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선 CJB청주방송 PD

베스트셀러 작가 김훈. 소설 <남한산성>에서 병자호란 당시 삶의 터전을 유린당하는 백성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군왕과 신하들의 이야기를 날이 선 묘사를 통해 머리가 쭈삣할 정도로 냉정하게 썼다.

몸을 던져 싸우자는 측도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화친을 해야한다는 측도 다 타당한 이유가 있었고 그때마다 군왕은 수긍하며 하루하루 산성에서 마지막날을 기다렸다. 당시의 국제적 정세와 동떨어진 조선 정부의 시대착오적인 사태인식의 부딪침을 묘사한 장면에서 독자들은 가슴 저릴 만큼 그 당시 지배세력의 패착에 대하여 통탄한다.

‘정축 원단에 남한산성 내행전 마당에서 조선 국왕이 북경을 향하여 명의 천자에게 올리는 망궐례(望闕禮)가 열렸다. 망궐례에는 임금과 세자가 무도를 거행하는 절차가 있었다...임금은 두 팔을 쳐들어 허공에서 원을 그리고 가슴 위로 거두어들이며 무릎을 꿇어 절했다...임금이 다시 일어섰다. 임금은 춤추었다...
성 안을 살피던 칸이 눈에 힘을 주며 찌푸렸다. 멀리 행궁마당에서 움직이는 것들이 보였다. 뭔가 펄럭거리는 것 같기도 했고, 사람들이 그 주위에 모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칸이 용골대에게 물었다.
-저것이 무엇이냐?
-조선 국왕이 무리를 거느리고 명을 향해 원단의 예를 행하는 것이옵니다...
대청 황제 칸이 이역만리 조선 땅에 와 일월성신의 신년을 영접하는 봉우리 아래에서, 갇힌 성 안의 조선 국왕이 명에게 예를 올리고 있었다...’

작가 김훈은 참으로 냉정하다. 청의 용골대의 칼날을 피해 남한산성에 칩거하는 조선 국왕에게 망해가는 중화 명을 향해 망궐례를 올리게 할만큼 냉혹했다. 남한산성 옆에 쌓은 망월봉에서 칸이 그 장면을 바라보게 할만큼 차갑도록 냉철했다.

최근 북한의 핵실험으로 촉발된 동북아의 위기 상황에서 6자회담이 정지되고 돌파구를 찾기 위한 움직임으로 한국은 이른바 5자회담을 제안했다. 별다른 반향 없이 지나갔나 싶었는데, 불과 얼마 되지 않아 흘러나온 이야기는 미국과 일본 중국이 3국간 정기회합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아직 성사된 회담은 아니지만 미국과 일본 중국의 3자 정례회담이 성사되면 우리의 뜻과 상관없이 한반도의 문제가 논의되거나 결정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갖게 한다. 남북한 문제는 의제에 올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회담 테이블까지 강제할 만큼 우리의 촉수는 뻗어있지 않다.

이런저런 소식들에 심란한 지경일 때 들려온 유한대 김영호총장의 이야기는 막연했던 의식에 죽비를 내리친다. 김총장은 번지점프 이론을 말해왔다. 번지점프를 하면 여러 번의 등락을 반복하는 것처럼 이번 경제위기도 여러 번의 등락 이후 본격적인 회복 국면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김총장 이야기의 핵심은 다름 아닌 공황을 극복하는 세계 경제 체제의 냉혹함을 지적하고 있다. 김총장은 대공황을 벗어나는 모습을 체제의 변화, 새로운 산업의 등장, 그리고 전쟁이라고 말한다.

즉 대공황에 대한 반성으로 수정자본주의가 대두했고, 대공황 말기에는 전자산업과 엔진기술부문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도래했으며, 대공황 후유증을 벗어나는 결정적 계기가 된 2차 세계대전을 들었다. 그러면서 지금의 위기를 진단한다. 지금 전세계적으로 수정자본주의 논의가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전쟁은? 상상하기도 끔찍한 일이지만 김총장은 마지막으로 전쟁을 언급하면서 한반도를 거론한다.

<남한산성>에서 청의 황제가 내려다보는 가운데 명이 있는 북경쪽을 향하여 망궐례를 올리는 조선의 군왕이야기는 <남한산성>에서만 만나야 한다. 지금 이 땅의 삶의 조건을 이끄는 방향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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