7월 중국 길림성으로 갔는데 당시의 목적은 첫째 국내에 되도록 많은 폭탄을 수입하는 것, 둘째 해외의 조국독립운동 현황을 시찰하고자 간 것이다. 재작년 3월 이래로 조국독립운동을 입과 붓으로는 구할 대로 구하고 원할 대로 원하였으나 피로써 구한 일은 없으므로 그와 같은 무기를 사용해 피로써 구하고자 원했는데 우리는 군함도 없고 대포도 없으며 폭발탄, 육혈포밖에 구할 수 없었다”고 대답해 독립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줬다. 이날 검사는 징역 10년을 구형했고 징역 8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0년 다시 국외로 망명하여 만주·상해·노령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11월 귀국했다.
귀국 후 한국 ‘에스페란토 어학회’를 운영하는 등 교육관련 사업에 종사하다가 1952년 1월10일 별세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언제까지라도 손병희를 따르겠노라”
천도교 계열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권병덕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권병덕 선생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선생은 1867년 청원군 미원면 종암리에서 태어났다. 18세에 동학교도가 되고, 1894년 동학혁명 때 3대 교주인 손병희와 함께 교도 6만명을 이끌고 호응했으나 관군에 의해 진압 당한 뒤 전국 각처를 방랑했다.

1908년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가 천도교를 일으키자 이에 입교해 전제관장, 이문관장대리, 금융관장, 보문관장 등을 역임했다. 1919년 2월 25일경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해 상경한 선생은 손병희, 권동진·오세창 등과 만나서 3.1독립만세운동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해 민족대표로서 서명하기로 동의했다.

같은 달 27일 최 린,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김완규, 나용환, 홍병기, 박준승, 양한묵 등 동지들과 함께 김상규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했으며,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을 함께 쓰고 날인했다.

3월1일 오후 2시쯤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지방에 거주하는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모였다. 선생은 이때 현장에서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만세삼창을 외치고, 일본경찰에 의해 경시청총감부에 구금됐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천도교 종리원의 서무과 주임을 거쳐, 중앙교회 심계원장, 감사원장, 선도사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조선총사’ ‘이조전란사’ ‘궁중비사’가 있다. 선생은 1944년 9월15일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권병덕 선생은 천도교에서 승례(承禮)라는 직책을 맡았는데 이는 집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판결문에서 ‘손병희 선생을 따르겠다’고 할 만큼 손병희를 추종했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대동단 활동, 독립운동 자금줄이 되다
국내 최장수 기업 동화약품 설립한 기업인 민강


▲ 민강 선생(사진-동화약품 홈페이지)
1883년 청주에서 태어난 민강 선생은 1897년 설립된 국내 최장수 기업 동화약품의 초대 사장이다. 민강 선생은 1909년경, 기울어가는 국운을 일으키기 위해 안희제, 김홍량, 신백우, 남형우 등 각계 인사 80여명과 함께 비밀결사 대동청년당을 조직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남대문 밖에 소의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사업의 일선에 나섰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에는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홍면희, 안상덕, 이규갑 등과 함께 한성임시정부 성립과 국민대회 개최를 추진했다. 선생은 주로 연락과 준비 임무를 맡아 홍면희, 이규갑 등과 국민대회 취지서 및 임시정부의 약법(約法) 등을 작성했다.

당시 선생이 경영하는 동화약방은 연락거점이자 자금조달활동 근거지였다.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은 국내 최초의 제조업체이자 제약회사이며 최초의 등록상표(부채표), 최초의 등록상품(활명수)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이다.

같은 상호와 같은 제품을 내걸고 같은 자리(서울 중구 순화동 5번지)에 있는 유일무이한 기업이기도 하다. 민강 선생의 아버지 민병호는 1897년 당시 궁중에서 사용되던 생약 비방에 양약의 장점을 취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신약 활명수를 개발했다.

회사 안에 연통부를 만들어 연락과 자금조달을 수행하던 민강 선생은 이 일과 관련해 일경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19년 8월에 보석으로 출옥했다.

출옥 직후 선생은 전협, 최익환이 주도한 대동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선생은 또 동화약방을 대동단 및 연통본부의 연락거점으로 제공하면서 대동단이 일제의 천장절인 1919년 10월31일을 기해 거행하려 한 독립만세시위에 서울지역 7개 학생단체에 대한 동원책임을 맡고 이를 추진했다.

그런데 만세시위가 예정보다 연기되는 과정에서 일경에 발각됨에 따라 1919년 11월1일에 체포됐다.
대동단은 의친왕 이강을 상하이로 탈출시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시키려다 실패해 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로 인해 선생은 1921년 3월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6월형을 확정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선생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1924년 1월 교민단의사회의 학무위원 등을 역임했는데 1924년 3월 일경에 다시 체포돼 옥고를 치르던 중 1931년 11월4일 건강이 악화돼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한편 1913년 90여 종의 제품을 내놓은데 이어 전국에 186개소의 특약판매소를 설치하고 멀리 만주에까지 지점을 여는 등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가던 동화약방은 민강 사장의 열혈 독립운동으로 사세가 점점 기울어간다.

그러다 1937년 보당 윤창식 선생(5대 사장)이 인수해 동화약품으로 이름을 바꾸고 오늘에 이른다. 윤창식 선생은 항일비밀결사조직 ‘조선산직장려계’를 조직해 민족혼을 고취하고 국산품 애용 운동을 펴다가 1917년 일본 경찰에 발각돼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신간회 간부로 활동했다.

윤창식 선생의 차남인 윤광열 전 회장도 1944년 일제에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됐지만 1945년 일본이 연합군에 패망하자 상하이 정부군을 찾아 주호지대 광복군에 참여해 5중대 중대장으로 활동했다.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만세를 부르다
민족대표 33인의 대표, 독립선언 주도한 손병희


▲ 3.1절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손병희 선생 유허지에 있는 선생의 동상에 헌화하고 있다. / 충청리뷰 DB
1861년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서 태어난 의암 손병희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의 대표 역할을 했으며 ‘대한민국장’이라는 훈격이 말해주듯 3.1운동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82년에 동학에 입교해 1884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으로서 북접의 동학혁명군과 논산에서 합세해 호남과 호서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해 관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 강계 등지에서 은신생활을 했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1년 일본을 경유해서 상해로 망명해 이상헌으로 개명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 박영효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전해 듣고,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최시형의 뒤를 이어 3세 교주로 취임해 교세확장 운동을 벌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돼 평소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 최린, 천도교 도사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사항에 대해 협의했다.

1919년 1월 하순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해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는 단초를 마련했다.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윌슨 대통령에게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내기로 하고, 제반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 대한 동지규합이 진행됐다. 2월26일 최린이 최남선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선생은 권동진·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했다.

그리고 2월25~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에 참배키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해 승낙을 받았다. 28일 밤에는 재동 자택으로 동지들을 불러 회합하는 자리에서 독립선언 장소를 파고다 공원에서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으로 변경했다.

또 당일에는 조선총독부에 조선독립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해 알리고, 회합장소를 떠나지 않고 조용히 포박 당하기로 약속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해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위에 놓고 회람케 한 뒤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경시청총감부에 구금됐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돼 서울 상춘원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을사늑약에 음독, 흘겨보는 눈이 돼 ‘예관’
군인출신, 임정 산파역 신규식


▲ 신규식 선생(오른쪽)이 청원출신 고령 신씨 독립운동가인 신채호(왼쪽), 신석우(가운데)와 함께 1919년 망명지인 상하이에서 한자리에 모였다.
예관 신규식 선생의 고향은 청원군 가덕면이다. 1879년 1월13일 비교적 여유 있는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다가 상경해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2년 육군 참위로 임관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자살을 시도했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이로 인해 오른쪽 눈이 멀어 흘겨보는 상이 됐으므로 호를 ‘흘겨본다’는 뜻의 예관이라 지었다.

1910년 경술국치(한일병합)를 맞게 되자 분연히 총을 들고 서소문으로 나가 구식군대의 봉기에 가담했다. 선생의 옆에는 훗날 독립군 장군이 되는 노백린이 있었다. 의병투쟁은 실패로 끝나고 선생의 슬픔은 깊어만 갔다. 남편이 또다시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아내 조정완은 친정에 가서 아버지와 담판하여 자금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양 조씨 종손이자 경기도 부호였다.

결국 선생은 이듬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선생은 망명 직후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해서 쑨원 등 저명한 중국인들과 교류했고 상하이에 일찍 자리를 잡아서, 향후 독립 운동가들이 상하이에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선생은 100명에 가까운 조선 청년을 중국 각지의 무관학교에 보내고 지원했다. 이어서 ‘동제사’를 결성했다. 동제사란 ‘물을 함께 건너자’는 뜻이다. 동제사는 상해임시정부의 모태가 된 조직이다.

1917년, 조소앙, 박용만, 박은식 등과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유럽 등지에서 독립한 작은 나라들을 언급한 이 선언은 국제 정세를 읽고 있었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2년 뒤 2·8 독립 선언, 3·1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3·1 운동 후에는 한국과 만주, 연해주, 미주에서 몰려드는 지사를 맞이하기에 바빴다.

이어 안창호와 이동휘, 이승만, 이동녕, 이시영, 노백린 등과 함께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1921년 임시정부 국무총리까지 지냈으나, 독립 운동 세력이 분열하고 임시정부 내에서 내분이 계속되자 1922년 죽음을 무릅쓴 단식을 시작했다. 그 해 9월25일 단식의 여파로 상하이에서 43세를 일기로 숨졌다. 유해는 상하이 만국공묘(萬國公墓)에 안장됐다.

선생의 장남 신준호는 4대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의 둘째딸 윤완희와 결혼하여 윤보선 일가와 사돈 간이 된다. 선생에게는 또 딸 명호가 있었는데 훗날 이 소녀와 결혼한 사람이 민필호다.

신규식의 사위가 된 민필호는 나중에 김구 주석의 판공실장을 맡는다. 민필호는 중국군 고급장교 신분을 유지하며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을 도맡기도 했다. 그는 중경으로 옮겨간 임시정부의 청사를 마련했으며 해방 후까지 임시정부를 지켰다.

군자금 모으다 체포, 고문 끝에 불구의 몸
의사출신, 임정 재무통 신건식


▲ 신건식 선생(왼쪽)이 상하이 임정의 단초가 된 동제사의 구성원이자 훗날 사돈이 된 박찬익 선생과 사진을 찍었다.
신규식 선생의 동생인 삼강(三岡) 신건식 선생은 1989년 2월13일에 태어났다. 신건식 선생은 YMCA에서 운영하는 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상하이로 망명해 1912년 4월 중국 저장성 성립 항주 의약전문학교를 졸업했다. 한 때는 중국 정규군 장교가 되어 황푸군관학교에 근무하면서 대종교를 신봉했다.

1921년에는 특수사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 군자금을 모집해 가지고 돌아가다가 압록강에서 일본 헌병에게 잡혀 모진 고문을 받고 불구의 몸이 되었다.

1923년 4월, 선생은 중국군 중교(中校)로 항주 군의학교 외과 주임에 임명됐다. 선생은 중국군으로 복무하면서 우리 동포를 지원하는 등 임시정부의 활동을 도왔다. 의사(醫師) 출신 독립운동가라는 독특한 이력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신건식 선생은 형인 신규식, 사돈인 박찬익, 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상하이지역 최초의 독립운동 조직인 동제사를 결성했다. 이는 상해를 독립운동 기지로 건설하는 첫 작업이었다. 또한 3·1운동 직후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수립되는 터전을 마련했다.

1922년 병보석으로 신의주 감옥에서 나온 후 다시 상하이로 탈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1939년에는 임시정부 재무차관, 의정원 충청도 대의원(국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1941년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원으로 재정문제를 해결하는데 진력했고, 1943년 3월4일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차장에 임명됐다. 1944년 3월에는 한국독립당을 조직해 감찰위원에 선임됐으며 1945년까지 임시정부의 재정 확충과 운영의 묘를 살리는데 기여했다. 광복 후 주중대표(駐中代表)로 있다가 귀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유족으로는 역시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던 딸 신순호 여사가 생존해 있다. 신 여사는 1904년 관립 상공학교 재학 중에 국권회복 운동을 하다 퇴학을 당했으며 신민회 활동을 했던 박찬익 선생의 며느리다.

신 여사도 1940년 9월17일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 때에 오광심, 김정숙, 조순옥 등과 함께 여군으로 참가한 바 있다. 신 여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 운동가들이 남의 나라 땅에서 수십 년 동안 풍찬노숙하시며 후손들에게 바른 나라를 물려주려 한 뜻을 깊이 되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신순호 여사는 2009년 7월30일 별세했다.

일제엔 항일, 북에선 반공
진남포 비밀결사, 6·25 당시 총살당한 신석구


▲ 청주 3·1공원에 있는 신석구 선생의 동상
신석구 선생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충북 청원 출신이며, 기독교인이다.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서울, 개성, 춘천, 원산, 남포 등지에서 포교활동을 했다.

1919년 2월27일 당시 기독교 남감리파 목사로 있던 신 선생은 같은 남감리파 목사인 오화영으로부터 3·1독립만세운동 계획이 있음을 듣고 오화영,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최성모, 이필주, 함태영, 김창준, 박동완 등 10명의 기독교인과 함께 이필주의 집에 모여서, 함태영이 최린으로부터 받아 온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회람하고, 모두 그 취지에 찬성했다.

그리하여 그들 중 함태영만이 다른 연명자가 체포될 경우 그 가족보호의 임무를 맡기 위하여 제외되고,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제출할 문서에 날인하기 위해 인장을 모두 함태영에게 맡겨서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케 하였다.

그리고 28일 밤에는 다른 민족대표들과 재동 손병희의 집에 모여서 다음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대한 최종 협의를 마쳤다.

3월1일 오후 2시쯤 인사동의 태화관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해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급거 출동한 일본경찰에 체포·연행되어 경시청총감부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춘천, 원산 등지에서 일본경찰에 여러 번 체포되었다. 천안에서는 신사참배와 전승기원예배를 거부하다가 검거되어 복역 중 보석으로 석방됐다.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반공운동을 전개해 3·1절 기념방송사건과 기독교민주당 비밀결사 사건 등으로 투옥됐다. 1949년 4월 진남포에서 반공 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됐다는 죄명으로 10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6·25때 북한군에게 총살당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감리파 대표로 3·1 기치를 들다
민족대표 33인, 종교와 독립 양심 지킨 신홍식


▲ 청주 3·1공원에 있는 신홍식 목사의 동상
신홍식 선생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충북 청원 출신이며, 기독교인이다. 34세에 기독교에 입교한 후, 1913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 공주에서 포교활동을 했으며, 1917년에는 평양 남산현교회로 전임되어 포교와 교육사업에 정진했다.

1919년2월14일 기독교 북감리파 목사였던 그는 평양의 기홀병원에서, 동지규합을 위해 평양에 온 이인환으로부터 3·1독립만세운동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호응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2월20일 이인환의 집에서 오화영, 정춘수, 오기선등의 동지와 모여 서울과 각 지방에서 동지를 모아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키로 협의하고 이인환, 이필주,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김창준, 신석구, 박동완,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정춘수 등의 동지와 함께 기독교 측 대표로서 서명 날인했다. 28일 밤에는 재동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이튿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협의를 했다.

3월1일 오후 2시쯤 인사동의 태화관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해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에 구금되었다. 그후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인천, 원주 등지에서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8년 2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뒤 교회 일선에 물러나 충북 청주로 낙향했다가 1939년 3월18일에 일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또 선생을 2006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민족대표 또 한명의 감리교 목사 정춘수
비행기 헌납 등 친일행적 결국 동상 철거


충북 출신 민족대표 33인 중에는 감리교 목사인 정춘수가 있다.
그러나 정 목사는 3·1운동 이후 친일 행적이 문제가 돼 1996년 3·1공원에 있던 동상이 일부 시민단체에 의해 강제 철거됐다.

한국감리교 인물사전 등에 따르면 정 목사는 1939년 기독교조선감리회 통리사(감독)로 선임된 뒤 본격적인 친일행위를 시작했다.

1940년 ‘혁신안’을 발표해 민주주의 배격한 뒤 일본 정신 함양, 일본적 복음 천명 등을 선언했고 비행기 헌납운동 등 일본군 지원에 앞장섰다.

애국지사(志士) 출신 충북지사(知事) 있었다
‘만주 독립기지에서 상해 임시정부까지’ 이광


▲ 독립운동가이자 2대 충북지사를 지낸 이광 선생.
만주를 누비던 애국지사이자 훗날 충북도지사를 지낸 이광 선생은 1887년 청주에서 태어났다. 1894년 한성사범학교를 거쳐 1904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 2년을 수료했다. 1905년 귀국해 서울 공옥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고 1909년 봄에 양기탁의 집에서 열린 신민회 간부회의에서 국내에서는 광복운동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한국과 인접한 만주지방에 독립운동 기지를 확보해 민주정부와 군관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양기탁, 안태국, 김구, 이승훈 등은 국내에서 자금을 조달하기로 하고 선생을 비롯해 이회영, 이동녕, 주진수, 장유순 등은 독립운동에 적당한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1910년 만주로 떠났다. 만주에 간 선생 등은 남만주의 여러 곳을 물색하다가 요녕성 유하현 삼원보에서 적지를 찾아냈다. 그해 겨울 이철영, 이시영, 이회영 형제를 비롯해 이동녕, 이상룡, 김형식, 황만영, 이명세 등이 선생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

1911년 봄에는 일찍이 신민회에서 결의한 바 있는 독립기지설치, 군관 양성사업의 일환으로 만주에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신흥학교)를 설치했다.

경학사는 농사를 짓고 배워서 독립 국민의 자질을 갖추고 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하자는 의미요, 신흥강습소는 조국 광복 전쟁의 핵심이 될 청년군관의 양성을 목적으로 했다. 선생은 잠시 신흥학교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12년에는 북경으로 가서 신규식이 이끄는 동제사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북경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1918년 11월에는 국내에 들어와 양기탁, 전덕기, 최성모 등과 함께 일본에 저항하는 민중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뜻을 모았으며,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 대표 39명 중 1인으로 참가해 서명하기도 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많은 애국지사들이 상해로 집결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의정원을 설립했는데, 이때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됐다. 1921년 12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교위원으로 조성환, 한세량 등과 함께 북경주재 특파원의 임무를 맡아 교민들의 거주권 확보와 생활안정 등 생계 보호에 앞장섰다.

1930년에는 북경에서 박용태 등과 대한독립당주비회를 결성하고 기관지 한국의혈(韓國之血)을 열흘 주기로 발행했는데 선생은 기자로 활동했다. 1932년 9월에는 남경에 모인 독립투사들과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조직하고 그 간부가 되어 홍진, 조완구, 조소앙, 현익철, 조경한, 엄항섭 등과 함께 선전활동에 전념했다. 1938년에는 장사에서 임시정부 호남성 외교원으로 활약했으며, 1944년 3월에는 한국독립당 당원으로서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했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한 후 10월15일 임시정부 환국에 앞서 교포 보호를 위한 한교선무단(韓僑宣撫團)을 조직했다. 임시정부가 환국한 뒤에도 중국정부와 연락업무 및 교포 송환문제 등을 담당했다.

1948년 귀국해 1949년 충청북도지사, 1952년 감찰위원회위원장, 1954년 체신부장관 등을 역임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으며, 1966년 세상을 떠났다. 6.25전쟁을 전후해 충북지사를 역임한 이광 선생의 지사 재임시절 행적은 1996년 충청리뷰가 발간한 ‘도정반세기(이승우 저)’에 비교적 소상하게 서술돼 있다.

1988년 충북도 기획관리실장을 역임하다가 공직에서 물러난 이승우씨는 청주중 6학년(현 학제로는 청주고 3학년) 에 다니던 1950년, 보통고시에 수석 합격해 이광 지사로부터 합격증을 전수받았다.
이씨는 당시 이광 지사의 풍모에 대해 “6척 장신 장신의 준수한 용모와 빼어난 인품, 그리고 중국을 무대로 활약했던 특출한 경륜이 그를 돋보이게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씨는 또 6.25전쟁과 피난도청의 상황을 타인의 후일담을 통해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만주·연해주를 누비던 독립혼 이국에서 지다
‘양성춘 사건’ 연루, 억울한 보복살해 정순만


▲ 정순만 선생은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 반곡마을에서 태어났으나 주민들은 선생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생가터로 추정되는 곳도 짐작할 수는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사진은 마을전경과 생가 추정 장소.
정순만 선생은 1873년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야학 형태의 덕신학교를 설립해 운영했던 선생은 1896년 3월 이승만, 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 창립에 참여했다.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 도 총무부장으로 활약하다가 이승만, 유근, 나철, 안창호, 남궁억, 양기탁 등 367명과 함께 피체됐다.

1902~1904년 사이에 이승만, 박용만 등과 의형제를 맺고 만주로 망명했으며, 간도 용정에서 이상설, 이동녕, 여준 등과 함께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민족교육과 독립사상을 주입시켰다. 또한 독립군 양성 등에 주력했다.

1907년에는 안창호, 김구, 이동녕, 이동휘, 양기탁, 이회영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했다. 또한 헤이그 밀사의 여비 1만8000원을 교포로부터 모금해 전달했다. 1909년에는 러일전쟁및 경술국치를 전후해 이범윤, 이상설, 이동녕, 이동휘, 박은식, 안창호 등과 함께 노령에서 활약했다. 1910년 연해주 지역에서 ‘해조신문(海朝新聞)’, ‘대동공보(大東共報)’ 등을 발간했다. 또한 13도 의군부, 성명회, 권업회 등을 창설해 민족계몽 및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선생은 1911년 38세의 일기로 이른바 ‘양성춘 사건’과 관련해 비운의 죽음을 맞아야 했다. 양성춘 사건은 흔히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조직인 국민회의의 내부갈등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정설이 아니다.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는 “일각에서는 정순만 선생이 안중근 의거에도 참여했던 양성춘을 암살하고 그 가족들에 의해 보복살인을 당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10년 정순만 선생이 권총으로 자결하려는 것을 양성춘이 말리다 오발사고가 발생했던 것이고, 양성춘은 ‘보복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실제로 정순만 선생은 과실치사로 잠깐 형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순만 선생은 1년 뒤 양성춘의 형과 미망인에 의해 끔찍하게 살해되고 말았다”며 안타까워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형무소에서 이슬로 사라진 토종 의병
고향 청주에서 일본 병졸, 밀정 살해한 정춘서


▲ 청주보훈지청은 2008년 8월30일 자손이 없거나 자손이 있어도 고령이라서 벌초하기가 힘이 든 독립유공자의 묘소를 찾아가 벌초를 실시했다. 진천군 문백면에 있는 정춘서 선생의 묘소는 자손이 없는 상태로 방치돼 있었다. 사진/국가보훈처 청주보훈지청
정춘서 선생은 1885년 2월2일 청주(청원군 강내면·현 청주시 강서1동)에서 태어났다. 1907년 4월초 군대해산령에 격분해 고향 청주에서 의병장 한봉수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해 4월중에 의병 9명과 함께 무기를 휴대하고 각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했다.

5월10일(음력) 괴산군 서면 사치(沙峙)에서 의병장 한봉수가 쌍안경으로 일본 수비대 2명이 우편물을 호위하며 통과하는 것을 확인하고 저격케 했다. 정춘서는 동료 9명과 함께 일제 사격을 가해 일본 병졸 2명을 사살하고, 총기류 2정, 총검 2자루, 탄약함 2개, 수통 1개, 탄약 10발을 확보했다.

이때 이들의 활약과 거점 등에 대해 청주군 북강 내이면 화죽리에 거주하는 박내천이라는 자가 왜경에게 제보, 의병 토벌에 협조해 큰 피해를 입혔다. 이에 따라 8월15일 그 밀정을 서면 사치에서 사살했다. 10월 동리(東里)에서 김덕보, 이주사로부터 군자금 50원을 모금했다.

11월 8일 한봉수와 결별하고 12월에 동료 이종칠 외 1명과 총 2정으로 무장하고 16일에 청주군 북강 외이면 양청리에 사는 유주사 집에서 44원 10전을 군자금으로 모금했으며 계속해서 목천 일대에서 활약했다.
그 후 이러한 행적이 드러나 적에게 체포됐으며 공주지방법원 청주지부에서 소위 내란·살인·강도죄로 교수형이 선고돼 상고했으나 1911년 6월, 형이 그대로 확정돼 청주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일제, 대사면 한다고 해놓고 의병 대거 살해
경술국치(한일합방) 대사령 말로만 111명 사형집행


일제는 1910년 경술국치(한일합방) 때 '대사령'을 단행했다. 요즘으로 치면 '대사면복권'이라 할 수 있다. 일제는 '대사령'을 단행했지만 의병장들은 풀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이듬해 연말까지 의병 111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

조선총독부 관보(이하 관보)에 실린 사형 집행자는 모두 111명인데, 유력한 의병장은 11명, 소규모 의병부대를 이끌었던 의병장 8명, 의병장급 의병이 11명이나 포함되어 있다. 애국지사 1명, 의병이나 의병 추정자는 66명이며, 관보의 내용만으로 행적이 불분명한 자는 14명에 불과하다.

경술국치 때 대사령에 의하여 모든 의병장이 사면 혜택을 받는 것으로 잘못 알려져 호남 최고 의병장이었던 전해산 의병장도 며칠만 늦게 재판을 받게 되었더라면, 설령 사형선고를 받았더라도 풀려났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일제는 공적이 현저한 의병장이나 애국지사에 대한 체포와 함께 중형(사형, 무기징역, 징역 15년 등)으로 다스렸고, 이미 재판 중에 있거나 대사령 이후에 붙잡힌 의병장들은 대사령에 관계없이 처형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나 있다.

유력한 의병장으로는 심남일, 강무경, 김상태, 정경태, 오성술, 장인초, 신대룡, 최성천, 한명만, 윤국범, 전성범 등이고, 소규모 의병 부대를 이끌었던 의병장으로는 이세창, 김영택, 박화준, 김두수, 김상윤, 이병호, 최학준, 김병주 등이다. 의병장급 의병으로는 윤흥곤, 김일원, 김화서, 김수동, 김응백, 김학준, 정홍준, 정춘서, 김언세, 함재실, 박복인 등이다. 애국지사로는 이완용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이재명 의사이다.
정춘서 선생도 의병장급 의병으로 이 국면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아우내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 외치다
‘만세’와 목숨 맞바꾼 독립운동가 박준규 선생


▲ 충남 천안의 아우내 장터에서 1919년 일어났던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재연했다.
박준규(1862~1919) 선생은 충북 청원군 오창면 출신으로 1919년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의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이 날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세워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3000여명이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했다.

시위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며 일본 헌병주재소로 접근하자 시위대의 기세에 놀란 일본 헌병은 기총을 난사했다. 그리고 천안에서 불러들인 헌병과 수비대까지 가세하여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러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했다. 이어 30여명은 부상을 당하는 등 아우내 장터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박준규 선생도 이 때 아우내 장터에서 일본 군경의 흉탄에 맞아 순국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대통령표창,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선생의 묘소는 청원군 오창면 성재리에 있다.

아우내란 ‘2개의 내를 아우른다’는 뜻이다. 경상도와 한양을 이어주는 길목이다. 조선시대부터 전국의 상인들이 청주·진천·조치원·예산 등에서 지역 특산물과 소를 몰고 와 장을 형성하였으며, 인근 장터 가운데 가장 크게 번성하였다. 장은 매월 1일·6일·11일·16일·21일·26일에 열리는데, 돼지 소창에 양배추·파·고추·마늘 등을 선지와 함께 다져 넣은 ‘병천순대’로 유명하여 평상시에도 찾는 사람들이 많다. 1919년 3월 1일 유관순 열사가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만세를 불렀던 곳으로 주변에는 유관순 열사 생가가 있다.

한편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은 1919년 천안 병천시장에 있던 3,000여 명의 군중이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에 반대하여 독립만세를 부른 사건. 이 때 일제가 총검으로 만세운동을 강력하게 제지하면서 안타깝게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운동은 먼저 홍일선·김교선을 중심으로 하는 인사들과 조인원·유관순을 중심으로 하는 인사들이 각각 독립만세시위를 준비하여 병천시장에서 합동으로 전개되었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목격한 유관순은 3월 13일 귀향하여 아버지 유중권과 조인원 그리고 숙부 유중무에게 서울의 상황을 전한 뒤 이들은 4월 1일 병천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3월 31일 밤 자정에 병천시장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과 수신면 산마루 및 진천 고개마루에 거사를 알리는 봉화횃불을 올렸다. 야간을 이용해 예배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고 천안쪽 길목은 조병호가, 수신면 쪽은 조만형이, 충북 진천 쪽은 박봉래가 맡아 만세를 권유하기로 했다.

그리고 4월 1일 홍일선과 김교선 등은 병천시장에 나가 만세시위의 참여를 권유했다. 오후 1시경 조인원은 시장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시장 군중들이 크게 외치자 일경들은 해산을 요구, 불응하자 즉시 발포했다.

사상자들의 친지들은 시신을 헌병 주재소를 옮기고 항의 하였고 김교선, 한동규, 이백하, 이순구 등이 군중 100명과 함께 주재소로 가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또한 사망자에 대한 조치와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했다. 또 유관순은 주재소장을 잡아 낚아채면서 항의했다. 일제의 강제 진압으로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은 19명이며,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 투옥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박준규 선생도 이 날 아우내 장터에서 최후를 마쳤다.

일제호적 기입과 세금납부 거부하며 항일운동
조선총독에게 항일유서 전달한 김제환 선생


▲ 김제환 선생의 항일구국정신을 기리고자 건립된 ‘이정사’(청원군 낭성면 이목리).
독립운동가 김제환 선생(1867~1916)은 충북 청원군 낭성면 이목리에서 태어나 일제 침략에 항거, 단식끝에 목숨을 끊었다. 자는 문도(文道)이고 호는 소당(素堂)이며 본관은 김해(金海). 선생은 청주지방 유생으로 교육구국운동을 펼치는 한편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망하자 일제의 호적 기입을 거부하고, 경절에 일장기를 달지 않았으며 세금납부를 거절하는 등 일제에 강하게 항거했다. 이 때문에 선생은 일제에 체포된다.

이 때 6개월간 옥고를 치른 선생은 출옥후에도 항일운동을 한 것이 문제돼 1913년 다시 투옥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청원군 오창면 이산리에서 ‘성산대강회’를 개최, 주민들에게 의거할 것을 주장하다가 일경에 체포된 것이다. 청원군 오창면 출신의 이종만 선생도 스승 김제환을 따라 납세거부, 호적기입 거부 운동을 펼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두 사람은 ‘성산대강회’를 열어 일본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1920년 7월 17일 조선민단이 독립 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개최한 연설회가 일본에 의해 해체되자, 이종만 선생은 같은 해 9월 신흥구, 신형식 등과 군자금을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기로 하고 평양결사단 청주지부를 결성하였다.

이후 인근의 부자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으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1921년 3월 1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또 1920년 2월 서울에서 김광제, 박무병 등과 함께 계몽적 노동단체인 ‘조선노동대회’를 결성하였으며, 같은 해 5월에는 조선노동대회의 별동조직으로 ‘조선민단’을 결성하여 간사로 활동했다.

김제환 선생은 ‘성산대강회’ 사건으로 투옥됐다 풀려난 뒤 산 속으로 들어가 조선총독 장곡천호도에게 항일유서를 송부한 후 마침내 단식끝에 목숨을 끊었다. 그의 강한 항일정신이 안타깝게도 단식으로 끝을 맺은 것이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선생의 묘는 청원군 낭성면 인경리 산 50-2번지에 위치해 있다.

한편 지방유림들은 1954년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순국하신 소당 김제환 선생의 항일구국정신을 기리고자 청원군 낭성면 이목리에 ‘이정사’라는 사당을 건립했다. 관리기관은 김해김씨 문중이며 부지 330제곱미터에 목조와가 및 유허비가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돼있다. 이 곳에는 남당 한원진(1682~1751), 성암 박유형(1858~1929)의 위패가 같이 봉안돼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969년에 중건하고 1979년에 해체 복원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통간 마루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퇴를 두었고 ‘이정사’라는 편액을 걸었다. 마당 앞에는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돌렸다. 이정사에서는 매년 음력 3월 8일 김해김씨 종친회 주관으로 추모제가 거행된다. 이 날 김해김씨 후손들은 모여 김제환 선생의 드높은 항일구국정신을 마음속에 새기고 기린다.

일본인 자산가와 변절자를 혼내다
33전 1패 ‘번개대장’ 한봉수 선생


▲ 한말의 의병장인 한봉수의 1960년대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한말 청주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한 한봉수는 1883년 4월 18일 현 청원군 북이면 세교리 197번지에서 가난한 농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고 호는 청암(淸巖)이다. 한봉수는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가난하고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8세부터 11세경까지 인근의 북이면 서당리에 있는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냥에 재질이 있었다고 전하며, 17세부터 명포수로 알려질 정도로 총의 명수이기도 했다.

한봉수 선생은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으로 복무하다가 1907년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동년 8월에 의병장 김규환 의진에 가담해 일군 수비대 및 헌병대를 습격하는 등 눈에 띄는 활동을 보여줬다.

1907년 가을에는 해산 군인 100여 명을 규합하여 대장으로 추대됐으며, 의병진의 명칭을 왜적구축대(倭敵驅逐隊)라 칭했다. 이후 오근장 부근에서 일 헌병대위 도기선치를 사살하고 강원도로 수송되는 세금 수송대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확보했으며 전의·목천·평택·여주·횡성·문경 등지에서 일군과 33회의 격전을 치르는 등 크게 활약했다.

1909년 음력 8월에는 문대장이라고도 부르던 의병장 조운식 보은 속리산 등에서 수시로 적을 깨칠 계획을 논의했으며, 계속해서 일군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한봉수 의병부대는 일본인 자산가와 친일파를 처단했으며 밀정과 변절자를 혼내주고, 일본군과 직접 교전도 하면서 우편행랑을 기습하는 등 동해 번쩍 서해 번쩍 하면서 유격전을 벌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번개대장’이라고 불렀다.

번개대장 한봉수가 이끈 의병부대는 1907년 9월부터 1910년 2월까지 곳곳에서 크고 작은 유격전을 벌였다. 모두 33전 1패의 전과를 거두었으나, 한봉수 의병부대의 활동은 1910년에 들어와 크게 위축됐다. 일제의 감시망도 강화되었을 뿐 아니라, 장기간의 투쟁으로 식량과 무기의 공급도 원활하지 못했다.

또한 일제에 의해 활동 근거지가 철저히 파괴당했고, 부하들도 대부분 피체되어 의병부대가 와해된 상태였다. 그래서 한봉수의 의병투쟁은 1910년 2월 청주 오송 출현을 마지막으로 종료됐다.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한봉수는 1910년 5월 12일 귀순의사를 표시한 뒤 일단 서울로 잠입했으나, 5월 15일 급파된 충청북도 경찰부 소속 순사들에 의해 체포됐다.

결국 한봉수는 1910년 6월 29일 공주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열린 재판에서 소위 내란 및 강도·살인의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일제가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를 완전히 빼앗은 뒤 회유책으로 내린 대사면령으로 출옥할 수 있었다. 출옥 후에도 그는 일제의 눈을 피하여 서울을 왕래하면서 애국동지들을 만나 독립운동의 기회를 엿보았다.

그래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손병희를 비밀리에 만난 뒤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청주로 내려왔다. 그런 다음 3월 7일 청주 장날을 기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인 서문장터(우시장) 입구 마차 위에서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4월 1일에는 청원군 북일면 세교리 장터에서 다시 면민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다음 날 다시 내수보통학교 학생 80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한봉수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6일 공주 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나온 한봉수의 생활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해방 이후에도 청주 내덕동에서 청빈하게 살았는데,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1972년 12월 25일에 노환으로 운명했다.

충청북도는 2007년 한봉수 선생이 의병을 일으킨 지 100주년 되는 해를 기념해 그를 ‘충북을 빛낸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현재 그의 무덤은 고향인 청원군 북일면 세교리에 있다. 진천군 문백과 청주시 중앙공원, 상당공원에는 각각 그를 기리는 기념비와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한봉수 의병장 기념사업회는 해마다 선생의 탄생 추모제와 함께 도내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열어 선생의 뜻을 기리고 있다. 한편 한 의병장의 딸인 한정애 여사가 청주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손자인 한민구 선생은 최근 단행된 국방부 인사에서 육군참모총장에 내정돼 육군의 수장이 됐다.

한 날 한 시 죽음으로 의병의 애국열을 보이다
의병 김성관,조성여,박반문,천성십
군수품 모집·총기수리·길안내로 항일투쟁


일제는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압박해 대일협력을 강요, 협박하기 위한 조약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했다. 이어 1905년 11월에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1907년에는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로 반일 황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기 위한 마지막 조치로 한일신협약을 체결해 군대까지 해산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한편 고종의 강제양위과정에 있어서 매국행동을 한 일본의 충견, 이완용 내각각료들은 일본군의 엄중한 호위로 겨우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상태였다.

일본 외무대신 임훈과 이등박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국병합을 촉진할 의도 아래 7조로 된 소위 한일신협약을 1907년 7월 24일 아침 이완용 내각에 제출했다. 이완용 내각은 이날 남산 왜성대(倭城臺)에 있는 송병준 집에서 각의를 연 후 일자일구(一字一句)의 수정도 없이 통과시킨 후, 왕의 재가를 받아 이날 밤 11시 30분에 조인됐다. 이 조약을 이른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라 하는데, ≪이등박문전≫에서, “공[이등박문]은 통감의 감독권을 확장하고 이로써 장래의 화근을 두절할 목적으로 신협약안을 한국정부에 제출하였던 바, 이때는 한 사람의 이의를 말하는 자 없이 모두 이에 동의하였다” 라고 한 것을 보면 통감의 명령으로 그들의 주구내각에 의해 얼마나 신속히 처리되었던가를 알 수 있다.

이런 시대적 상황으로 특히 의병항쟁이 고양된 것은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한 한국군의 해산해산,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의병전쟁은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당시 충북의 의병수는 810명, 충돌횟수는 4번, 전사자수는 77명이다.

그들은 관군의 무능으로 인하여 국토가 일본군에 의하여 짓밟히고 많은 생령이 죄 없이 쓰러져가자, 동족을 구하고 스스로 향리를 수호해야만했다. 이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자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의병은 신분적으로 보면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어, 의병 활동을 벌이는 기간에는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장은 대개가 전직 관원으로 문반 출신(文班出身)이 압도적으로 많고 무인들은 소수였다. 그리고 덕망이 있어 지방에서 추앙을 받는 유생들도 있었다. 의병을 일으키는 데 적합지로는 자기가 자란 고장이나 지방관으로 있을 당시 선정을 베풀어 그곳 지방민들이 잘 따를 수 있는 곳을 택했다.

그들 중 청주 출신인 김성관, 조성여, 박반문, 천성십 선생도 청주 충남 목천 등지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면서 의병들의 무기를 수리하고 길안내를 하는 등 지원활동을 전개 했다.

또 이들은 1907년 11월2일 청주군 북강외이면에서 이참봉(1896년부터 1908년까지 충북, 경상도, 강원도 3도에 걸쳐 13년간을 오로지 국권 회복을 위해 항일 의병장으로 불멸의 공훈을 남긴 리강년의진의 부장)으로부터 6억원을 수령하는 등 당시 무기·군수품의 공급 등 문제를 독립 운동의 최대 관건으로 모집활동을 했다. 일제 강점하 독립운동은 ‘굶어서 죽고, 얼어서 죽고, 맞아서 죽을’ 각오 없이는 독립전사가 될 수 없을 만큼, 그때 목숨을 바친 선열들은 대부분 굶어서 죽었거나 얼어서 죽었고, 일제의 총에 맞아 죽었다. 흔히 ‘풍찬노숙’으로 표현되는 이들의 활동은 실로 눈물겨웠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1907년 11월 17일 오후 3시경 군수품 모집 활동중 일본군 순사에 의해 피체 돼 호송되던 중 탈출을 시도해 추격하는 일본군 순사들에게 돌을 던지며 강력히 저항하다 총에 맞아 순국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저항 했던 이들의 애국열을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김성관, 조성여, 박반문, 천성십 선생에 대한 기록이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 나오는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다만 한날 한시에 의병 활동을 시작했고 한날 한시에 순국했다는 정도의 기록뿐이다. 의병활동 이전의 신분에 대한 기록도 찾아 볼 수 없다.

충북대 박걸수 교수는 “의병장이 아닌 단순 의병들의 자료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네명의 선생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한봉수 선생 부대에 소속 돼있었다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정부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한편 충북도와 국가보훈처, 대한광복회는 지난2001년 도내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내역이 담긴 자료집을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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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농민, 독립투사의 삶을 살다
부일협력자 방사연 사살한 의병 김명심 선생


김명심 선생은 청주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인 한봉수(韓鳳洙) 선생의 의병부대에서 활약했다.

1907년 7월 일본는 강제로 정미칠조약을 체결해 대한제국군을 해산시키는 등 식민지화를 향해 박차를 가했다. 이에 격분해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해 일본군을 공격하거나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주구배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무너져가는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했다.

선생은 이 같은 시기에 반일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목적을 가지고 1908년 한봉수 의진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한봉수 의병장은 1907년 대한제국군 강제해산 직후 의병운동에 주도해 일본군 헌병대와 수비대를 습격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던 의병장이었다.

한봉수 의병부대의 특징은 평민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주요 구성원인 윤순채 선생은 질그릇 행상이었고 이정구 선생(일명 이재천)은 농민이었다. 김명심 선생 또한 평범한 농민이었다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의 '의병장 한봉수의 항일투쟁'이라는 제목의 논문에 따르면 한봉수 의병부대는 20~60명 규모인 것으로 추정된다. 우편행랑 습격 등 교전이 예상되는 경우에는 20~40명이 투입됐고, 군자금 모금 등에는 6, 7명의 소규모 인원이 활동했다.

김명심 선생은 한봉수 의병부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으며, 활동기간동안 눈부신 활약을 선보였다.
1908년 음력 3월경 한봉수 의병장의 지시를 받고 의병활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총기를 휴대하고 청주 일대(당시 청주군)에서 군자금을 징수하는 임무를 맡았고, 같은 해 6월에는 일본 경찰에게 의병활동을 밀고한 같은 군 북강외일면에 거주한 부일협력자 방사연을 사살했다.

이듬해인 1909년 음력 4월경에는 이정구 선생 등과 함께 북강외이면에서 군자금을 징수했다. 또한 그해 음력 5∼6월 동지 7∼8명과 함께 속리산(俗離山)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추격을 받고 교전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결국 일본경찰에게 체포당한 선생은 1910년 3월 18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유형 10년을 받고 공소했지만, 5월 14일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5년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

신출귀몰했던 한봉수 의병부대의 핵심에 선생이 있었다. 한봉수 의병장을 중심으로 선생과 동지들의 활동영역은 충북을 넘어 강원도와 경북일원까지 방대했다.

게릴라전에 능했던 한봉수 의병부대는 일본인 자산가와 친일파의 처단과 밀정과 변절자의 처단하는가 하면 일본군과 직접 교전도 불사했다. 또한 우편행랑 기습, 군자금 모금 다양한 활동으로 전국적으로는 의병활동이 약화되던 시절에도 지속적인 활동으로 일본을 괴롭혔다.

한봉수 의병부대의 일원으로 선생이 활동하던 시절 청주는 통치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박걸순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의병활동으로 말미암아 식민통치 기구의관리들은 무장군인의 경호를 받고서야 가까스로 출장이나 공무를 수행할 수 있었고, 의병활동의 영향으로 급기야 주민들이 납세를 거부해 대책마련에 부심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의병장 아버지의 삶에서 배운 애국정신
조선국민회 조직해 3·1운동 주도한 배민수 선생


▲ 배민수 선생과 부인 최순옥 여사
1897년 9월 2일 청주(상당구 문화동 33번지)에서 출생한 배민수 선생(1897~1968)은 평양 숭실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7년 3월 장일환, 백세빈 등 같은 학교 학생들과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비밀결사조직인 조선국민회를 조직해 함경북도 성진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

조선국민회는 미주국민회 등 해외 독립운동단체들과 긴밀한 연락을 통해 함께 뜻을 모았다. 이들은 군자금을 모아 간도(間島)에 토지를 구입해 그곳을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만드는 것이 궁극적 목표였다.
선생은 또한 같은해 6월 노덕순 등과 함께 집게손가락을 잘라 '대한독립'이라고 혈서를 쓰고 국민회의 단결과 장래의 활동방침을 맹세했다. 하지만 조선국민회는 뜨거운 애국정신에도 불구하고 목표했던 바를 성공하지 못했다. 1918년 2월 조직이 발각되면서 동지 24명과 함께 체포됐다.

일본 경찰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한 선생은 1918년 3월 16일 평양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10개월의 징역형을 받고 옥살이를 하게 된다.

출옥 후에는 함경북도 성진으로 이사해 10여 명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그레이슨 목사 집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기로 뜻을 모은다. 이들이 처음 회합을 가진 것은 3월 초, 독립만세운동일은 3월 10일로 정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선생과 동지들은 드디어 3월 10일 오전 10시 그레이슨이 경영하고 있던 제동병원 앞 광장에서 성진읍민 5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선언문과 궐기사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뒤 시가행진을 펼쳤다.

일본 경찰은 이들은 강제로 해산시키려고 했지만 읍민들은 투석전으로 대항해 일본 경찰마저 무찔렀다. 결국 일본은 나남(羅南)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기병대까지 성진으로 불러들였다. 이날 일어난 성진의 만세시위는 함경북도 지방의 3·1독립운동을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선생은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청진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각각 유죄판결을 받고 1919년 10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9월을 선고받는다.

1923년 숭실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선생은 선교활동에 전념하다 미국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1933년 시카고에 있는 매코믹신 신학교를 수료하고 귀국해 목사 안수를 받은 선생은 그 후 장로교 총회본부 안에 농촌부를 신설하고, 초대 총무로 활동하면서 교단 차원의 조직적인 농민계몽운동을 벌였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에 근무하다 1948년 미군 철수와 함께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메카레스터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51년 6·25전쟁 중에 귀국해 대전에서 기도교연합봉사회, 기독교농민학원(1956년), 대전기독교여자농민학원(1962년)을 설립하고, 1968년에는 고양군(고양시) 일산에 삼애농엽기술학원을 세워 농민운동에 온 힘을 다하다 생을 마감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선생의 민족의식은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아버지 배창근 선생(1867~1908)에게서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다. 대한제국군 청주 감영 진위대 육군보병 부교(지금의 하사관)로 근무하던 배창근 선생은 1907년 일본의 강압적인 정미칠조약 체결로 대한제국군이 해산되면서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군이 해산되면서 뜻을 같이한 부하들과 함께 비밀모임을 갖고 배창근 선생을 의병대장으로 하는 결사대를 결성했다. 의병활동을 펼치던 배창근 선생은 의병 토벌대의 일본 군인 2명을 총살한 일로 1908년 8월 체포돼 같은 해 11월 공주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고, 1909년 8월 처형당했다. 배민수 선생의 자서전에 따르면 아버지를 면회하기 위해 남대문 경찰서에 갔던 때 아버지는 선생에게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당부의 말을 전했다고 한다.

"첫째 네 자신을 돌보고, 둘째 어머니를 잘 모시고, 셋째 우리나라를 잘 지켜야 한다. 내가 구하지 못한 조국을 구하고 보살피는 것은 아들인 네가 해야 할 몫이다." 당시 선생의 나이 이제 10살이었다.

열여섯 나이에 총을 든 여전사
광복군 여군으로 활약한 신순호 선생


▲ 신순호 선생
신순호 선생(1922~2009)는 1922년 1월 22일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에서 태어났다.
신 선생은 1938년 8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 한중 합동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오광심·김정숙·조순옥과 함께 여군으로 참가했다.

당시 여성이 군인으로 활약한다는 것은 보통의 결의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신 선생은 열여섯의 나이에 총을 들었고 광복군이 창설되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참가해 조국광복을 이끌었다.

신 선생이 이토록 결의에 찬 항일운동을 벌일 수 있었던 데에는 아버지 신건식 선생(1889~1963)과 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한 큰아버지 신규식 선생(1879~1922)의 영향이 컸다.

신건식 선생은 YMCA에서 경영하는 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상하이로 망명, 저장성 의약전문학교를 다녔다. 1921년 특수사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 군자금을 모집해 가지고 돌아가다가 압록강에서 일본 헌병에게 잡혀 모진 고문을 받고 불구의 몸이 됐음에도 임시정부 재무차관과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는 등 해방을 맞을 때까지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

신 선생은 자연스럽게 어려서부터 ‘광복’과 ‘민족’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키워왔으며 일선(逸仙) 소학교에 다니던 7살 때 윤봉길 의사 추도식을 직접 참관 했다.
선생은 최근까지도 ‘수억 중국인이 못했던 일을 2천의 한국 사람이 했다’는 당시 교장 선생의 추도사를 전하기도 했다.

광복군으로 활약하던 신선생은 1942년 9월부터 임시정부 생계위원회 회계부에 파견돼 근무했으며 임시정부 외무부 정보과에서 일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에 배속되어 중국정부와의 연락업무를 맡았으며 1947년에 귀국해 서울에 머물렀다.

신 선생이 임정에서 일할 당시 함께 항일운동을 하던 박찬익의 아들이자 광복군 제3지대 훈련총대장이었던 박영준 선생과 결혼했는데 당시 결혼식이 임정 내에서 큰 화제가 됐다고 전해진다.
당시 임정은 중경에 정착했을 때였는데 상해를 떠난 뒤 오랜 피란과 이동으로 아이 울음소리를 듣기 힘들었다고 한다.

더욱이 중경은 큰 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구름과 안개 때문에 햇빛을 보기 어렵고, 인가와 공장에서 나오는 석탄 연기로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다. 중경에 거주하는 동안 동포 300~400명 가운데 70~80명이 폐병으로 사망한 것은 이런 기후 때문이었다.

이렇듯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임정시절 외교부장 조소앙의 주례로 열린 선생의 결혼식은 역경 속에 이뤄진 경사라는 점에서 대단한 축복을 받았다.
선생은 최근까지 생존한 몇 안 되는 항일운동가 중 한 사람으로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수여했다.

선생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아버지 신건식 선생과 큰아버지 신규식 선생에 대한 일화를 전할 정도로 건강을 유지했지만 2009년 7월 30일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족으로는 아들 박천기씨와 딸 천민(교사), 사위 이홍권(변호사)씨가 있다.

부호들의 거부로 실패한 거사
임시정부 운동자금 확보위해 뛴 신형식 선생


신형식 선생(1895~1931)은 청원군 낭성면 호정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신학구 선생·신흥구 선생 등 문중사람들과 함께 미원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만세운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됐지만 선생은 체포되지 않았고, 이듬해인 1920년 8월 ‘평양결사단 청주지부’를 조직하고, 이종만 선생의 집에서 신흥구 선생, 이종만 선생 등과 군자금을 모집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몰래 보내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할 계획을 세웠고, 유영창 선생·한병호 선생과 함께 실행에 나섰다.

선생은 1920년 12월 17일 청원군 오창읍 신평리에 사는 부호 김상희를 찾아가 군자금을 요청했다가 실패하자, 유영창 선생에게 모의 권총 1정을 제작하게 해 이를 가지고 부호들을 찾아다니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

하지만 김재진 정인하 등 부호들에게 임시정부에 송금할 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고, 끝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선생은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당했고, 1921년 4월 1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제령(制令) 제7호(정치에 관한 법령) 위반 및 공갈죄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고,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함께 활동한 이종만 선생은 1913년 일제의 호적등재 등에 대해 불납세(不納稅) 불입적(不入籍) 불응역(不應役) 운동을 펼치다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석방된 후에는 김제환 선생 등과 함께 성산대강회(聖山大講會)를 열어 일본에 항거하는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기도 한 인물이다.

이종만 선생은 1920년 2월 서울에서 김광제 선생 박무병 선생과 함께 계몽적 노동단체인 조선노동대회를 결성했고, 같은 해 5월 조선노동대회의 별동조직인 조선민단을 결성해 간사로 활동했다.

신형식 선생이 이종만 선생과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뜻을 모으게 된 것은 조선민단이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개최한 연설회가 일본에 의해 해체된 것이 계기가 됐다. 오창이 고향인 이종만 선생이 동향사람인 유영창 선생을 소개했고, 평양결사단 청주지부가 완성된다.

이종만 선생은 신형식 선생과 신흥구 선생 가운데 가장 먼저 체포됐고, 1921년 3월 11일 경성복심법원으로부터 1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종만 선생은 198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한편 신형식 선생과 같은 문중인 신흥구 선생은 이종만 선생이 체포된 후에도 숨어서 지속적인 활동을 했고, 신형식 선생이 체포된 1921년 4월에도 피신에 성공해 계속해서 활동했다. 또한 1930년에는 이름을 바꿔 독립운동을 전개했는데, 이 때 쓴 것으로 보이는 편지 몇 장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신흥구 선생도 이종만 선생과 함께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3명의 젊은이가 의기투합해 이루려했던 독립운동자금 확보는 실패했지만 우리나라 독립운동 역사의 한 면을 장식하고 있다.

‘죽을지언정 일제치하에서 살수 없다’
미원면 만세운동 주도한 이병선·장일환 선생


▲ 이병선·장일환 두 선생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청원군 미원면 미원장터.(육성준 기자가 찍겠음)
1919년 만세운동은 3월 1일을 기점으로 서울 등 주요 도시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확산됐다.
청주군(청주·청원)의 만세운동은 3월 10일 청주농업학교 학생들의 시위 계획을 시발로 4월까지 계속됐으며 20일을 전후해 면 지역으로까지 들불처럼 번져갔다.

3월30일 일어난 청원군 미원면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병선·장일환 선생(1882~1919)은 1882년에 태어난 동갑내기 토박이였다.

두 선생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한봉수 선생과 교류해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한봉수 선생으로부터 고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부탁 받고 미원장터에서 시위를 전개한 것이다.

오후 1시경 미원장터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에는 당시 청주지역 최대 규모인 1000여명이 참가했다. 독립선언문 낭독으로 시작된 시위는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 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시위대는 미원장터를 빠져나와 주재소 앞길까지 진출했으며 시위대는 일본 헌병에 연행된 동지를 구출하자며 태극기를 앞세우고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매우 격렬해졌다. 이에 놀란 일본경찰들이 발포하면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이병선·장일환 두 선생도 가슴에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순국했다.
청주지역 만세운동은 3월 중순 청주군을 시작으로 23일 강내면에서도 수백명이 참여해 벌어졌으며 미원장터 시위 이후 더욱 확산됐다.

서울 보다 보름여 늦게 만세운동이 시작된 것은 3월 2일 청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계획하고 대중들에게 배포할 300여장의 경고문도 인쇄했지만 일제에 발각돼 성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주지역 만세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봉화시위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3월 23일 밤 일어난 강내면 만세운동의 경우 태성리 산마루에서 봉화가 피어오른 것을 기점으로 인근의 18개 마을과 옥산, 남이 등지에서도 호응해 수십 개소의 산마루에서 봉화가 피어올랐고 동시에 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4월 1일에는 청주면, 오창면, 강외면, 부용면, 북일면, 북이면, 강내면, 옥산면 등 8개 면의 산위에서 동시에 봉화가 오르기도 했다.

당시 봉화시위는 지금의 촛불시위에 견줄 만큼 군중들의 뜻을 하나로 모으는 중요한 촉매역할을 했으며 주변 산마루 마다 동시에 피어 오른 봉화에 일본 경찰이 크게 당황했음도 당시 기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어두워진 밤에 시작된 봉화시위는 이튿날 새벽까지 만세운동으로 이어졌으며 그 때마다 놀란 일제는 청주와 조치원에 주둔하던 군대를 출동시켰던 것이다.

또한 청주지역 만세운동은 주로 농민들에 의해 주도됐다는 특징도 갖고 있다.
청주의 3·1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일제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된 42명 중 농민이 28명으로 3분의2를 차지하고 있으며 학생은 9명(21.4%), 면서기 및 고용원은 5명(11.9%)에 그쳤던 것이다.

특히 이병선·장일환 선생이 주도한 미원장터 시위는 평범한 농촌마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두 선생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한 것인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의병장 한봉수 선생으로부터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부탁받자마자 뜻을 같이하던 동지들과 상의해 만세시위 날짜를 정하고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참가를 종용했다고 전해진다.

3.1운동 이후 일본 경찰의 감시와 통제가 강화됐지만 두 선생은 일경의 눈을 피해 일일이 주민들을 만나는 한편 수백 장의 태극기를 만들어 시위를 준비했던 것이다.
미원장터 시위 참가자들은 마을 주민들 뿐 만이 아니었다. 인근의 가덕, 낭성, 멀리 보은 주민들까지 다수 미원장터를 찾아 목청껏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으니 두 선생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시위를 준비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병선·장일환 두 선생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국가보훈처는 물론 청주와 청원지역 자료에도 ‘의병장 한봉수의 부탁으로 미원면 만세운동을 주도, 현장에서 흉탄을 맞고 순국했다’는 정도의 기록 뿐이다.
구체적인 출신지도 불분명하고 만세운동 이전의 활동에 대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의병장 한봉수 선생과 친분을 맺어왔고 만세운동 당시 서른일곱의 나이였다는 것으로 미뤄 어떤 형태로든 항일운동에 관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또한 이들이 만세운동 이전에도 서로 교류한 친구였을 가능성이 클 것으로 짐작된다. 두 선생 모두 1882년생으로 나이가 같고 한봉수 선생이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켜 달라’고 부탁했던 것에서도 같은 미원 출신임이 드러난다.
정부는 두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모진 고문 이겨낸 열여섯 청년
‘화랑회’를 조직한 학생항일운동가 이상운 선생


▲ 익산대학 내에 세워진 화랑회 이상운의사 추모비
이상운 선생(1827~1945)은 청원군 강내면 월곡리 출신이다. 이 선생의 가정환경 등 유년기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전북 이리(현 지명 익산)에 있었던 이리농림학교 2학년 재학시절 학생 항일운동을 했다는 사실로 미뤄 매우 영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리농림학교는 1922년 5년제 관립학교로 개교했으며 함경도 지방에서 까지 지원자가 몰릴 정도로 유명했던 실업학교였다. 농림중학교-농림고등학교-농공전문대학을 거쳐 현재 익산대학으로 발전했으며 이리농림학교 본관은 지금도 대학 교양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상운 선생에 주목해야 할 것은 ‘화랑회’를 조직해 항일 학생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화랑회’는 일제식민통치에 대한 항거를 목적으로 조직된 결사체로서 무장봉기를 계획했다.
이들의 전략은 우선 총기와 폭약 등을 탈취해 무장한 뒤 주재소 및 경찰서를 습격하고 또 만경교(익산시내의 교량)를 폭파함으로써 일제의 수탈통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그 첫 번째 계획으로 폭약과 총기를 탈취하기 위해 김제군 금구면 오산리에 있는 일본인의 광산을 습격하고 동지 20여명이 광산에 잠입했으나 일경의 삼엄한 경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이들은 거사를 재차 계획하는 한편 회원간의 체력 및 무술단련에 힘쓰면서 무기 확보에도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화랑회의 조직이 일경에 발각돼 1945년 4월 전회원이 체포됐다. 이때 일제는 구류기간을 연장하면서 어린 소년들에게까지 치안유지법을 적용해 3개월 동안이나 잔학한 고문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화랑회’를 조직하고 대표를 맡아 모든 활동을 지휘한 지도자가 바로 이상운 선생이었으며 이 때 선생의 나이는 열여섯에 불과했다.
‘화랑회’는 무장봉기를 계획했다는 점과 이를 위한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 직접 실천했다는 점, 특히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했던 당시 시대적 상황 등 구한말 동학농민운동과 궤를 같이 한다.
만주지방을 중심으로 광복군이 조직돼 무장 항일운동이 전개되기는 했지만 ‘화랑회’는 게릴라 전술을 계획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일본 경찰이 이 선생을 비롯한 조직원들에게 3개월 동안이나 고문을 가했을 정도로 ‘화랑회’ 활동기간이 2년에 불과하지만 일제가 얼마나 큰 사건으로 다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선생의 초개와 같은 절개는 1945년 4월 화랑회의 조직이 일경에 발각돼 체포된 뒤에 더욱 빛났다.
선생은 함께 붙잡힌 다른 조직원들에게 모범을 보이려는 듯 끝까지 항거했으며 3개월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가해진 혹독한 고문에 한순간도 조선인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의 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일경이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해방을 한달도 남겨두지 않은 1945년 7월 17일 끝내 순국했다.
당시 광복을 향한 선생의 울부짖음을 영원히 기억하라는 듯 익산대학 교정에 추모비가 세워졌으며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열일곱, 책 대신 총을 들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군대 ‘광복군’ 이윤장 선생


▲ 1934년 4월 4일 광복군의 전신인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대원들 사진. 맨위 오른쪽 첫번째가 이윤장 선생
건국훈장을 추서받은 독립지사 가운데 생존하는 인물은 2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현재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에 거주하고 있는 이윤장 선생(87)이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청주 출신인 이윤장 선생은 광서성(廣西省) 유주(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항일투쟁에 관한 계몽 및 선전활동을 전개했고, 그 후 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해 산서(山西), 하남(河南)지구에서 일본군 와해 공작활동 등을 전개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젊은 날을 바친 선생에게 정부는 지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임시정부는 오랫동안 광복군 창설을 염원했다. 광복군 창설계획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936년 11월 임시의정원에서였다. 임시정부는 의정원의 정무보고에서 일본과의 전쟁이 임박했기 때문에 광복군 창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임시정부는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군무부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처음으로 설치했고, 인적자원의 양성이 필요함을 논의했지만, 그 뒤 중국정부의 후퇴와 임시정부의 피난으로 미뤄지다가 1939년 2월 공진원을 대장으로 하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최초로 조직해 활동을 시작했다. 선생 또한 열일곱 나이에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일원이 됐다. 선생은 “이웃집에 중국의 선전공작대가 있었다. 매일 노래도 부르고 연극도 하는데 신기해서 들여다봤더니 이 사람들이 낮에는 부상당한 중국 군인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가서 위로도 하고 노래도 불러주고 하더라. 한국 사람들도 이렇게 선전공작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중국선전공작대 장교들과 합의를 통해 그들의 소개를 받아 다른 한국 청년들과 접선해 함께 선전공작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징 임시정부 청사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열고 광복군을 발족했다. 창설당시 광복군의 규모는 2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선생은 광복군 창설 멤버로 참여했다.
광복군은 1941년 12월 9일 태평양 전쟁 발발과 함께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으며, 좌우합작이 이뤄지면서 1942년 7월 김원봉계의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한국 광복군 부대로 흡수했다.
선생은 김학규 지대장이 통솔한 제2지대원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광복군은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많은 훈련과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를 뒷받침할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하지 못해 한계를 드러냈다. 1945년 4월 당시 임시정부 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한국 광복군의 총 병력 수는 339명에 그쳤다.
광복군의 활약상은 일본군의 공식 전투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연합국을 주 대상으로 국제방송을 통해 전개한 선전활동은 영국군과 미군의 군사합작을 추진하는 힘이 됐다. 특히 영국군은 버마작전에서 일본군에 대한 선전 및 정보 수집을 위해 광복군의 협조가 필요했다. 광복군은 1943년 영국군과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인도 버마전선에서 영국군과 함께 대일작전에 참여했다.
선생은 광복군의 창설과 해체의 역사 한 가운데 있었다. 광복군은 해방 후 대한민국 군 창설의 모태가 됐다는 점에서 광복군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는 크다.
한편 2006년까지 광복회 이사로 활동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던 선생은 최근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일제의 잔인성을 알린 외교가
의열단원으로 구미열강서 활약한 정환범 선생


▲ 정환범
충북 청주가 고향인 정환범(鄭桓範·1903∼?)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의열단에 참여하고 구미 열강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인 독립 운동가이다.
일찍이 만주로 건너갔다가 1919년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신규식(申圭植·1879∼1922) 선생의 밀명을 받고 국내에 들어왔다.
당시 스코필드 박사가 촬영한 일제의 학살 장면등 사진 50매를 임시정부에 전달하여 일제의 잔인성을 전 세계에 폭로했다.
이런 활동과 연유해서 1919년 11월 그는 임시정부의 충남 공주군 조사원에 임명되어 공주군 내의 각종 자료를 임시정부에 보고하기도 했다.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한 선생은 군사훈련을 받기도 했다. 의열단은 1919년 중국·만주 내의 한국인 민족주의자들이 비타협·폭력노선을 지향하여 만든 항일독립운동단체이다.
1920년대초 일제·매국노에 대한 암살·파괴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고, 이후에는 국외에서 민족협동전선과 유일당운동(唯一黨運動)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선생은 1921년 2월에는 런던으로 건너 가서 구미 열강국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원을 호소하는 외교활동을 벌였다.
1922년부터는 런던대학에서 상업·경제를 전공하고 1935년부터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선생은 수학기간 중 각종 집회를 개최하며 연설회를 통해 한국 독립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고취시켰다.
1944년에는 다시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외무차장에 임명되어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독립운동에 이바지하였다. 또 해방이후에는 주일한국대사(1949∼1950.1)를 지내기도 했다.
정부는 이런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엔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일본의 노예가 될 수 없다며 목숨 끊은 성리학자
솔잎으로 연명하다 순절한 조장하 선생


▲ 지방유림에서는 순절한 조장하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1949년 문의면 상장리 2구에 기산사를 세웠다.
조장하 선생은 1848년 청원군 문의면 상장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자는 경헌(景憲), 호는 이재(履齋)이다. 유학을 공부하여 충효를 평생의 신조로 삼았으며, 부모상을 당하자 6년 간 시묘살이를 할 정도로 효심이 지극했다. 또한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아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독서에 열중했으며 일찍이 임헌회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공부했다. 임헌회는 기의 우의를 주장하는 일원론적인 주기파에 속하며 주학을 극력 배격했던 조선후기 학자다.
조장하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가 이루어지자 이에 분노하여 일본의 노예가 될 수 없다며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식음을 전폐했고 솔잎으로만 연명하다가, 이 해 10월 27일 의관을 깨끗이 갈아입은 다음 단식을 결행하여 결국 자결 순국했다.
조장하 선생의 문집으로는 <이재집(履齋集)> 1권과 의(義)를 전하는 높은 절개를 읊은 <경술절범(庚戌節範)>등이 있다.
정부는 그의 충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했으며 선생의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구룡리 묘암산에 있다.
한편 지방유림에서는 순절한 조장하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1949년 문의면 상장리 2구에 기산사를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989년에 중건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통간 마루방에 3개의 쌍문을 달고 ‘기산사(箕山祠)’라는 편액을 걸었다. 마당 앞에는 삼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기산사는 청주에서 문의 방면으로 약 15㎞에 위치하고 있어 자가용으로 약 20분 소요된다.

경술국치란
일제침략으로 인한 국권상실과 강제식민지로 편입돼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침략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강제 편입된 사건이다. 경술국치(庚戌國恥)·일제병탄(日帝兵灘)이라고도 한다. 일제의 한국 침략은 1904년 러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본격화했다. 일제는 강압적인 무력을 앞세워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그해 8월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제1차 한일협약), 1905년 11월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정미칠조약)을 차례로 체결해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조치를 단계적으로 추진했다. 그외에도 군대해산과 신문지법·보안법 등을 제정하여 일제에 대한 저항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또한 1909년 7월 한국의 사법·감옥 사무를 일본 정부에 위탁하는 내용의 기유각서(己酉覺書)를 체결해 한국민의 저항을 제도적으로 막고자 했다. 1910년 3월 토지조사국을 설치하여 근대화란 미명하에 한국토지의 약탈을 준비했다.
1910년 5월 30일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寺內正毅]가 3대 통감(統監)에 취임하면서 한일합병은 급속도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그해 6월 30일 한국경찰제의 폐지를 결정하고, 일본헌병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헌병경찰제를 수립했다. 7월 12일 일본정부 각의에서 한국에서는 일본헌법이 아닌 초법적인 조치에 의해 통치할 것이며, 총독이 천황직속으로 전권을 행사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7월부터 한국 내에서 모든 옥내외 집회가 금지되었으며, 신문·잡지가 엄중한 검열을 받는 등, 한국은 사실상 계엄상태에 들어갔다. 8월 16일 데라우치 통감은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에게 합병조약안을 통보하고 밀모를 거듭했다. 그 결과 8월 18일 한국정부 각의에서는 합병조약안이 통과되었고,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되었다. 조약은 전문 8조로 구성되었는데, 조약문에서는 우선 한국에 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는 영구히 일본천황에게 양도한다는 것을 명백히 규정했다. 그리하여 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대치되고, 데라우치가 초대 총독에 부임했다. 이로써 한국은 조선왕조 건국 27대 519년 만에, 대한제국이 성립된 지 18년 만에 합병의 형식으로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제 총칼 앞에 돌멩이로 맞서다
의병 천성십 군수품 모집·총기수리·길안내로 항일투쟁


충북 청주 출생인 천성십(千聖十·1863∼1907.11.17) 선생은 의병으로 충북 청주와 충남 목천 등지에서 활동했다.
그는 구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직후인 1907년 9월경 조성여(趙聖汝)·김성관(金聖寬)·박반문(朴 文)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청주·청안(淸安)·목천 등지에서 군수품을 모집하고 의병의 무기 수리와 길 안내 등의 항일투쟁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9월 목천군 등지에서 군수품을 모집해 의병들의 총기를 수리해 줬다. 같은 해 11월에는 청주군 등지에서 군수품을 모집했다.
이후 같은 달 15일 오후 3시경 조성여, 김성관, 박반문 등과 함께 일본군 순사에 의해 체포되어 호송되던 중 함께 탈출했다.
추격하는 일본군 순사에게 돌을 던지며 강력히 저항하던 선생은 끝내 총에 맞아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 8월14일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교회전도사에서 항일무장운동 투사로 변신
만주 망명 이후 한인사회 자치 나선 최명수 선생


▲ 국한문. 만주독립국 통의부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최명수의 기념비 설립시 이시영(李始榮; 1868~1959)이 쓴 건립사이다.
최명수 선생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각종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주도한 독립운동가로 1895년 청원에서 태어났다. 호는 중산(仲山).
1907년 충남 목천 교회 전도사로서 청소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이시영·김동삼 등과 함께 경학사와 부민단 등 한인 단체를 조직해 재만 한인의 경제적 지위 향상에 노력하는 한편 독립운동기지의 건설에 참여했다.
부민단은 1912년 독립운동기지건설을 위해 조직한 자치기관이다. 서간도 지역인 퉁화에서 조직했으며 1911년 큰 흉년으로 경학사가 해산되고, 이듬해부터 망명 이주가 계속되자 그 해에 다시 조직한 단체다. 부민단은 ‘부여의 옛 땅에서 부여 유민이 부흥결사를 세운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부민단의 대외적인 사업은 첫째, 한인의 자치를 담당하고 각급 지방조직의 한인사회에서 발생하는 일체의 분쟁을 해결했다. 둘째, 중국인 또는 중국관청과의 분쟁사건을 맡아 처리하며, 셋째 신흥학교 등 한인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맡아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부민회가 대내적으로 추진한 최고의 사업은 모든 조직을 효과적으로 운영해 ‘독립전쟁론’에 바탕을 둔 각종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부민회는 회장 이상룡과 부회장 이탁 기외 각 지방에 총관을 두어 자치행정을 실시했다. 최명수 선생은 검무감을 맡았다.
이후 남만주에서 독립운동의 총본영으로 군정부가 조직되자 1919년 4월 류허 현, 퉁화 현, 싱징 현, 환런 현, 지안 현 등의 한인주민들은 부민회를 자치기관인 한족회로 개편했다.
최명수 선생은 한족회에 참여해 헌병과장·검무감 등으로 친일분자 처단에 앞장섰으며 서로군정서의 중앙의회 의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어 1922년에는 재만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되어 대한통의부를 조직하게 되자 검무국장에 선임돼 활동했다. 1924년에는 다시 길림주민회 대표로서 정의부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정의부가 조직된 후에는 검무감에 임명되어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했다.
1928년 8월에는 3부(三府) 통합 운동이 일어나게 됨에 따라 정의부 제5회 정기중앙의회가 개최됐는데, 선생은 민족유일당재만촉성회를 지지하는 중앙집행위원 이청천·김동삼 등과 함께 시국문제 토의 중 혼란이 일어나자 퇴장하게 됨으로써 3부 통합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후 1928년 국민부가 조직되자 간부에 임명돼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하다가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여 점령하자 이청천과 함께 상해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상해에서 활동하다가 1935년 2월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돼 인천을 거쳐 신의주로 압송됐으며, 결국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1951년 56세로 생을 마감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으며 그의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있다.

의용대 유격대원 적 경찰대 과감히 격퇴
서로군정서 의용대원으로 항일투쟁 중 순국 황영래 선생


충북 청주가 고향인 황영래(黃永來·1897∼1922.5)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서로군정서 의용대원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순국한 독립 운동가이다.
서로군정서는 국내·외에서 3.1운동이 거족적으로 전개될 당시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조직됐다. 1919년 5월 서간도 남만주 일대를 총 본영으로 설립된 무장독립운동단체이다.
원래 한족회의 산하단체로 출발해 처음에는 명칭을 군정부(軍政府)로 했다가 3.1운동을 계기로 상해 임시정부 파견원 안정근(安定根)과 김병헌(金炳憲)의 제의로 서로군정서로 확대·개편되었다.
1919년 5월 3일 서로군정서는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하여 독립군 간부양성에 주력했다. 이무렵 교장은 이세영(李世榮)이었으며, 연성대장(鍊成隊長)은 이청천(李靑天)이었다.
오광선(吳光鮮), 신팔균(申八均), 이범석(李範奭), 김경천(金擎天) 등은 교관으로 활약했다. 신흥무관학교는 하사관반과 특별훈련반으로 나누어 하사관 3개월, 장교 6개월, 일반 독립군 1개월 과정의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8월 현재 이곳에서 배출된 독립군수는 2000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예하부대로서 상해임시정부 직속의 의용군(義勇軍)을 편성하여, 국내에 있는 적기관을 파괴하고 친일분자·밀정 등을 숙청했다. 의용군은 뒤에 주만참의부(駐滿參義府)에 편입되었다.
서로군정서는 재만 한인의 경제문제에 특히 유의하여 농업을 장려하고 중국인지주와의 분쟁해결과 대중교섭상(對中交涉上)에서 재만 한인의 권익옹호에 노력했다. 또 민병제도를 실시하고 교관을 지방에 파견하여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황영래 선생은 일찍이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 의용대원으로 항일운동을 하던 중 일경에게 체포되어 1922년 5월16일 평안북도 강계 벌등진에서 피살됐다. 선생은 당시 적 경찰대를 과감히 격퇴하고 경찰관서를 습격하는 등의 항일투쟁을 벌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의병장으로 한번의 습격, 끝내 참살
청주 출신 의병장 박덕여


박덕여(미상~1908)선생은 청주 출신으로 1907년 12월 27일 충남 청양군 정산면을 습격한 의병장으로 충남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단 한번의 교전을 끝으로 1908년 2월 9일 충남 공주군 사곡면 원당리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 중 체포당해 저항하다 참살 당했다.
공주경찰서 ‘경시 령목중민 송정경무국장 앞 총기 탄약 발견의 건 보고’를 보면 ‘본월 십이일 순사 서광웅에 한순사 이명을 붙여 온양군 성동지방의 폭도를 수사 체포하려 향케 하였더니 동성동의 산록암혈내에서 화승총 오정 일본병 소용의 총환 오발을 발견했다. 우는 본월 십일일자 공경 제사칠일호로 참살을 보고한 폭도의 수괴 박덕여가 은닉해 두었던 것임이 분명하였으므로 이를 압수하였으므로 이에 보고함’이라고 명시돼있다. 박덕여 선생이 잔인하게 참살 당했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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