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여자축구 대부 홍속렬의 가시고기 인생,
노병은 죽지 않는다…충북에서 ‘마지막 불꽃’

<후진양성 헌신, 결국 빚더미>
18살이던 1961년, 축구병(蹴球兵)으로 군에 입대해 활약하다 4년 만에 부상을 당해 일반부대로 전입된 뒤 월남전 2회 참전, 수차례 대간첩작전을 비롯해 1971년 실미도 진압 현장에 투입되는 등 공수부대 부사관으로 12년을 복무한 홍속렬(66)이라는 사나이가 있다.

홍씨는 1977년 국군상무체육부대의 전신인 육군축구대표팀의 감독을 맡으면서 다시 축구계로 돌아왔다. 이후 1984년 상무가 창단된 이후에도 축구팀 감독을 맡아 1991년까지 팀을 이끌다 일등상사(현 원사)로 30년간 입었던 군복을 벗었다.

▲ 상무팀과 여자축구의 대부였던 홍속렬씨가 자신의 전 재산을 축구에 쏟아 붓고 청원군의 한 대안학교에서 훈육교사로 고된 삶을 살고 있다. 홍씨는 급한 부채만이라도 장기 저리로 전환해 줄 것을 바라고 있다. 사진/이재표

화랑(대표팀)과 충무(상비군)라는 두개의 날개로 활공하던 1970~80년대 한국축구에서 이영무, 최종덕, 박성화, 신현호 등 걸출한 스타들이 그에 의해 조련됐다. 꽁지머리 김병지 선수는 홍씨의 눈에 들지 않았다면 영원히 그라운드에 서지 못할 뻔 했다.

김 선수는 축구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해 ‘부산 소년의 집’에서 활약했으나 전국대회 4강권에 들지 못함에 따라 대학팀이나 실업팀에 가지 못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터였다. 당시 상무팀에 입단테스트를 지원했던 김 선수의 숨은 재능을 알아보고 상부에 각서까지 써가면서 받아준 사람이 홍씨였다. 김 선수는 상무에서 축구를 재개해 1992년 울산 현대에 연습생으로 입단하게 된다.    

홍씨가 1991년 정년을 7년이나 남겨놓고 전역한 것은 당시 태동단계에 있던 여자축구의 산파 역할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18년…. 홍씨는 생사를 넘나들었던 베트남의 전장보다도 더 치열한 삶의 전투를 치르고 있다. 비록 노병은 죽지 않았지만 처절하게 묻혀가고 있다.

홍씨의 현재 명함은 청원군 미원면 운암리에 있는 ‘GVCS 랭귀지스쿨’의 훈육 및 체육교사다. 글로벌비전크리스천스쿨의 약자인 GVCS는 미국식학제에 따라 미국 내 대학 진학을 목적으로 하는 기독교계 대안학교로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에 본교를 두고 있다. 미원의 랭귀지스쿨은 본교 입학을 앞두고 영어수업이 가능할 수 있게 사전 어학연수를 하는 시설이다.

강원도 철원군(38선 이북)이 고향이고, 현주소가 경기도 부천시인 홍씨가 지난해 8월부터 가족과 떨어져 GVCS의 체육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것은 독실한 기독교 신앙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군인연금과 노점상 수준의 튀김가게로는 빚 가림이 불가능한 현실 때문이다.

역전의 용사인 홍씨는 어떤 사연으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떠안게 됐을까? 홍씨의 사연은 여자축구팀 창단에 나섰던 1991년부터 ‘현재진행형’이다. 홍씨는 전역과 함께 퇴직금을 털어서 체육선교학교 여자축구팀을 창단했으나 3년 만에 자금난으로 문을 닫아야 했다. 이는 곧 가산을 모두 날렸다는 의미다.

그러나 홍씨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1995년, 경기도 부천에 있는 낫소여자축구단의 감독을 맡는다. 이때 이미 낫소축구단은 (주)낫소의 법정관리로 재정지원이 끊긴 상태였다. 홍씨는 “월급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도 후원금을 모아 팀을 운영했다. 회사에서 부천 변두리에 20평 남짓한 보리밥집을 열어주고 이를 통해 축구팀을 운영하라고 했으나 운영이 시원치 않았다. 20여명에 이르는 축구팀의 유지비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1년 뒤에는 식당개업에 지원해준 돈마저 갚으라고 요구해 결국 은행에서 돈을 빌려 갚아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김대중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차이
홍씨는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상황에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어려움을 호소하는 편지를 썼다. 그러자 금융감독위원회 관계자가 직접 홍씨를 방문해 여기저기에 산재해있던 빚을 한 은행으로 통합해 군인연금에서 장기 저리로 갚을 수 있게 도움을 줬다.

문제는 홍씨의 몸에서 뜨겁게 박동하는 ‘축구인의 심장’이었다. 홍씨는 어렵게 운영해 온 낫소팀을 결국 다른 단체에게 넘겨주고 난 뒤 2002년 2월, 진학에 실패했거나 실업팀에 입단하지 못한 선수들을 모아 모 사이버대학에 축구팀을 창단했다. 5년여 동안 외인구단 성격의 사이버대학 축구팀을 이끌며 숱한 화제를 뿌렸지만 남은 것은 새로 떠안은 부채 3700만원이었다. 

홍씨는 “5년 동안 한 푼도 받지 못한 월급은 차치하더라도 미니버스 자동차보험료, 숙소 옷장할부금 등이 매달 내 연금통장에서 꼬박꼬박 빠져나갔다. 열정과 사명감으로 일했는데,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돼 어쩔 수 없이 팀을 떠나야 했다”고 토로했다.

평생을 군과 축구에 바쳐 훈장을 받는 등 국가유공자의 명예를 얻었지만 홍씨의 삶은 오직 신앙으로 버텨야할 만큼 고단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뒤 급한 부채 2000만원을 장기 저리로 전환해 줄 것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청와대에 수차례 보냈지만 지난 4월8일 금융감독원의 회신은 “귀하의 민원은 해당 금융회사의 영업행위 및 내부경영에 관한 사항으로 당사자 간 원만하게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내용이었다.   

홍씨는 “38살 난 딸을 비롯해 세 자녀가 결혼도 하지 못한 채 재개발을 앞둔 빈집에 살며 생계를 꾸리고 있다. 빚을 탕감해 달라는 것은 아니다. 축구에 평생을 바쳐 가족을 돌보지 못한 노병의 사연을 긍휼이 여겨 회생의 길을 열어달라”고 호소했다.

“쌀밥 들고 논산훈련소 찾아왔던 따뜻한 분”
육군축구팀 시절 애제자 ‘이영무 할렐루야팀 감독’

‘떴다 떴다 비행기’로 시작하는 동요 ‘종이비행기’를 ‘찼다 찼다 차범근/ 달려라 이영무/ 떴다 떴다 김재한/ 헤딩 슛 골인’으로 개사해 불렀던 1970년대의 축구키즈들은 지금 40대의 중년이 됐다.

▲ 홍속렬씨의 애제자인 이영무 할렐루야 감독.사진/뉴시스
작은 키에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주력으로 그라운드를 누비던 이영무 선수는 7년 간 국가대표 시절을 거쳐 포철, 할렐루야 등에서 선수와 감독생활을 하다 지난해까지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을 지냈으며, 올 들어 다시 2부 리그인 내셔널리그 안산 할렐루야팀의 감독을 맡고 있다.

이 감독은 홍씨에게 있어서 최고의 애제자이고, 이 감독 역시 홍씨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르다. 축구장 ‘기도세레모니’의 원조격인 이 감독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점에서도 홍씨와 통했다.  

이 감독은 전화인터뷰에서“1978년 군에 입대하면서 육군 충의팀에서 홍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다. 신현호 선수 등이 입대 동기였는데, 선생님이 손수 쌀밥을 들고 논산훈련소에 들어와 우리에게 먹였을 정도로 사랑이 넘쳤던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감독은 또 “홍 선생님은 선수로서는 화려하지 못했지만 지도자로서 너무나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한국축구, 특히 여자축구에 누구보다도 헌신하고 큰 기여를 했다”면서 “선생님이 그렇게 어려운 일을 겪고 계신지는 미처 몰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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