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형 청주송절중 교사

학교의 사회 교과서에는‘모든 인간은 존엄하며, 모든 사람은 법앞에 평등하다’고 나와 있고, 나도 그렇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저울을 든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Justitia)가 법조계를 상징하듯이, 법의 ‘정의(Justice)’란 개념에는 저울이 상징하는 형평성(equity)이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공평하지 못하면 정의롭지 않은 것이다. 나는 법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의 열쇠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법이 사회의 유용한 제도로서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공정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상군열전>에 나오는 상앙의 법을 떠올려 본다.

진나라 효공에게 등용된 상앙은 태평성대의 비결이 법치에 있다고 보고, 이른바 십오지제(什伍之制)라 부르는 연좌제를 만들어 서로의 죄를 고발하게 하고 한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다른 사람도 처벌하도록 국법으로 정한다. 상앙은 백성들이 법을 지키게 할 묘안을 짜낸다. 그는 시장 한 가운데 수레를 가져다 놓고‘누구든 그 수레를 성문까지 옮기는 사람에게는 후한 상금을 내린다’라고 포고한다.

아무도 그 황당한 명령을 따르려 하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나섰고, 상앙은 정말로 그에게 백금을 주었다. 얼마 후, 태자가 법을 어겼다. 상앙은 태자를 법대로 처벌하려고 했으나, 대신들의 반대가 대단했다.

그러자 상앙은 태자 대신 태자의 보좌관인 공자 건을 처형하고 태자를 잘못 가르친 책임을 물어 태자의 스승 공손가를 경형(얼굴과 몸을 바늘로 찔러 먹물로 죄명을 새기는 형벌)에 처했다. 그런 식으로 상앙은 상과 벌을 명확하게 구분하면서 나라를 다스렸다. 그제야 진나라 백성들은 새 법령을 따랐다.

상앙은 이웃 나라와 전쟁을 벌이면서도, 누구든 적의 성 위에 제일 먼저 올라가는 자에게는 관직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사람들이 저마다 먼저 오르려 경쟁하는 통에 성 하나를 순식간에 함락시킬 수 있었다.
상앙은 공을 세운자는 신분이 미천해도 반드시 상을 주고, 죄를 지은 자는 신분이 높아도 반드시 처벌했다. 이러니 아무리 법이 엄해도 사람들이 억울한 마음을 품지 않고 법을 지킬수 밖에 없는 것이다. 법의 엄격함보다 법의 공정성에 더 주안점을 둔 것이다.

법이 공정해야 법의 권위가 서고 지켜지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법치의 위기는 법의 공정성의 위기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장자연 리스트에 실린 권력자들만 인권보호의 미명으로 이름조차도 공개되지 않는 것은 불공평하다.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재판 개입에 대해서 ‘제식구 감싸기’를 하는 법원의 처사는 불공평하다.

박연차 리스트를 수사하는 검찰이 권력을 잃은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에게는 엄격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들에 대한 수사에 미온적인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특히 대통령의 최측근인 천신일 회장의 뇌물수수와 청탁 혐의만 수사하고, 청탁의 핵심대상이라 할 국세청장의 해외도피 의혹이나 대선자금 의혹에 대해 수사하지 않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검찰이 법적판단보다는 정치적인 판단으로 ‘몸통’을 감추려고‘꼬리 자르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국민들의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주변을 돌아보면 힘있는 자들에 대한 ‘유전무죄’의 불공평함이 법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법이 공정하지 못하면 법치가 무너지고, 사람들은 사적 폭력이나 우격다짐에 의존하게 된다. 경찰이 화물연대의 과격시위를 이유로 민노총의 집회를 불허하기로 했다고 한다.

과격함을 탓하고 불법에 대한 단호함을 선언하기 앞서, 그에 대한 공권력의 집행이 공정했는지, 나아가 법이 국민들에게 공정하다는 신뢰를 받고 있는지를 스스로 자문하고 성찰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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