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갑진 괴산군 사리면 양민학살 유족회 고문

지난 3일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모래못 새터 입구에서 한국전쟁 당시 억울하게 숨진 국민보도연맹원 위령비 제막식이 열렸다. 사리면 양민학살 유족회(회장 이제관) 주최로 열린 이날 제막식은 합동위령제를 포함해 3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이날 사회를 맡은 윤갑진 고문(68)은 오랜 시간 힘든 내색 한번없이 진지하게 행사를 마무리했다. 지난 1년동안 유족회를 결성하고 위령비 제막의 산파역을 맡았던 윤고문은 79위의 영현 제위에 대한 탄식문을 읽으며 애써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사리면 유족회의 보도연맹 희생자 위령비 제막은 도내 최초의 사례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그동안 <충청리뷰>가 확인취재한 학살현장으로는 사리면 보도연맹원들이 죽임을 당한 북이면 옥수리 옥녀봉 골짜기, 오창면 양곡창고, 남일면 고은3구 분터골 등 청주권 주변에만 6∼7곳으로 최소한 2000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드러났다. 윤고문은 중학교 3학년 재학 당시 한국전쟁을 맞았고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던 고종 당숙 아저씨(故 우성택옹)가 군경에 끌려가 숨졌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됐다.

“8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홀어머님이 2남2녀의 형제를 어렵게 키우셨다. 어릴 적에 고종당숙 아저씨가 유난히 나를 아껴주시고 정을 주셨기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울었다. 당시 보도연맹이 뭔지 개념은 몰랐지만 어린 맘에도 아저씨의 죽음이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중 3때 당숙 아저씨 ‘부당한 죽음’

윤고문은 성장하면서 억울한 죽음의 배경과 실체를 알 수 있게 됐고 ‘언젠가는 내 힘으로 진실을 밝히겠다’고 다짐했다. 청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된 윤고문은 반공교육이 판을 치던 학교현장에서도 한국전쟁의 또다른 비극, 양민학살 사건을 학생들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내가 직접 겪은 당사자인데 뭐가 두렵겠는가. 민족상잔의 전쟁이 재발되서는 안된다는 각오와 함께 군경에 의한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도 얘기해줬다. 교직원들과도 대규모 양민학살에 대해 토론하고 왜, 정부에서 진실을 밝히려고 하지 않는지 안타깝다는 심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청주권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던 윤고문은 78년 서울로 인사이동됐고 먼 길따라 고향의 아픈 기억도 잠시 멀어졌다. 하지만 지난 2000년 2월, 45년간의 교직생활을 정년퇴임하면서 윤고문의 마음 길은 다시 고향으로 이어졌다. “92년에 동양일보에 보도된 보도연맹 학살사건 기사와 부산일보 기자가 쓴 ‘끝나지않은 전쟁-국민보도연맹’이란 책을 읽고 이제 나서야 할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작년 6월말 사리면에 내려와 후배들을 만나 의논하기 시작했고 4개월만에 유족회를 결성하게 됐다. 작년 10월 3일 결성식을 가졌고 올해 1주년에 때맞춰 위령비 제막식을 올린 것이다”

1년간 서울-괴산 오가며 추진

윤고문은 지난 1년동안 서울-괴산을 1주일에 한번꼴로 오르내렸고 경기도 금정굴, 경남 산청, 강화, 문경유족회 등 다른 지역 유족회 관계자들을 수시로 만났다. 또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전국 유족회, 충북 대책위원회 등 관련단체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사리면 유족회는 1차적으로 위령비를 건립키로 하고 성금모금에 나섰다.

“재경 사리면민회 곽덕근회장(백선종합개발 대표)께서 1000만원을 선뜻 쾌척해 주셔서 큰 밑거름이 됐다. 또한 유자녀들이 결속력을 보여 원만하게 성금모금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 연로하신 분들은 ‘아픈 상처가 아무는 상황에서 왜 되살리느냐’ ‘빨갱이들이니까, 죽인 거지. 왜 나서려고 하느냐’며 핀잔할 때는 정말 안타까웠다”

우익단체 ‘국민보도연맹’ 표기 반대

더구나 유가족 가운데서도 ‘잊혀진 일’로 치부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아 윤고문의 애를 태웠다. “지난 50여년간 남북 대치상황에서 반공 이데올로기가 뇌리 속에 박히다보니 심적부담을 떨치지 못하는 분들이 많았다. 심지어 위령비에 이름을 넣지 말아달라는 분도 있었지만 한분 한분 설득작업을 벌였다” 특히 상이군경회 등 지역의 보수우익단체에서 위령비 건립에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이들 단체의 반대로 지난 6월 25일 예정했던 제막식을 미루기도 했고 결국 ‘국민보도연맹’이란 용어를 쓰지 않고 ‘불법 민간인학살 희생자’로 표기하기로 했다.

1년간 끊임없는 이해와 설득으로 위령비 건립사업을 마친 윤고문의 끈기와 의지는 깊은 신앙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카톨릭 신자인 윤고문은 역사와 정의라는 사회 공동선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왔고 1남2녀의 성장한 자녀들도 지난 3일 제막식에 직접 참석하는등 아버지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서둘러야

“늦게나마 위령비를 세우고 위령제를 올린 것은 다행이지만, 자랑할 일은 못된다. 지난 53년동안 억울하게 숨진 분들을 잊은 듯 침묵하고 죽은 듯이 지낸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비는 자리였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관련 단체와 협조해 국회가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특별법을 서둘러 제정하도록 촉구할 방침이다. 과거를 잊은 국민은 미래가 없다, 과오를 밝히고 재발을 막는 것이 민족정기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승진을 염두에 두지않고 45년간 평교사로 봉직해온 윤고문은 제막식 자료집에도 본인의 이름을 넣지않을 정도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성품이다. 취재진의 인터뷰 요청에도 이제관 회장, 우형도·채수일 총무에게 공을 돌리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모두의 몫이지만 역사를 밝혀내는 것은 한 사람의 힘으로도 가능하다는 진리를 괴산 사리면 양민 79위 위령비가 웅변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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