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돌 고려대교수, 조치원마을 이장

지금 서울 사당동은 교통의 요지이자 서울의 새 도심중 하나다. 하지만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치르면서 당시까지 최대의 달동네 중 하나였던 사당동은 86년에서 88년에 걸쳐 무자비한 철거를 당했다.

단 한 가구(정금순 일가)만 제외하곤 아무도 임대주택 같은 데로 옮길 수 없었다. 정씨는 아픈 몸으로 쓰레기를 줍는 공공근로를 하며 생계를 이었다. 그 사이 그는 세상을 떠났다. 동국대 조은 교수 연구팀이 1986년부터 2008년까지 22년간 현장 밀착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만든 다큐 영화 <사당동 더하기 22>의 내용이다.

상대적으로 그보다는 좀 나은 사람들이 철거 직전의 현장에서 목숨 건 저항을 하다가 갑자기 철거민 5-6명이 생명을 잃은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용산 참사’다. 죽어간 양회성 씨의 아들은 경찰에 짓밟혀 연골이 파열되어 수술을 받고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한다.

재개발 조합원들과 그들을 조종하는 거대 자본의 ‘재산 증식’을 위해 폭력적으로 진행되는 철거 및 재개발 과정에서 ‘재산의 증식’이 불가능한 자들은 저항하다 죽거나, 살아남더라도 ‘상처의 축적’만 진행된다. 이것이 그간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객관적 법칙이다. ‘민중의 지팡이’이어야 할 경찰은 그 과정에서 ‘민중에 몽둥이’질만 한다. 상처만 두터워진다.

철거, 재개발, 뉴타운, 고층 건물의 번창은 크게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하나는 (건설) 자본을 통한 부단한 이윤 창출의 과정이 삶의 세계를 폭력적으로 장악한다는 사실이다. 사당동 철거민들은 대개 그 이전엔 서울 한복판인 양동(지금의 서울역 건너편)에서 철거당한 이들이었다. 1970년대 청계천 철거민도 마찬가지다. 용역 깡패의 역사는 그렇게 길다. 그 과정에서 건설 자본들, 재벌들의 몸집은 수백, 수천 배 불었다.

둘째로 철거와 재개발의 역사가 말하는 것은, 가난했지만 공동체와 인간미가 숨 쉬던 역사에 대한 기억 상실 내지 흔적 지우기다. 새로운 건물과 거리를 보며 과거의 가난을 잊고 환히 웃으라는 것이다. 철거민들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처리’한 뒤에 말이다. 올림픽 등 국제 행사를 치루기 직전에 행해지는 통과의례가 늘 이런 식이다.

강하고 멋있고 화려한 것만 생각하자는 것, 그런 것만 바라보며 앞을 보며 달리자는 것, 그런 꿈을 꾸며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라는 것, 그러나 바로 이야말로 사람과 자연을 억압하는 자본이 우리를 공범 관계로 포섭하는 테크닉이 아니던가. 그래서 이에 대한 저항은 망각이 아니라 기억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대안도 마찬가지다. 망각이 아니라 기억, 철거가 아니라 복원,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창조적 복원, 이것이 대안 창조의 논리적 기초다.

사당동 철거와 용산 재개발에 이어 내가 사는 조치원의 흉물 아파트 이야기도 있다. 내가 사는 동네도 약 1천 가구 아파트를 짓다가 15세대 정도밖에 분양이 안 되니 공사를 중단했다. 동네는 동네대로 망가뜨리고 마을 공동체에 상처는 두텁게 남긴 채 자기들은 사업에 실패해 물러난단다.

 전국 곳곳을 다니다 보면, 이런 식의 흉물 아파트가 여기저기 보인다.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는 저 맹목적 파괴의 행렬을 저들은 ‘건설’이라 한다. 건설 허가를 내준 행정 당국, 지자체장, 도시계획위원회 등은 아무도 책임을 안 진다.

과연 이런 ‘삽질’의 나라에서 정을 붙이고 살 사람이 있을까? 개인적으로야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대안은 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피한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절망의 한복판에서 절망하는 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새 희망을 만들어가는 것, 바로 이야말로 눈물겹고도 행복한 대안 창조 과정이다.

따지고 보면 그런 숨은 노력을 하는 분들이 한 둘이 아니다. 사당동 철거 과정 이후 22년을 동고동락하며 참여 연구를 수행한 분들이 그렇고, 용산 참사 현장에서 유족들과 동고동락하는 분들이 그러하며 마을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자본의 폭압과 행정의 멸시에 저항한 내 이웃들이 그러하다. 희망은 등잔 아래 어두운 부분 속 발버둥에서부터 시작된다.

큰 뜻을 품은 이들이여, 추운 겨울을 조심스레 이겨내고 조용히 물을 잣아 올리는 저 들풀이나 나무처럼 활기를 잃지 마시라.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 억울하게 죽은 분들을 기억하며 명복을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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