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부모가 자식에 대한 사랑을 접고 살겠는가만은, 우리네 삶 속에 드러난 자식 사랑은 특별난 구석이 있다. 엄동설한에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자식의 장래를 기원하는 고전적 방식으로부터, 아이들의 과외비를 벌기 위해 노래방 도우미로 나서는 현대판 모정(母情)에 이르기까지 자식에 대한 우리네 사랑은 가히 기네스 북 감이다. 때로는 그 지나침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오늘 이만큼이나마 살게된 배경에는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자리잡고 있다.

들판에 먼지만 풀풀 날리는 삼년 흉년에도 불구하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접지 못한 까닭은 자식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숱한 전쟁에도 삶의 끈을 놓지 못한 까닭 또한 자식에 대한 진한 정 때문이었다. 지금의 삶이 처절한 가난과의 고투이거나, 아니면 생사를 건 사투라 할지라도, 자식과 그 자식들의 미래가 희망으로 생각되는 한, 또 한번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나는 우리 삶의 질긴 원동력이 무너지는 소리를 도처에서 듣는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야 여전하겠지만, 그 사랑하는 자식들의 미래가 암울하기에 불안에 떠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격심해져 가는 경쟁사회 속에서 자식들의 미래를 희망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무슨 수라도 써보겠지만, 그 희망이 점차 요원해져 가는 것처럼 느껴지기에 허탈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오늘 도처에 들리는 소리는 ‘나보다 더 낫거라’ 보다는 ‘나만 만 하여라’라는 불안 섞인 절망뿐이다.

오늘 이 사회에 점차 만연해만 가는 불안과 절망의 원인은 ‘거대한 사다리’에 있다고 감히 단언하고 싶다. 종래 작지만 다양했던 사다리는 점차 사라지고, 서울을 향한, 명문대학을 향한, 의사나 변호사를 향한 사다리로 모여지고 뭉쳐지고 있다. 만약 이 사다리의 한 축을 잡고 정점을 향해 나가지 않는다면 그 앞에 놓인 것은 ‘사오정’(45세 정년퇴직)이라는 철퇴거나, 아니면 ‘오륙도’(56세 직장인은 도둑)라는 오명에 떠는 초라한 모습일 것이다.

자식들의 미래가 불안하기에 오늘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거대한 사다리’의 한 축에 올라타기를 강요한다. 아이들이 새벽에 나가 밤이 늦도록 공부하고 지쳐 돌아와도, 더 공부하기를 채근한다. 아이들의 과외비를 위해 봉급만으로 부족하여 부정한 돈에 연연한다. 내신 성적 1점을 더 올리기 위해 가까운 친구를 경쟁자로 돌릴 것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 대부분이 헛된 것임을 아는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요구되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의 꽃들이 모두 장미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이다.

그렇다고 오늘 이 사회에서 목격되는 불안이 무엇이 되지 못한 ‘가능성의 봉쇄’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생존 자체에 대한 불안에서 야기되고 있다. 그렇기에 오늘 이 사회에서 목격되는 불안은 처참하고 지독하다. ‘20 대 80의 사회’에서 20의 부분에 들어가는 것은 가능성의 영역이기에 희망이 있지만, ‘10 대 90의 사회’에서 10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의 영역이기에 좌절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곧 생존의 위협으로 쉽게 비화하기 때문이다. 오늘 이 사회는 적어도 생존의 위협이라는 점에서 ‘10 대 90의 사회’이다. 

‘90’에 속한 젊은이들을 돌아본다. ‘삼팔선’(38세 퇴직)에 전전긍긍하는 젊은 아빠의 고뇌와, 전공과 상관없이 서비스업종을 기웃거리는 공대생의 번민과, 답장오기만을 기대하며 이력서를 써대는 취업 지망생들을 보면서, ‘나보다 낫기’를 원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또 다른 고문임을 생각해 본다. 혹자들은 다음과 같이 물을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경쟁력을 지니라’고 말이다. 그러나 경쟁력만으로 재단하기에는 세상은 넓다.

경쟁력만으로 생존의 조건을 결정짓는 사회는 야만의 사회다. 적어도 문명사회란 힘의 논리가 아닌 정의와 평화의 논리가 적용되는 사회일 것이다. 사회적 약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회, 힘센 자와 약자간의 화해를 모색하는 사회, 그리하여 다양한 가치와 문화가 상존하는 사회가 문명사회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사회는 반문명으로 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길을 돌려 가을 들녘을 바라본다. ‘아름다움’만을 경쟁력 삼아 들판을 채울라치면 장미나 백합으로 온 세상이 뒤덮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가을 들녘은 이름 모를 야생초가 있기에 조화롭고 풍요롭다.

들녘의 풍요로움과 상관없이, ‘경쟁력’만이 미덕인 사회에서 경쟁력없는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나만 만 하여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다. 경쟁력보다 중요한 것은 무시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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