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빛이 영롱합니다. 비가 자주 온 탓에 연일 하늘은 맑고 뭉게 구름 또한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9일이 한로(寒露), 24일이 상강(霜降)이니 시절은 미상불 가을 이 분명합니다.

독일의 시인 R·M 릴케는 ‘주여,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하였습니다’라고 ‘태평가를 불렀지만 우리의 올 여름은 위대하기는커녕 참담함,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태풍과 폭우라는 자연재해가 너무나 혹독했기에 지금 동절기를 앞둔 수재민들의 시름은 절망 속에 깊어만 갑니다.

백년하청, 도대체 끝이 보이지 않는 우리 사회의 혼란은 이제 이라크 파병을 놓고 또 한차례 파동을 예고합니다. 아니, 이미 파병을 반대하는 진보적인 단체들과 파병을 지지하는 보수단체간의 대립이 격화되고있고 국민여론마저 둘로 갈려 있는 형국이니 올 가을은 설상가상 또 한바탕 몸살을 앓을 수밖에 없을 듯 합니다.

파병, 파병하니까 지난 60, 70년대의 월남파병이 떠오릅니다. 40년이나 된 일이지만 5천년 우리 역사 상 처음 있었던 해외출병이었기에 기억 또한 새롭습니다.

애초 월남전은 미국의 아시아방위전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월맹과 월남이 남북으로 갈린 상황에서 월남이 적화(赤化)되면 동남아시아가 적화된다는 소위 도미노이론(장기놀이처럼 한 국가가 쓰러지면 옆의 다른 나라도 차례로 쓰러진다는 이론)에 따라 미국이 일으킨 전쟁 이였습니다.

한국의 월남 파병은 64년 7월부터 73년 3월까지 8년 8개월 동안 이어져 연 병력 31만 2853명이 이국 땅 열하(熱夏)의 정글에서 전쟁을 벌였습니다.

당시에도 파병의 명분은 ‘국익을 위해서’라느니 ‘6·25때 받은 미국의 은혜를 갚는다’느니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구실을 내세웠지만 그러나 진짜 이유는 미국의 압력을 거절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야당의 반대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월남 파병은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선 경제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 첫 손가락에 꼽혔고 안보체제의 구축, 전쟁경험을 통한 전술의 습득, 국제유대 강화와 국위선양이 성과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와는 적대관계가 아닌 나라와 전쟁을 치른다는 점에서 명분 없는 대리전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고 미국의 용병(傭兵)이라는 비난마저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전쟁에서 꽃 같은 젊은이 5066명이 전사했고 1만 6000명이 부상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말이 5천명이지 5천명이 적은 숫자입니까.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던 월남전은 융단 폭격으로 1일 1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달러를 쏟아 붇던 미국이 1974년 4월 30일 백기를 들어 월맹의 승리로 끝이 났고 베트남은 민족통일을 이루었습니다.

결국 베트남민족 내부의 문제를 미국이 관여함으로서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된 월남전은 2차 세계대전이후 최대의 전쟁이 되어 남북 베트남국민 120만 명이 희생 됐습니다.

월남전은 40년 전의 과거사가 되었지만 그 상처는 아물지 않고 아직도 깊게 패어있습니다. 월남 땅 곳곳에는 ‘한국인의 잔학상을 잊지 말자’는 섬뜩한 기념비가 지금도 그대로 꽂혀 있다고 합니다. 그들 국민들의 한국에 대한 원한이 어떤가를 짐작케 합니다.

노년에 접어든 당시의 파월 용사들은 전쟁의 악몽과 고엽제 등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고있는 것 역시 우리의 현실입니다. 5천여 원혼들이 이국 땅 산야에서 구천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 또한 수많은 유족들의 가슴에 한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전쟁은 최후의 수단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최선의 선택은 아닙니다. 이라크전쟁은 미국의 억지논리만 있을 뿐 명분도 없고 합리성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전쟁터에 우리의 아들들이 목숨을 걸고 또 가야 한다고 합니다.

국론을 모아야 합니다. 나만이 옳다고 침을 튀길 것이 아니라 앞을 내다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판단이 어려울 때일수록 중지를 모으고 신중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솔로몬의 지혜’입니다. 
                                                                     /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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