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일 가까운 장기파업 속 교섭일정조차 못잡아

구조조정 문제를 놓고 노-사간 극심한 갈등양상을 보이고 있는 한국네슬레 사태가 좀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 회사는 지난 7월22일 이후 두달여간 노사간 본교섭 조차 진행하지 못하는 등 가파른 갈등국면을 유지하다가 9월 24일과 26일 제13차 및 14차 본교섭을 잇따라 재개했지만 무위로 끝났다. 9월 26일 회사측이 ‘협상 결렬’ 선언에 이어 냉각기간을 갖자는 통보에 따라 기약없이 또다시 장기 교착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로써 지난 7월 7일 이후 85일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는 파업사태가 언제쯤 해결될 것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표류하고 있다.

교섭 또다시 실패…끝 모를 대치국면
이런 가운데 한국 네슬레 측이 9월 초 밝힌 ‘청주공장 철수 검토’ 발언이 여전히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 네슬레는 8월 25일 서울사무소에 이어 9월 3일 청주공장에까지 직장폐쇄 조치를 확대하면서 “스위스 본사에서 청주공장의 철수를 검토하라는 통보가 왔다”고 밝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충격적인 발표 직후 보도된 ‘연합뉴스’ 기사에 따르면 지난 9월 3일 스위스 베베이에 있는 네슬레 본사의 프랑수아 자비에 페루 네슬레 대변인은 ‘연합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네슬레의 한국 철수설은 (본사의) 발언을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된 오해로 보인다. 한국 철수계획은 분명히 없다”고 밝혀 한때 논란을 빚었다.

그러나 네슬레 본사는 지난 9월1일 한국 네슬레에 공문을 보내 “최근의 한국 네슬레 경쟁력 저하 추세가 앞으로 이어질 때 한국에 생산기지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재검토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나타나 이 발언의 진정성을 놓고 의문이 일고 있다. 한국철수 검토 발언이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자 본사가 서둘러 진화하기 위해 나중에 애매하게 말을 했을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파문 일으킨 “한국철수 검토” 발언
그러나 모든 경우의 수를 감안해야 하는 최고 경영진 입장에서 최악의 상황을 상정, 한국에서 철수를 할 때 예견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을 검토해 보라는 말은 원론적으로 문제가 될 게 없다는 시각도 만만찮다.

하지만 네슬레 노조 측은 “쟁의 기간 중 사업장 철수라는 극단적인 내용으로 노조에 위압을 가한 행위는 OECD 다국적 기업 가이드 라인을 위배한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지난 2000년 6월 개정된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제7장)은 “고용조건에 대해 종업원 대표들과 선의의 교섭을 함에 있어, 또는 종업원들이 단결권을 행사함에 있어, 기업은 교섭에 부당하게 영향을 주거나 단결권 행사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업장의 전부 또는 일부를 해당 국가에서 철수하겠다고 위협해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네슬레는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을 참조사항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9월 5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모인 IUF(국제식품섬윤조연맹) 소속 유럽 19개국 대표 51명이 네슬레 경영진과 회의를 마친 뒤 “한국에서의 투자철수 위협을 비난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 IUF와 민주노총 등에서는 한국네슬레를 OECD에 가이드 라인 위반혐의로 고소했다는 게 전택수 네슬레 노조위원장의 설명이다. 9월 24일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를 비롯한 16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한국네슬레 파업사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동대책위)’ 역시 OECD 가이드라인을 위배한 경영진 측을 비판하며 노사간 조건 없는 대화를 촉구하기도 했다.

“회사측에서 노조 무력화 기도”
OECD 가이드라인은 말 그대로 ‘안내선’으로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세계적 다국적기업들이 윤리강령으로 삼는 준거라는 점에서 도덕적 책임 논란의 소지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노조는 “그동안 이삼휘 한국네슬레 사장이 협상테이블에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최근 마지못해 나섰지만 일방적으로 협상결렬을 선언하고도 노조보고 합리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되묻고 싶다. 88년 노조창립이래 올해까지 단 2차례 파업밖에 없었는데 올해 장기간 파업사태가 발생하고 지금껏 종식되지 않고 있는 데에는 경영진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전택수 노조위원장은 “단협안에 따르면 조합원의 배치전환 시에는 노사 ‘협의’를 거치도록 돼 있는데 회사측은 판매부문을 일방적으로 외부에 위탁하는 결정을 내렸다”고 비난했다.

“노조는 타협정신 전혀 없어”
노조는 조합원의 △근로조건 및 고용의 변화가 있을 경우 조합과 ‘합의’해 시행할 것, △9.2%의 임금인상 △회사에서 생산물량의 일부를 외주 처리하거나 하도급으로 전환하고자 할 때는 사전에 노동조합과 ‘합의’할 것 등을 올 임금협상의 주요내용으로 요구하고 있다. 노조는 “이것은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자구권 차원의 최소한의 요구사항”이라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네슬레 인사·총무 부문을 총괄하는 이완영 상무는 “스위스 본사에서는 노조가 고용안정에 대해 문서로 보장할 것으로 요구하는 데 대해 기본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상무는 또 “본사로부터 한국철수 검토지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며 “다만 본사에서 당장 한국철수를 고려하고 있다기보다는 지금처럼 경쟁력이 계속 떨어질 경우 3∼4년, 또는 4∼5년 후 이 문제를 현실적으로 검토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 이상 회사의 미래운명을 같이 걱정해야 할 입장에 있는 노조에게 알린 것”이라고 말했다.

회사 쪽은 또 “판매부문 인력을 배치전환한 조치는 매년 두자릿 수에 달하는 임금인상 등 각종 비용 증가로 이익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 데다 노조 측의 파업으로 경영여건이 계속 악화돼 내려진 조처”라는 입장을 나타냈다. 하지만 노조는 “올해 처음으로 한자릿 수 임금인상안을 제시했는데 회사쪽에서는 노조가 ‘매년 두자릿 수를 요구한다’고 왜곡하고 있다”며 “특히 회사측은 노조와 대화할 생각은 않고 노조를 궁지에 빠뜨리기 위한 언론플레이만 일삼아 노조원들이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조가 경영권을 침해했는가
한국네슬레 노조가 파업에 이르게 된 과정도 노조와 회사측의 시각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회사측은 그동안 언론을 통해 “노조가 요구하는 것은 회사의 고유한 경영권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노조의 설명은 다르다. 전택수 위원장은 “임금협상 중에 일방적으로 사업부를 없애고 조합원들을 다른 부서로 배치하는 등 회사가 단협을 먼저 어겼다”고 주장했다.

회사는 임금협상 중이던 지난 6월28일 영업 경쟁력을 키운다는 취지로 판매를 다른 회사에 맡기는 조처, 즉 위탁판매 결정을 단행했다. 대신 영업부에 근무하던 조합원 40여명을 시장조사 부서로 발령냈다. 전 위원장은 “이는 조합원의 부서 이동 및 배치 전환시 본인과 협의하기로 돼 있는 단협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02년 체결된 한국네슬레의 노·사 단체협약(제16조)은 ‘회사는 조합원의 부서 이동 및 배치 전환시 본인과 충분히 협의해야 한다. 단, 조합원의 이의 제기 시 조합과 협의한다’고 명시돼 있다.

서로 극복 못한 현격한 시각차
하지만 이완영 상무는 “개인의 인사이동 및 전환배치에 대해 조합과 합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단협 유효기간 중에 단체교섭 내용을 바꾸기 위해 파업할 수 없도록 규정한 제78조를 먼저 어긴 쪽은 노조”라고 말했다. 이 상무는 “하지만 전환배치 문제와 관련, 2년 전부터 종업원들과 대화하며 불가피성에 대해 이해를 촉구했지만 노조는 쌀 한톨 마저 양보할 수 없다는 비타협적 자세로 일관해 왔다”고 반박했다.

한국네슬레의 경영상태에 대한 노와 사의 인식 차도 현격하다. 노조는 “1996년부터는 흑자로 돌아섰고 최근 6년 동안 100억∼20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냈다. 그런데도 경영효율 제고 차원이라며 고용불안을 동반하는 구조조정에 나서는 회사측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전 위원장은 “최근 5년간 본사가 한국지사의 당기순이익의 92%를 가져갔지만 한국지사에 투자한 것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노조 주장에 따르면 지난 한해 동안 한국네슬레는 194억의 당기순이익을 올려 이 중 185억원을 본사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바닥 나버린 상호신뢰감 회복이 관건
다만 노조는 “최근 매출이 답보상태에 빠지고 순이익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이는 회사측의 경영실책과 재투자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상무는 “창업 후부터 15년간 적자를 기록하다 이익을 실현하기 시작한 시점은 97년부터로 98년과 99년을 정점으로 이익률과 이익규모가 떨어지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며 “한국네슬레의 경영상태를 호전시키기 위해서는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에 따라 지난해부터 생산성 향상 및 일반 경비 절감을 위한 노조의 동참을 호소하고 있는데 노조는 아무 것도 양보할 수 없다며 ‘전부 아니면 전무’ 식으로 나오고 있어 답답하다”고 말했다.

한국네슬레 노조는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상황과 원칙을 무시하고 이기적인 목소리만 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노조보다 우월적 지위에 서 있는 경영진이 노조를 무시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회사와 노조 모두 상호 존중과 타협의 자세를 서로 내보이는 데 인색한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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