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식 시인, 흥덕문화의집 관장

왜일까. 그만큼 아파했고 그만큼 분노했는데 왜 이리도 차분할까. 500만 이상이 조문하고 서울 시청 광장에 50여만 인파가 몰렸는데도 울음소리만 하늘에 퍼지고 손엔 노란 풍선만 들려 있었지 몰려 어딘가에 가서 항의집회도 하지 않았다.

곳곳에 경찰력이 동원되어 추모인파를 짓밟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소극적 항의를 할뿐이었다.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고 길에 엎드려 엉엉 울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좀 더 잘해줬어야 했는데, 그를 지켜줬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한 그 무력감이 아직 가시질 않고 있다. 국민들이 너무도 좌절하여, 너무도 슬픔이 커 더는 어쩌지 못하는 것인가.

그간 우리 국민은 어려운 시기에 민주화와 경제 발전의 기틀을 잡아왔다. 독재체제와 아이엠에프 경제 환란을 극복하며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놀랄 정도로 국민들의 힘을 보아왔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통해 그 어떤 정권과도 비교할 수없는 국민들을 위한 정책이 이루어지고 복지정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국민들 간 양극화의 심화는 상대적 박탈감을 심화시키고 남들보다 잘살기 위한 경쟁을 부추겼다. 이명박 정권의 탄생은 이 과정에서 국민들이 선택한 메피스토펠레스와의 계약이었다. 자기의 영혼을 팔아먹은 것이다. 그리고 작년 5월 광우병 파동 당시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은 전국적 들불처럼 일어났지만 그 것은 어쩌면 이제껏 이룩되어진 민주화의 과정이 현 정권하에서도 크게 훼손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 순진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이루어진 것은 철저한 민주주의 말살정책이었고 독재정권으로의 회귀였다. 국민들은 기가 막혔고 말이 안 나왔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싸워야할 야당과 지난 민주화의 세대들은 이미 보수화 되어 있었고 젊은이들조차 생존경쟁에서 밀려 생각이 없는 세대가 되어있었다.

언론과 방송은 이미 장악되어 앵무새 소리만 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현 정권과 언론과 국민들은 자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희생양으로서 노무현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죽음을 앞에 놓고 자기 회한과 무기력감,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길에 대한 죄책감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지금 국민들은 슬픔과 자기원망의 표현을 눈물로 할 수밖에 없다. 가슴속 응어리진 그 무엇을 지금 당장에 풀기란 맺힌 것이 너무 큰 것이다. 국민들은 이에 대하여 누군가 책임지어야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칫 자신이 악마하고 계약한 사실을 망각한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자기만족을 이루려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처절한 자기반성이 전제 되지 않은 그 어떤 눈물도 자기기만인 것이다. 이것을 풀기 위해서는 우선 더 많은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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