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권 / 전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

급보를 듣고 봉하로 달려갔다. KTX를 타고 내려가는 내내 이 상황이 지금 현실일까, 믿어지지 않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봉하는 이미 전국에서 달려온 사람들로 들머리부터 채워져 있었다. 그들은 조문객이되 조문객이 아니었다. 대통령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대통령의 죽음을 기꺼이 애도할 마음의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대통령의 죽음이 믿기지 않아 황망하게, 무조건 달려온 사람들일 뿐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택시에서 내려 봉하 초입에서 마을까지 걸어가는데, 하얀 찔레꽃과 모내기를 기다리는 널따란 논이 눈에 들어왔다. 퇴임 이후 가장 낮은 자리에서 농부가 되고 싶었던 대통령은 정작 한해 농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모내기를 앞두고 이승의 삶과 함께 농부의 꿈을 접고 말았다. 찔레꽃은 농부를 꿈꿨던 한 사람의 갑작스런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조화인지도 몰랐다.

대통령은 임기 후반부, 이런 말을 자주했다.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세상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 대통령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많은 것 같지만 별로 없다. 결국 가치를 지향하는 시민들의 흐름이 만들어져야, 모든 사람이 바라는 ‘사람 사는 세상’을 이룰 수 있다.

대통령은 봉하라는 작은 마을에 살면서, 당신이 가능한 영역에서 가치를 지향하는 시민들의 흐름을 만드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봉하의 주민들과 친환경 농사를 짓고, 화포천과 봉화산을 다니면서 쓰레기를 주었다. 책임과 대안의 토론문화를 만들기 위해 ‘민주주의 2.0’ 게시판에 직접 발제문과 댓글을 써 올렸다. 대한민국이라는 수레를 떠받치고 나아가게 하는 두 개의 바퀴,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 한국미래발전연구원을 만들고 참여했다. 대통령은 이미 청와대와 여의도라는 그들만의 무대에서 벌어지는 정치를 오래 전에 뛰어 넘었다.

하지만 뭐의 눈엔 뭐밖에 보이지 않은 모양이다. 정권과 검찰과 수구언론, 그들은 대통령을 사사건건 의심하고 공격했다. 의심할 수 없는 일조차도 이들 셋이 모이면 음모와 범죄가 됐다. 의심만으로 검찰을 동원해 표적수사하고, 그 의심을 사실인양 확정하고 부풀려 여론을 만들고, 마침내 모든 의심의 악령들을 동원해 사지로 내몰았다. 이로써 악령들은 그들의 잔인한 숙원을 완성하게 됐다. 그들은 지금 악어의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와 화해를 말하고 있다.

지금 봉하를 중심으로 서울, 부산, 광주, 대전 전국 각지에 애도의 물결이 강을 이루고 있다. 이 강의 물줄기가 어떻게 큰 강과 만나 어느 바다에 이를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점점 많은 사람들이 악령의 주문으로부터 풀려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 눈으로 보고 제 귀로 듣고 제 머리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곧 제 입으로 말하고 제 몸으로 행동할 것이다.

대통령은 끝내 행복한 농부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잠들었다. 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대통령은 지금 온 나라를 가득 메운 애도의 물결이 ‘가치를 지향하는 시민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역사를 지하에서나마 지켜보게 될 것이다. 그때쯤이면 봉하의 빈 논에도 잘 익은 나락들이 황금빛 물결을 이룰 것이다.

*백승권은
괴산에서 태어나 충북에서 성장했으며
미디어오늘 기자로 일하다가
1999년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
2005년 11월 청와대 행정관으로 발탁됐다가
노무현 정부와 임기를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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