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을 떠나며

공항에는 도착할 때처럼 많은 사람들이 환송을 나와 서 있었다. 치마저고리와 양복을 입고 손에는 모두들 붉은 진달래꽃 조화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연신 꽃을 흔들며 ‘조국통일’ ‘민족자주’ 등을 외쳐댔다. 도열해 서 있는 긴 행렬의 끝에 이르니 거기엔 인민학교 아이들이 서 있었다. 그런데 이 어린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통일 되어 다시 만나자고 하는 것이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손을 흔들고 서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다가가 꼭 안아 주었다. “그래 다시 만나자.” 이렇게 말을 하다가 나도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런데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이 아이들을 품에 안으면서 팔에 느껴져 오는 잘록한 허리, 헐렁한 어깨 때문이었다. 옆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자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다가 결국 펑펑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동안 잘 참았는데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비행기를 타려고 돌아서다가 다시 눈물이 나고 손을 흔들다가 또 눈물이 쏟아졌다. ‘여기 남아서 잘 크거라,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 없지만 잘 자라야 한다.’ 속으로 그런 말을 하면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내 주위의 많은 이들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임수경이 “어서 가세요, 가면 또 잊고 살게 되어 있어요.” 그런다. 그럴 것이다.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아서 이렇게 몇 십 분씩 서 있지만 가면 또 잊고 살 것이다. 남쪽의 자본주의적인 삶에 묻혀 하루하루를 바쁘게 쫓기며 살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더 가슴이 아픈 것이다.
그러다 차라리 빨리 수속을 끝내고 비행기에 올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 때문이었다. 저렇게 땡볕 속에서 울면서 손을 흔들게 하고 세워두는 것이 벌을 세우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순하고 소박한 얼굴의 아이들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볕에 그을려 검게 타고 마른, 그렇지만 참 욕심 없게 생긴 다른 환송객들도 너무 고생을 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했다. 기내에 들어서니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신문을 펼쳐 들고 있다. 그리고는 말없이 신문을 읽어나가고 있었다. 그동안 신문이 어떻게 보도하고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았다. ㅈ일보를 보니 20여명을 공항에서 연행한다고 한다. 남남갈등을 부추기는 북의 전술이라는 글도 보인다. 대북정책, 민간차원의 남북교류에 대해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기사, 사설, 칼럼을 보았다. 우리가 북에 있는 동안 가족들은 모두들 무척 불안해하고 노심초사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시아나 항공기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배웅을 나왔던 사람들도 모두 버스에 오르고 올 때와 똑같은 빛깔의 하늘을 지나 신문 하나를 다 읽고 나자 비행기는 금방 남쪽의 하늘로 들어섰다.
비행기가 착륙지를 인천공항에서 김포공항으로 바꾸라는 관제탑의 지시로 항로를 돌려 10분간 더 비행하겠다는 기장의 안내방송을 들으며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사법처리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김포공항에 내리니 싸늘한 눈빛, 냉랭한 태도의 경찰 2,500명이 기다리고 있다. 공항청사 밖에서는 미망인회, 참전동지회 등의 단체에서 나온 1,300명의 항의인파가 계란을 던지고 여대생들의 머리채를 잡고 두들겨 패고 하는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눈물을 쏟게 하던 여윈 북한 어린아이들의 모습과 흥분한 채 ‘평양으로 돌아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선 사람들을 보면서 이 나라를 어찌해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에 더 마음이 아팠다.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고 한동안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더니 끝내 며칠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 있어야 했다.
아직도 나는 이 병이 무슨 병인지 병명을 알지 못한다.



연재를 마치며
북에 갔다온 이야기를 연재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의 첫 마디는 괜찮냐 하고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 많이 걱정 했다는 것과 구속자 명단에 들어 있을까봐 찾아 보았다, 조사 받지는 않았느냐 그런 것들이 많았다. 남쪽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었는가 하는 것을 알게 하는 물음들이다.
실제로 방북의 파장으로 통일부 장관이 해임 경질되고 여권은 이념갈등으로 두 쪽이 나 현 정부는 소수여당으로 전락하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방북이었다. 한 편으로는 민간교류의 성과들은 돌출행동에 묻혀 보이지 않고 우려와 걱정만을 더 많이 끼친 방북이어서 방북단의 일원으로 송구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냉전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않는 눈으로 보면 남북교류는 언제나 파국을 가져올 수 있는 요소들을 안고 가는 위태한 줄타기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말고 가야할 길이 또한 통일의 길이라는 것을 확인한 여행이기도 했다.
특히나 북을 실사구시의 눈으로 정확히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 점은 내게는 값진 경험이었다. 막연한 기대나 들뜸도 현실을 바로 볼 수 없게 하며 끝없는 적개심과 증오도 민족의 장래를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통일이 오래 걸리더라도 인내를 갖고 기다리고, 이성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며, 동포애와 민족애를 바탕으로 서로를 대하고, 이질적인 것보다 동질적인 것을 더 찾으려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민족의 통일을 위해 우리는 교류를 시작했다. 교류란 상대를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면 교류는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일이 꼬이고 막힐 때는 이 생각으로 돌아와 다시 출발하고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도종환 시인의 북한 방문기 마지막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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