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에서 가장 확실하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대통령’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지나칠 정도로 가벼워졌다는 점이다. 외형의 쓰임이 그대로 내용으로까지 이어져 실제적인 권위의 실추를 가져왔는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대통령’은 어느덧 동네북이 됐다. 철없는 대통령후보에 업혀 정치를 넘봤던 어느 어설픈 여성방송인이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는가하면 현직 대통령을 ‘등신’ ‘푼수’등으로 묘사해도 과거처럼 국가원수 모독죄(?) 쯤으로 발언 당사자가 불이익을 당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노대통령이 재신임을 공언한 이후에도 ‘대통령’은 여지없이 치도곤을 당했다. 촌놈, 아마추어, 심지어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말이 반대파들의 사석에서 거리낌없이 나왔고, 비교적 친노무현 인사들의 입에서까지 거북한 말들이 쏟아졌다. 그 백미가 ‘비주류로 성장한 사람의 애정결핍증이 노무현을 사로잡고 있다’는 그럴듯한 진단이다.

그것도 크게 인심쓰는 척하며 노무현에게 한번 더 애정을 줘야 한다는 부연설명까지 달고 말이다. 이런 논리라면 현재 각종 여론조사에서 재신임 비율이 높게 나타나는 것은 순전히 우리 국민들이 어린아이에게 내보이는 ‘애정 표현’의 결과밖에 안 된다. 그래서 지금 노대통령에 대한 일부 호전된 여론이 결코 미덥지가 않은 것이다. 애정표현도 시간이 지나면 식상해지기 때문이다.

거대 보수언론이 재신임정국 초기에 히틀러 등 독재자를 악착같이 조명한 이유는 바로 이들 비주류 권력자들의 정서불안과 선동정치를 부각시켜 노무현을 깎아내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기자가 알기로는 노무현은 철저하게 주류를 지향하고 있다. 노대통령이 공사석에서 이런 질문, 예를 들어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물음을 당하면 거리낌없이 링컨을 입에 올린다. 노대통령도 학생시절엔 이런 상황에서 줄곧 김구를 거론했다. 그러다가 정치입문 후에 링컨으로 바꾼 것이다.

노대통령은 그 이유에 대해 어느 기고에서 장문의 변(辯)을 남겼다. “김구선생을 대할 때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존경할만한 사람은 왜 패배자밖에 없는가라는 의문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왜 패배했는가. 역사에서 올바른 뜻을 가진 사람은 왜 패배하게 되는가. 이런 질문은 ‘우리 역사에서는 정의가 패배한다’는 역설적 당위로 귀착되었고 나는 그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존경할만한 인물은 누구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해 인류가 부정할 수 없는 정의의 개념을 내세워 승리하고, 바른 역사를 이루어낸 사람이어야지 않을까… 그러한 사람이 바로 링컨이었다. 정의는 항상 패배한다는 것이 가당찮은 역설에 지나지 않도록, 진리를 대하는 사람들의 이중성을 깨끗이 씻어준 본보기는 김선생이 아니라 링컨이었다.”

 남북전쟁이 끝날때까지 엄청난 정적과 음해에 시달리면서도 결국 승리한 링컨은 후에 패배자인 상대까지 껴안음으로써 불멸의 성공한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다. 임기 1년도 안돼 재신임이라는 ‘올 인’ 승부를 벌이고 있는 노대통령의 목표는 바로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대선자금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로전이 난무하는 지금 오히려 정치개혁의 호기가 더욱 앞당겨질 수도 있다. 지금의 혼란은 정치인과 기업인 몇 명을 때려잡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사안이 아니다. 터널은 끝에서 비로소 햇빛을 받아들인다. 노무현의 대통령학이 본격 힘을 쓸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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