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영 사회문화부 기자
공공미술을 둘러싼 논란은 언제나 뜨겁다. 공공미술은 과거 소위 1%법에 의해 개인건축주나 공공건물 앞에 조형물을 설치하는 것에서 벗어나 지역민의 삶 속으로 파고드는 행위적인 활동까지 다양한 영역을 확보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공공미술은 조각에 가까운 작품이든지, 행동에 가까운 것인지 관해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어 보인다.
그래서 공공미술은 지금 미술계의 ‘뜨거운 감자’이자 ‘논란의 생산처’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은 어쩌면 미술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속성 때문일지 모른다. ‘미술(예술)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명제는 그럴 듯하지만 실제는 재정적 지원에서부터 시민들의 인식까지, 이른바 기반이 닦아져야 비로소 가능한 꿈이다.
가령 공공 조형물의 주인이 누구이냐를 놓고 봐도 지금까지의 인식은 건축주나 관공서 즉 발주처의 미술품으로 인식되기 일쑤였다. 그러다보니 정작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만든 조형물을 건축주가 눈에 띄지 않는 후미진 곳에 숨겨두기도 한다. 작가 또한 조형물이 놓이는 장소에 대한 역사성 및 지역성을 반영하기 보다는 대개 개인작품을 설치하는 것으로 끝난다.
‘로또’ 보다 당첨되기 어렵다는 공공기관이 발주한 공모사업에는 전국의 조각가들이 도전하지만 공모결과를 두고 이래저래 말이 나온다. 공모 절차를 투명하기 위해 전문가들을 3배수 추천받고, 응모자들이 심사위원을 무작위로 선발한다고 하지만 이미 전문가 선정과정에서 협회에 공문으로 의뢰하는 구조이다 보니 말이 새나갈 수밖에 없다. 또한 선정된 이후로는 선정 작품의 유사성 논란에 휩싸이기도 한다.
최근 영동 노근리 위령탑과 청원군 충혼탑의 경우도 결국 ‘작품의 유사성' 논란의 핵심이다.
다만 이번 문제가 특이한 점은 다른 작가의 작품을 베낀 것이 아닌 자기 작품을 베낀 것이 아니냐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동일 작가의 2개의 작품이 전혀 다른 역사성을 띤 공간에 각각 놓이는 셈이다.
이를 두고 논란의 주인공인 이창수 조각가는 항변했다. 개인의 작품에 나타나는 스타일을 모작으로 몰고 간다면 어떤 작가도 창작활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알렉산더 칼더를 보라고 말한다. 철을 소재로 모빌처럼 표현한 알렉산더 칼더는 ‘움직이는 조각’의 창시자이며 전 세계에 공공조형물을 만들어놓았다.
물론 여기에는 칼더 만의 동일한 패턴이 보인다. 또한 루이스 부르조아의 일명 ‘거미’작품은 전 세계에 뿌려져 있다. 영국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 일본의 모리미술관, 삼성 리움 미술관 앞 등등에 자리 잡고 있지만 그의 작품에 ‘유사성’을 운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알렉산더 칼더는 모빌, 루이스 부르조아는 곧 거미라는 이꼴 부등호를 쉽게 그리면서도 이창수 조각가의 작품은 노근리 충혼탑내지 오창 위령탑으로 말하기 꺼려지는 이유는 뭘까. 이는 공간에 담겨진 무거운 역사적인 사실과 진실 때문일 것이다. 미술관 앞에 놓인 거미는 이해가 되지만, 노근리나 오창에 놓인 거미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와도 같다.
조형물 안에 역사성과 지역성을 담는 것은 미술계의 끊임없는 논쟁꺼리이자 요원한 과제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논란은 이제 아이러니하게도 미술계가 아닌 법정에서 가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