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DJP 연합정권’에 대한 충청권 안배 차원
김-시인이자 치과의사 재선 의원 ‘깜짝 중용’

▲ 국민의 정부가 발탁한 당시 충북출신 40대 장관들. 정우택 현 충북지사(왼쪽)와 김영환 전 과기부장관.
충북에서 인생의 반전을 이뤄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집권기간 동안 정우택 현 충북지사를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김영환 전 의원을 과학기술부 장관으로 발탁하는 등 도내 인사를 중용하는 것으로 성원에 화답했다.

물론 이 같은 인사를 지역 안배로 치부하는 것 자체가 편협한 시각일 수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40대에 불과했던 두 젊은이(정우택 49세, 김영환 47세)를 장관자리에 앉힌 것은 지금 생각해도 파격적인 배려의 인사였다. 현 정부 들어 거물급 지역인사들이 하마평에 올랐다가 줄줄이 배제된 것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정 지사와 김 전 의원은 모두 15,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진천이 지역구였던 정 지사는 당시 DJP연합 정권을 창출한데 따른 자민련 몫으로 입각했다.

이에 반해 새천년 민주당 소속의 김 전 의원은 괴산이 고향이고 청주고를 졸업했지만 경기도 안산에서 당선이 됐으며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이 분당될 때도 구 민주당에 남아 의리를 지켰다가 정치적 시련기를 겪기도 했다. 시인이자 치과의사라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 김 전 의원은 최근 현재의 민주당으로 다시 돌아와 오는 10월 안산 상록을 보궐선거를 준비하고 있다.

김 전 의원은 “조금만 더 사셨더라면 그 분이 가지고 있었던 통일과 화해, 민주주의의 완성과 관련해 더 하실 일이 많았을 텐데 너무나 애석하다”며 “한 시대가 저문다는 안타까움과 함께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는 찬사를 함께 바치고 싶다. 남과 북이 동시에 슬퍼할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정우택 지사도 김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해 “충격과 슬픔을 금할 수 없다.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의 큰 별이 졌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족들에게도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정 지사는 또 “선친(정운갑: 전 농림부 장관, 신민당 5선 의원)과 민주화 투쟁을 같이하며 각별한 인연을 맺었고, 일생을 바쳐 민주화와 인권, 남북관계 발전에 헌신한 분이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옥살이가 맺은 각별한 인연 줄줄이 화제
동갑내기 박학래 전 도의원, 망명시절 홍일씨 돌보기도
수감당시 강복기 교도관, 노벨평화상 수상식에 동행해

▲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수감됐던 1.75평 독방.
높은 자리까지 오르지는 않았지만 박학래 전 도의원도 김 전 대통령과 동갑내기로 오랜 인연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적상으로는 1922년생인 박 전 의원이 김 전 대통령보다 2살이 많지만 사석에서는 ‘우리는 개(임술생)여’라고 말하며 친구처럼 지냈다”는 것이 박 전 의원의 주장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김 전 대통령이 시련기에 있을 때 더욱 빛났다. 김 전 대통령이 청주교도소에 수감됐던 1980년 하루가 멀다 하고 면회를 다니며 옥바라지를 했던 것이다. 박 전 의원은 이에 대해 “여간 슬프지 않다. 그때 면회를 가면 주옥같은 얘기들을 들려줬는데 하나하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 광경은 주마등처럼 눈에 선하다”고 회상했다.

일제강점기 소년시절부터 목욕탕에서 화부로 일하며 자수성가한 박 전 의원은 서민대중을 위한 정치, 남북 화해에 대한 정치적 소신을 강조해왔다. 박 전 의원은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정치이념과 노선에서 지지했다. 뜻을 같이하면 동지가 아닌가. 김 대통령이 1982년 미국으로 망명했을 때에는 큰 아들 홍일씨가 8개월 동안 우리집에서 생활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이 신군부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고 청주교도소에 근무할 당시 담당을 맡았던 강복기 교도관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때 노르웨이 오슬로까지 동행하는 각별한 인연을 맺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전두환 신군부로부터 내란음모죄로 1981년 1월23일 사형을 선고받고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31일 청주교도소에 수감돼 다음해 12월23일 석방되기 전까지 교도소 8사 2호실의 1.75평 독방에서 무기수를 뜻하는 빨간번호표를 달고 23개월을 보냈다.

강 전 사무관은 김 전 대통령 수감 전 윗선으로부터 철저히 감시하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직원 6명을 데리고 팀장(주임)으로 투입돼 김 전 대통령과 만났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고문 후유증인 고관절과 허리 디스크 등으로 고생하면서도 단 한 번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혹독한 수형 생활을 견딘 김 전 대통령은 출소할 때 미안해하는 직원들을 오히려 격려해 주위를 숙연케 했다고 한다.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12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 위해 노르웨이의 오슬로를 방문할 당시 직접 강 전 사무관과 함께 갈 것을 제안했다. 강 전 사무관은 각계 대표 42명과 오슬로를 방문해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할 수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이 생활했던 독방은 2004년 환자수용관리 시설로 개조돼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강 전 사무관은 33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퇴직했다.

인동초 인생, DJ 추종은 곧 희생이던 시절도
선진당 이용희 의원 “애석할 뿐 더 할 말 없어”

인동초로 대변할 수 있는 김 전 대통령의 생애는 그와 함께 고독한 길을 걸어온 ‘DJ맨’들을 만들었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정치 환경은 그들에게 변절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주기도 했다. 사실 기나긴 야당시절 DJ를 추종한다는 것 자체가 삶에 있어서 희생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DJ의 오랜 동지였으나 지난 총선에서 자유선진당으로 말을 갈아탄 이용희 의원도 그 중에 하나다. 1973년 신민당 소속으로 9대 의원에 당선될 때부터 이 의원의 뒤에는 ‘DJ 골수’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이 의원은 17대 임기 말 당적을 옮겼음에도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5선에 성공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의원은 끝내 다른 길을 걷게 된 현재의 위치가 부담스러운 듯 “애석하다. 그러나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 특별히 할 말은 없다. 미안하다”고 짧게 답변했다.   

김현수 전 청주시장 역시 10,12대 국회의원을 지내는 동안에는 김대중 추종자였다. 그러나 14대 선거에서 정주영의 국민당후보로 이적했으며, 1995년 초대 민선 청주시장 선거에는 자민련 후보로 출마해 녹색바람을 등에 업고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끝내 당선의 영광을 안아보지 못하고 정치적 좌절만 맛본 비운의 인사들도 적지 않다. 1982년 미국 유학시절에 뉴욕에서 망명객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필한 인연으로 1992년 정계에 입문했던 장한량씨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1991년 DJ의 부름을 받고 귀국한 장씨는  두 차례 총선에 출마했으나 금배지와는 인연이 멀었다. 2007년 대선에서 무소속 이회창 캠프로 자리를 옮길 때 결국 장씨가 내세운 명분은 ‘이명박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서’였다. 

30대 초반인 1996년 당시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국민회의 후보로 청원지역 총선에 출마했고 2002년 대선 뒤 노무현 당선자가 택한 열린우리당 행을 거부하고 민주당에 남았던 뚝심의 정치인 김기영씨도 2007년 대선과정에서 한나라당의 문을 두드렸으나 입당조차 허락받지 못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김씨는 지난해 총선에서 자유선진당으로 재기를 노렸으나 공천을 받지 못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