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선 CJB청주방송 PD

시사프로그램(라디오매거진 오늘)을 진행하면서 ‘큰 일’을 만날 때면 우선 난감하다. 하지만 대처가 빠르고 특히 사안 해결에 일정한 기여를 할 경우, 짧은 시간에 많은 지지자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우진교통 차고지 이전 문제에 대해 천착하며 주택공사 본부장과 우진교통 대표를 대면하게 해 해법을 찾았던 것도 이른바 큰 일을 해결해내는 시사프로그램의 입지를 다지는 한 과정이었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를 맞아 시사프로그램은 난감한 상황을 만나게 되었다. 노전대통령 서거 과정이 어려웠던만큼 어떤 입장과 목소리로 시민들의 생각에 주파수를 맞출까 고민했다. 여러 논객들의 입을 통해 고인을 추모하고 시민들의 의견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 논객들 가운데 전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 이문영 고려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이교수는 “늙어서 이메일 같은 것도 모릅니다”할만큼 노인이었다. 그러나 한마디 한마디가 확신에 차 있었으며 특히 고 김대중 전대통령을 기억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책을 읽는 것처럼 또렷했다. “후광선생이 하늘이 정하신 일을 다 하고 가셨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덜 언짢았다.” 이문영교수에게 김대중 전대통령의 숨은 업적을 들어볼 수 있었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45세되던 해, 지금부터 40년전에 이미 군사정부가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대안을 냈다. 대중경제론과 4대국 보장론이다. 70년대 전태일 열사의 분신사건이 날만큼 각박했던 현실을 반영해 경제를 아래에서부터 돌리자는 것이 대중경제론이었다.

또 남북한의 화해를 가져오기 위해 주변국 4대국이 보장해야 한다는 4대국 보장론을 얘기했는데, 현재 6대국 보장회의의 싹이 거기서 나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군사정부가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정책을 냈기 때문에 군사정부가 그를 박해하고 두 번이나 죽이려하고 또 그것 때문에 대통령도 되고 노벨상도 탈 수 있었다.

고 김대중 전대통령의 4년여 감옥생활은 모두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전적인 피해자였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이런 감옥생활 과정에서 유난히 적의 이성과 영혼에 호소하는 언어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탁월했으며 설득력이 있는 정치가가 되었다. 인생 역정 속에서 적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가 나왔고 이 과정에서 대중경제론과 4대국 보장론이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는 갑자기 민주주의를 하게 되었고 이것에 대한 반발로 갑자기 군사정부가 오고 여러 갈등과 아픔을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속에서 상대방의 이성이 납득하는 말을 하려고 노력한 정치가가 김대중 전대통령이었다.

1971년 48세에 대선에서 박정희에게 패배하고 1997년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26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것은 역사 발전에 이바지하는 방향으로 한국을 이끌려는 열망이 깃든 김대중 전대통령만의 특별한 권력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고인의 탁월한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김대중 전대통령의 인생역정은 한국사회에서 특별한 연고나 의지할 만한 배경없이 순전히 의지와 명분만 가지고 무슨 일을 성사시키려면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를 다시 깨닫게 해준다. 그만큼 한국사회가 고단한 사회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렇게 평생에 걸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큰 지붕으로 존재했던 고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적지 않다. 정치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의미가 클터인데, 세력규합이나 인맥 구축, 줄서기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일 것이다. 무릇 정치를 하려거든 우선 적의 이성과 영혼에 호소하는 언어를 만들어내는 능력부터 길러주시라. 그래야 정치가 더 이상 전쟁이 아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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