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표 사회문화부장

지금부터 13년 전 나는 수습딱지를 단 초년 기자였다. 청주불교방송에 원서를 내 합격증을 받았지만 그 당시는 아직 개국 전이라 서울에서 6개월 수습과정을 마친 뒤 생각지도 않은 본사근무를 해야 했다.

처음으로 목소리가 방송을 탄 그해 초여름에 선배들이 ‘입봉을 했다’며 술을 샀는데 솔직히 지금도 입봉의 어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아마 적당히 국적이 세탁된 일본말이 아닌가 싶을 뿐이다.

그러나 심혈을 기울여 제작된 입봉작의 내용은 지금도 생생하다. 단 몇 분짜리 보도에 일주일은 족히 투자했으니 말이다. 지금은 중학교 과정이 의무교육이라 중학교에서 사실상 퇴학이 사라졌지만 당시엔 퇴학 없는 학교가 기사거리가 되던 시절이었다. 서울 무슨 중학교를 찾아갔는데 어느 학생부 선생님을 밀착 취재하게 됐다. 퇴학 없는 학교를 만든 주인공이었다.

그 선생님의 얘기인 즉 “문제아(?)와 함께 탁구를 친다. 아이에겐 힘껏 스매싱을 하라고 시키고 나는 계속 받아만 준다. 20분만 지나면 아이의 눈에서 독기가 사라지고 선한 눈빛이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탁구실력이 만만치 않았던 선생님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또 “아이에게 운동장 구보를 시키면 나도 함께 뛴다. 필요하면 가끔 매도 든다”고 말했다. 그런데 압권은 이 독특한 선도방식의 대단원이었다. “마지막 날에는 아이와 함께 월미도 같은 데로 여행을 다녀오고 집에 데려와 함께 잔다. 함께 소주를 마시면서 흉금을 털어놓고 대화를 나눈다…” 감동에 빠진 나는 취재원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했고 당시 입봉작의 초점은 이 전교조 선생님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청주에서 발생한 모 전문계 고등학생의 자살사건을 보며 그때 그 선생님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학생이 본분을 지키며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선도하려는 선생님의 마음은 부모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하나, 둘 밖에 되지 않는 자녀교육도 버거워하는 것이 요즘 세태이다 보니 ‘선생님들이 느끼는 고충은 어떨까’하는 생각도 든다.

억지로라도 틀을 잡지 않으면 무너질 정도로 교육현장이 황폐화됐다는 것도 솔직히 인정한다. 한 두 명이 5~10분 지각하는 것을 눈감아 주다보면 대다수가 이를 어겨도 통제할 명분이 없다는 것도 수긍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준점이 어디에 있냐는 것이다. 아이들을 선도하는데 사랑을 빼면 교육도 없다는 얘기다. 아무리 ‘위협용’이라지만 학교에 진술서나 자퇴서약서 수준의 각서가 있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자퇴서약서의 유효기간을 ‘졸업할 때까지’로 명기한 것은 ‘문제아로 낙인찍고 감시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 각서에 보호자의 서명을 받아오라고 했다니 이는 가혹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이를 단 한 명의 학생도 탈선하지 않게 만들겠다는 의욕으로 봐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넘지 말아야할 금은 어떻게 긋는지 묻고 싶다.

뺨을 맞는 것으로 시작해서 발길질이 날아오고 수업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려 더 이상의 매를 모면한 과거가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그 와중에 퍼뜩 ‘종이 살렸습니다’라는 복싱 캐스터의 중계멘트가 떠올라 속으로 웃었던 기억도 난다.

그래도 그때는 진술서나 각서는 없었다. 극단적이지만 가슴 졸임과 수치심, 두려움에 오그라드는 심적인 고통보다는 ‘차라리 몸으로 때우는 것이 낫다’고 말하게 되는 지금, 가슴 한끝이 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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