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에서 주연으로 나선 이유는 시대적 여망”새로운 선거·정치문화 선도하는 견인차 기대

지금같은 여야의 끊임없는 정쟁은 되레 ‘희망’을 키우기도 한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이다. 실제로 선거 때가 되면 많은 유권자들은 이러한 새 인물들의 출현에 긴장된 기대감을 갖는다. 내년 17대 총선고지가 현재 5부 능선까지 드러내면서 점차 유권자들의 관심도 고조되고 있다. 이 때 덩달아 심한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치 신인들이다. 이들이 느끼는 설레임은 매년 연말이면 문학도들이 경험하는 이른바 신춘문예 신드롬과도 같은 것이다.

성취욕과 현실 사이에서 밤잠을 설치기 일쑤이지만 그들에겐 희망이 있다.
충북에서 내년 총선에 출사표를 던진 정치신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두드러진다. 정치개혁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와 개미군단 및 네티즌으로 상징되는 참여정치 문화의 확산이 부른 현상이다. 이중 일부는 선거 사무실까지 차리고 본격 활동에 들어간 반면 일부는 차기를 염두에 둔 ‘자기 알리기’ 행보에 나선 상태다. 이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다. 꼭 개혁이라고 단정하지 않더라도 정치와 선거문화의 변화에 대한 시대적 요구를 누구보다도 절감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기성정치의 두터운 보호막을 인식하면서도 감히 도전장을 내민 것은 이러한 변화에 대한 유권자의 ‘선택’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공정한 경쟁을 통한 페어플레이, 정당의 후보결정 역시 국민참여형 경선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신념이다. 때문에 총선에서의 당락 여부를 떠나 이들 보수정당 신인정치인의 선전과, 결과에 대한 깨끗한 승복이 현실로 나타날 때 충북의 정치개혁도 가능하다. 이러한 완벽한 명분에도 불구, 지금 이들에겐 어려움이 많다. 역시 현실 정치의 한계 때문에 자신의 상품가치를 알리는게 녹록치 않은 것이다. 언론에도 지엽적으로 소개되다보니 아직 유권자들에 멀게만 느껴진다.

내년 총선에 출사표를 던진 도내 정치 신인중에서 그동안의 사회활동과 정치적 신념, 그리고 인물 경쟁력 등에서 주목받는 인사들은 현재 10여명 안쪽. 김서용(40. 옥천) 박영호(39. 청주) 박재구(41. 제천) 성수희(39. 충주) 송태영(42. 청주) 유행렬(39. 청주) 정찬수씨(45. 제천. 이상 가나다순 ) 등이다. 이중 송태영 정찬수씨만 한나라당 소속이고 나머지는 모두 통합신당을 택했다. 이들 외에도 현재 활동하는 신인들이 있지만 출마의사가 분명치 않거나 일부는 ‘정치관’에 대한 시비를 일으키고 있다.

김서용씨는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언론에 자주 등장하면서 지역에 본격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전문위원을 맡은 이후 일찌감치 출마예상자로 지목된 것이다. 옥천중 대전고를 거쳐 서울대 사회복지학 석사를 취득한 후 박사과정까지 밟은 그는 이 분야의 전문가로 정치와 인연을 맺었다. 민주당 정책위원회 보건복지전문위원(94~96)으로 들어 가 당이 분열되는 ‘꼬마민주당’ 파동을 거쳐 보건복지위 김홍신의원 보좌관(96~99)을 지냈고, 2002년엔 보건복지부장관 비서실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성공회대 가톨릭대 이화여대 등에서 사회복지학을 강의하는 등 그동안 꾼준하게 강단에 서며 전공을 발휘하다가 지난 7월 개혁신당추진전국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음으로써 총선행보를 본격화했다. 김서용씨 하면 제천의 박재구씨와 함께 꼭 따라 다니는 것이 하나 있다. 지난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한국의 미래 제 3의 힘’의 창립을 주도한 것이다. 그는 창립준비위원장으로, 박재구씨는 사무처장으로 관여했다. 이 단체는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 학생운동을 주도한 인사들이 ‘새정캄를 모토로 결성한 것으로, 비록 신당창당으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으나 당시 정치권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송영길 우상호 허인회 오영식 이인영 김영춘 등이 핵심 멤버로 당시 386 바람을 일으키며 일부는 여의도에까지 입성했다. 이 때 활동을 같이 했던 다수가 현재 청와대 곳곳에 포진해 있다. 김서용씨는 청와대 법무비서관인 박범계씨와도 친구 관계다. 그가 내년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선 이용희씨(72)와 경선할 수 밖에 없는데, 지난 95년 지방선거 때 그는 충북도지사에 출마한 이용희 전민주당최고위원의 캠프에서 정책특보와 대변인을 맡은 인연을 갖고 있다. 지난 4월부터 지방에 체류하며 부지런히 자신을 알려온 그는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지 못하는 정치는 반드시 국민들의 고통을 수반한다”며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박영호씨에 대한 평가는 올 6월 민주당 사무직당직자협의회장 선거에서 76%라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사례에서 엿볼 수 있다. 당시 직능국 심의위원에 불과한 그가 쟁쟁한 간부들을 물리치고 당 사무직원의 대표로 선출된 배경엔 ‘당내 세대교체와 변화의 상짱이라는 이미지가 함축돼 있다. 87년 충북대 총학생회장을 맡아 학생운동을 이끌던 그는 졸업후에도 사회운동을 주도하면서 충북민주운동협의회 조직부장(89) 청주지역민주청년연합 의장(90) 민주주의민족통일충북연합 집행위원장(93) 충북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 집행위원장(95. 친일파 정춘수동상 철거) 한국청년연합회(KYC) 준비위원장(99) 등을 맡아 활동했다. 그러다가 99년 서울시 제2건국위원회 상임위원으로 발탁돼 다음해 새천년민주당 조직국 국제협력국 정세분석국 직능국 등에서 일하며 정치와 본격 인연을 맺게 됐다.

지난해 대선 땐 노무현캠프의 충북지역조직담당으로 나서 보수성향의 충북에서 노풍(盧風)을 일으키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청주 흥덕구 분구지역 출마를 전제로 지난달 24일 공식기자회견을 갖고 출사표를 던졌다. 정치뜻을 오래전부터 키워오며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정책과정을 수료하는 등 나름대로 오늘을 준비해 왔다. 그는 민주당이 신구로 나눠 갈등할 당시부터 ‘통합’의 정치를 줄곧 주창해 왔는데 지금도 대화와 포용의 정치를 여전히 강조하고 있다. “정치의 발전과 개혁은 신인들에 대한 문호가 활짝 열릴 때 가능하다. 과거 3김같은 인물 본위의 정치가 민주적 절차에 의한 시스템의 정치로 바뀌기 위해선 기성정치인과 신인들간에 인적교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내년 총선은 이를 시험하는 구체적 장(場)이 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한 후 당내 경선에 나서겠다”는 그는 통일분야와 복지분야에 각별한 관심과 식견을 가지고 있다. 청주에 중고등학교 학맥은 없지만 그동안의 폭넓은 사회활동에 힘입어 그야말로 ‘눈빛만으로도 서로 느끼는’ 동료들이 많은게 장점이다.

박재구씨는 전술했듯이 ‘제 3의 힘’으로 상징된다. 이곳 출신들이 386 바람을 일으키며 국회의원 배지를 달기까지는 사무처장으로 일한 그의 역할이 컸다. 이 단체의 실질적 창설을 주도한 그는 잠재된 개혁 정치인으로 주목받아 왔는데 지금도 개혁신당추진연대의 공보팀장을 맡아 통합신당 창당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한 때 공보처 전문위원을 맡기도 한 그는 특히 언론계 인맥이 풍부해 그가 속했던 각종 조직에서 대외 창구 및 해결사 역할을 도맡았다는게 주변의 평가다. 제천고 출신으로 식자들 사이에선 이미 이 지역의 차세대 주자로 꼽힌다. 연세대 핵생운동 출신으로 역시 이 학교 선배운동권 출신인 노영민씨(46. 전 민주당흥덕지구당위원장)는 “신념에 찬 합리적인 인물로 앞으로 큰 역할이 기대된다”고 추켜 세웠다. 충주고를 나와 세종대 총학생회장(88년)을 지낸 성수희씨는 신인답지 않게 지금까지 각종 정치행위를 지근거리에서 경험한 풍부한 전력을 갖고 있다. 91년 DJ의 외곽조직인 새시대새정치연합청년회(연청) 충청권 조직담당으로 정치에 본격 발을 디딘 후 95년부터 2년여간 민주당 충주지구당 사무국장 겸 정책실장으로 일했다. 95년 지방선거 땐 충주 제 1선거구에서 서른한살의 나이로 도의원에 출마해 주목을 받았다. 이후 국회 김상현의원 정책비서관(97~2000)과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원(2000)으로 정치활동을 이어 오다가 2000년 16대 총선에선 민주당 중앙선대위 청년위원회 부의장으로 각종 선거과정을 총체적으로 경험했다.

2001년 한 때 민주당 충북도지부 민원국장을 맡기도 했던 그는 대선전 노무현상임고문 보좌역에 이어 대선 땐 노무현캠프의 국민참여운동본부 대외협력팀장으로 일했다. 스스로 벤처기업을 창업, 운영하기도 했던 성수희씨는 지난 13일 충주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17대 총선출마를 공식화했다. 현재 ‘함께 사는 충주만들기’ 정책포럼을 조직해 활동에 박차를 가하며 동조자들을 규합하고 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 열세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인터넷혁명으로 상징되는 국민참여형 선거가 정착되면 분위기는 달라질 것이다. 돈으로 승부하는 동원정치는 이젠 끝내야 하고 이를 위한 초석을 다지고 싶다”고 말했다. 주변에선 그의 ‘기획력과 성실함’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데 최근 신당 관련 각종 집회에서도 사회를 맡음으로써 크게 어필했다.

한나라당 부대변인을 맡고 있는 송태영씨는 공채출신 당료로, 충북고와 충북대를 나왔다. 역시 청주 흥덕구의 분구지역을 노리고 있다. 청주로 내려와 본격 총선활동을 시작할 계획으로 현재 이사를 준비중이다. 89년 민정당 공채로 들어 가 정책부장, 의원·의사부장, 보건복지·노동위 심사위원, 국회정책연구위원, 미래연대 운영위원을 맡아 정치를 두로 익힌 후 지난 대선 땐 이회창후보 대변인행정부실장으로 선거 일선에서 일했다. 이후보의 공보 실무책임자였던 것이다. “이젠 정치도 생산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변하는 그는 생산성과 전문성, 열정 패기 등이 중시되는 미국정치에 특히 조예가 깊다. 실제로 현지에 건너 가 이런 관점에서 선진정치를 익히기도 했다. 그는 “과거처럼 명망만 갖고 국회의원이 되는 시대는 끝났다. 우리나라에서도 역할로써의 정치가 중시돼야 하고 그래야만 정치개혁도 가능하다. 선진국의 의원들이 의사당 주변에 셋방을 얻어 놓고 불철주야 의사당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모습을 우리 국회에서도 볼수 있어야 한다. 한나라당엔 30대 의원이 다섯명이나 있을 정도로 많이 변해가고 있다. 그 변화의 중심에 서고 싶다”고 기염을 토했다.

송태영씨는 최근 원외 인사로는 유일하게 양길승 몰카사건 진상조사단 위원으로 활동,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청주에 내려와 조사활동을 벌일 때도 동행했었다. “유권자들의 상황인식이 많기 변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는 그는 총선 출마에 누구보다는 강한 의욕을 보였다.

유행렬씨는 줄곧 지역에서 활동한 토종 정치인으로 상징된다. 아울러 학생운동 출신으로 사업에까지 성공한 후 정계에 입문한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그는 지난 89년 본의 아니게(?)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 해 대학의 학생운동 주체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3기에 속해 있던 충북대 총학생회가 전대협을 전격 탈퇴함으로써 대학가에 파문을 던졌다. 결국 당시 총학생회 집행부는 탄핵을 당했고 유행렬씨가 보궐선거를 통해 총학생회장에 당선됨으로써 유명세를 탄 것이다. 그는 충북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충대협) 의장까지 맡아 실추된 충북의 이미지를 다시 곧추세우는데 성공했다. 그후 사업에 몰두하다가 지난해 도의원 선거 출마를 계기로 정치활동을 본격화했다. 지난 5월부턴 신당창당을 전제로 한 충북정치개혁추진위 집행위원과 간사를 맡아 두각을 나타냈고, 현재 청주 흥덕구 분구를 겨냥해 출마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의 장점은 지역연고가 가장 확실하고 정치적 신념이 분명하다는 것. 지역에서 자라고 학교를 나와 사업도 이곳에서 일구며 정치꿈을 키워 왔다.

그의 정치적 신념을 시사하는 상징적 사례가 있다. 86, 87년 학생운동으로 구속된 유행렬씨는 청주교도소에서 김민석씨를 만난다. 두 번이나 감방동기가 된 것이다. 누구보다도 서로 각별해야 할 관계이지만 그는 김민석 전의원이 민주당 서울시장후보로 나설 당시 반대 논리를 강도높게 주창했다. 그의 판단으론 ‘절대 서울시장이 되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유행렬씨는 “무슨 특별한 사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 때 감옥에서 만났지만 그렇다고 각별한 관계도 아니다. 다만 교도소 생활을 같이 하며 옆에서 지켜 본 결과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 전의원은 지난 대선 때 민주당을 전격 탈당, 정몽준 캠프에 합류하는등 그동안 줄곧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정계에 큰 파문을 안겼다. 유행렬씨는 청주 하나로마트에서 순수 우리밀빵을 전문제조, 판매하는 ‘들꽃세상’을 운영하며 사업에서도 수완을 보여 왔다.

제천 출신인 정찬수씨는 얼마전 제천-단양 지구당 조직책 선정을 놓고 최병렬대표와 담판을 벌임으로써 한꺼번(?)에 유명세를 탔다. 중앙당이 자민련을 탈당한 송광호의원으로 결정하자 경선을 무시한 처사에 항의하며 당사에서 1인 단식농성으로 배수진을 친 것. 결국 최대표로부터 조직책선정과 후보공천은 별개라는 약속을 받고서야 농성을 풀었고, 현재 지역구 활동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당시 그가 요구한 것은 세가지. 구태정치인을 영입한 것에 대한 공식 철회 및 사과와 송의원이 조직책 선정과 함께 공천까지 내락받았다는 소문에 대한 당의 입장 천명, 그리고 일련의 처사로 당을 지켜 온 사람들이 희망을 잃은데 대한 대표의 공식입장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최대표는 “조직책 인선과 후보공천은 별개의 문제이니 지역에 내려 가 열심히 인지도를 넓혀라. 총선 승리를 위해서 정치 신인들을 많이 등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대해 부대변인직을 맡고 있는 정찬수씨는 “대표의 약속인만큼 반드시 경선을 통해 후보를 결정할 것으로 안다”며 인지도 높이기에 열심이다. 그는 “조직책 선정을 앞두고 중앙당이 여론조사를 했는데 인지도에선 87%대 19.8%로 절대적 열세였으나 선호도에선 30% 대 15%로 근접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인지도는 활동으로 넓힐 수 있지만 선호도는 안 그렇다. 공정한 경쟁만 보장한다면 나같은 정치신인들도 얼마든지 웅지를 펼 수 있고, 이걸 요구했던 것이다”고 말했다.

지역정가에선 정치인으로서의 용기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제천 의림초를 나와 제천중 재학중에 전학한 그는 대신고를 거쳐 외대에서 정치학 석사까지 취득했다. 정재문의원 보좌관을 거쳐 지난 대선 때 이회창후보 공보보좌역으로 일했으며 현재 ‘자유를 위한 행동’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현역의원을 비롯한 원외와 당료들이 대거 속한 이 단체 회원 30여명이 내년 총선에 출마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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