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설악산 대청봉에 첫 눈이 내렸다고 합니다. 가을이 왔나보다 했더니 금방 또 겨울이 닥칠 모양이니 시간의 흐름은 참 무정하기도합니다. 그래, 옛 시인은 유수세월(流水歲月)이라, 세월을 흐르는 물에 비유했나 봅니다.

시절이 수상하니 세상 또한 뒤숭숭하기만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재 신임 국민투표 선언이 ‘핵 폭탄’이 되어 정국을 소용돌이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취임식이 엊그제였던 듯 싶고 임기를 4년이나 남겨놓고 있는 시점에서 재 신임을 묻겠다니, 누군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해득실이 다르기에 정당마다 아연 긴장하고 당황하는 모습들이 눈에 보입니다. “재 신임을 물으려거든 빠를수록 좋다”던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통합신당, 자민련 할 것 없이 각 정당들은 찬성에서 반대로, 반대에서 찬성으로 들쭉날쭉 당론을 바꾸면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론조사 결과 예상과는 달리 재 신임 찬성 쪽으로 기울자 모두 태도를 돌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같이 허를 찔린 듯 허둥대는 모양새가 어쩐지 딱해 보입니다. 한나라당이 재 신임이 될 경우 최병렬대표의 대표직 사퇴와 의원직 총 사퇴를 거론했다 당내 분란을 일으킨 것도 그중 한 예입니다.

노 대통령은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재 신임국민투표라는 ‘비장의 카드’를 던진 것 같습니다. 병서(兵書)의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 즉 ‘죽고자하면 살고 살고자하면 죽는다’는 이 구절은 전쟁에 임하는 군사의 결연한 각오를 이른 말로 임진왜란 때 왜적과 맞서 싸우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즐겨 쓰던 문장입니다.

바른 대로 말하자면 노 대통령은 지난 2월 취임이래 7개여 월 동안을 줄곧 고전을 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개혁을 내 걸고 출발은 했으나 거대야당이 점령한 국회에 서 무엇하나 뜻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사사건건 야당과 대립하는 상황은 곧 국회와의 대립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엊그제 국회 국정 연설 입 퇴장 때 기립박수는커녕 의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는 수모마저 당해야 했던 것도 노 대통령과 국회와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 좋은 예라 하겠습니다. 입이 가볍다는 핀잔을 듣긴 했지만 “대통령 노릇 못 해먹겠다”는 푸념은 인간적인 고초가 어떠한가를 짐작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느 하나 협력을 얻지 못하는 거대야당, 견원지간이 나 다름없는 막강한 보수신문들 앞에서 개혁은커녕 정상적인 국정운영마저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니 노 대통령으로서는 재 신임이든 무엇이든 돌파구를 찾아야했을 것입니다.

국민의 인기도가 하강 곡선을 긋는 가운데 측근들의 비리마저 불거져 최근에는 지지도가 10%대까지 떨어졌다고 하니 무엇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꺼내 든 것이 재 신임이라는 도박, 다시 말해 대통령직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승부수를 택했을 것입니다. 노무현다운 선택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그 마저도 뜻대로 될지는 미지수입니다. 재 신임이 될 경우 노 대통령에게는 만군(萬軍)의 힘이 실리겠지만 거꾸로 반대 정당들은 크게 타격을 입게 돼 국민투표에 응하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각 당은 어제 한 말을 오늘 뒤집으며 정략적으로 발을 빼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예나 이제나 3류 정치의 볼모가 되어 이렇듯 피곤한 삶을 살아야 하기에 말입니다. 대통령이고, 국회의원이고 뽑아 줬으면 손잡고 잘 들 할 것이지, 어쩌자고 부지 하 세월로 소모적인 정쟁을 되풀이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정치는 없고 싸움만 있는 아, 대한민국입니다.                                                                   /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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