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논어 위정편(爲政篇)에서 “나는 나이 열 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吾十有五而志于學·오십유오이지우학),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으며(三十而摩삼십이립),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았고(四十而不惑·사십이불혹), 쉰에는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으며(五十而知天命·오십이지천명),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듣기만 하면 곧 그 뜻을 이해하게 되었고(六十而耳順·육십이이순), 일흔이 되어서는 마음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칠십이종심소욕 불유구)”고 말하였습니다.

이를 쉽게 말하면 나이 50이 되어야 하늘의 섭리, 즉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된다는 뜻이고 이순의 60대를 지나 70이 되어야 비로소 원숙한 인품과 경륜을 갖추게 돼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큰일’이라 함은 성인의 도를 갖춘 ‘천자(天子)의 자리’를 일컬음입니다. 그렇다면 나라를 경영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70은 돼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 한나라당이 소장파와 원로들간의 ‘나이전쟁’으로 내홍(內訌)을 겪고있는 모양입니다. 소장의원들의 ‘60세이상 용퇴론’으로 발단된 당내갈등은 ‘나이가 죄냐’는 역공에 슬그머니 ‘5·6공 퇴진론’으로 초점이 바뀐 듯 하지만 나이가 시비의 본질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웃나라 일본을 보면 참·중의원에는 10선의 70대의원이 수두룩하고 그 보다 더 나이가 많은 의원도 있을 만큼 국가원로들이 의회에 포진해 열정적으로 의정활동을 펴고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중국도 60, 70대가 국가원로로서 40, 50대와함께 조화를 이루며 정치를 이끌고 있고 대만 또한 70대 정치인들이 왕성하게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중국의 최고실력자였던 덩샤오핑(鄧少平)은 타계하던 1997년까지 국정에 관여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 94세였습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1984년 74세로 대통령에 두 번째 당선돼 79세까지 정력적으로 국정을 수행했습니다. 그때 야당인 민주당은 물론 미국국민 누구도 그에게 ‘늙은이’라고 조롱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60이 넘었어도 30대 못지 않은 ‘젊은 정신’을 가진 사람이 있고 30대의 젊은이라도 늙은이 보다 더한 ‘낡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삶의 철학, 그 사람의 시대정신입니다.

물론 우리 사회의 나이 든 사람 중에는 때묻은 이들이 상당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난 시절 독재자들의 하수인이 되어 일신의 영화에 눈이 멀었던 이들이 부지기수인 것을 우리는 다반사(茶飯事)로 목격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라져 갔어야 할 그런 인물들이 여전히 자리를 차고 앉아있는 뻔뻔함 때문에 나이물갈이론 이 나온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렇다하여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건강한 원로들을 몰아서 물러 가라함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되는 나라, 잘 나가는 나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노장청(老壯靑)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청년의 패기와 장년의 슬기, 노년의 경륜이 조화를 이룰 때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안정과 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마련입니다. 일본이, 중국이, 대만이, 그리고 미국이 번영을 누리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나이를 초월한 3박자의 조화가 원동력이 되고있는 것입니다.

거대 야당 한나라당이 ‘나이타령’으로 집안싸움을 하는 것을 보면 왜, 두 번씩이나 문 앞에서 대권을 놓쳤나를 헤아리기 어렵지 않습니다. 정치권이든, 정치권이 아니든 물갈이는 자연스럽게 이루어 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옥석(玉石) 구분 없이 물리력으로 “몇 살 이상은 물러가라”고 해서는 될 것도 안 됩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 밑에서 위로 흐르지 않습니다. 그게 만고불변의 진리이고 순리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늙습니다.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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