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포로 딸’ 이옥녀씨 자매 차별속 탈북 청주 정착


“북한에서는 국군포로의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받았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유해는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다시 차별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지난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차례로 북한을 탈출해 청주시에 둥지를 튼 5자매가 있다. 지금은 한국 사회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정부의 도움으로 먹고 살게 됐다는 점도 인정한다. 하지만 아직도 못내 아쉬운 것은 있다. 이들은 6·25전쟁 때 국군포로로 북한에 끌려갔다 유해로 돌아온 아버지에게 생환한 국군포로와 준하는 지원을 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사연의 주인공은 이옥녀(50), 이옥분(47), 이옥희(44), 이옥춘(41), 이옥화(39) 자매.

이들 자매의 아버지인 고 이만동(31년 출생) 씨는 충북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가 고향이다. 20세 때 국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북송됐다. 정치범 수용소로 유명한 함경북도 은덕군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간 이 씨는 그 곳에서 고 홍경숙(40년 출생) 씨를 만나 1남 5녀를 낳았다.

이 씨는 아오지 탄광에서 벗어나는 데는 성공했지만 국군포로 출신이라는 멍에는 북에서 치명적이었다. 산지기 일을 하며 근근히 삶을 이어오던 이 씨는 지난 1994년 북한지역에 대기근이 일어난 후 딸들의 집을 전전하다 결국 1996년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한 많은 삶을 마치게 된다. 같은해 어머니마저 잃은 자매들은 북한 탈출을 결심하게 된다.

첫 번째 탈출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지난 97년 여름 넷째인 옥춘 씨와 다섯째인 옥화 씨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다. 강을 건넌 그들에게 다가온 중국인은 식량을 주며 친절을 베출었지만 그들의 정체는 탈북 주민들을 노린 인신매매범이었다. 이후 넷째는 길림성 연변시로 팔려가고 다섯째는 중국 각지를 떠돌아야 했다. 탈북자가 많은 연변으로 팔려간 넷째는 5번이나 붙잡혀 북송됐다. 모진 구타 속에서도 탈출을 감행하던 넷째는 결국 마지막 북송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형무소로 끌려가던 중 달리는 열차에서 몸을 날려 마지막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가장 먼저 한국에 들어온 것은 다섯째인 옥화 씨. 중국말도 모른 채 여기저기 팔려다니던 옥화 씨는 브로커를 만나 2002년 한국에 입국한다. 하나원에서 교육을 마친 옥화 씨는 정부에서 받은 정착금과 한국에서 일해 모은 돈으로 언니들을 한국으로 데려왔다. 2005년 마지막으로 넷째까지 한국 입국에 성공한 다섯 자매는 아버지의 고향과 가까운 청주에 자리를 잡게 된다.

한국에 정착한 5자매가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아버지의 유해를 모셔오는 일. 지난 2006년 넷째와 다섯째는 아버지의 유해를 모셔오기 위해 다시 한 번 중국으로 향한다. 브로커를 통해 평안북도 동림군에 있던 아버지의 묘에서 유해를 파오는데 성공한 자매는 국방부에 이에 대한 처리를 문의했지만 돌아온 답은 “뭐하러 유해를 가져왔느냐”는 냉담한 반응이었다.

특히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가 됐다. 하지만 이들 자매는 같은 탈북자가 국방부에 통보하고 유해를 송환하는 절차를 밟던 중 유해 반쪽을 북한 측에 빼앗겨 절반만 송환된 사례가 있었다며 국방부에 대한 불신을 나타냈다.

결국 유전자 감식 결과 이 유해가 다섯 자매의 아버지임이 드러났고 두 달여간의 지루한 공방끝에 이만동 씨의 유해는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됐고, 이 씨에게는 화랑무공훈장이 수여됐다.

하지만 이들 5자매의 활동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들은 탈북한 국군포로 유가족들에게도 생환한 국군포로에 준하는 지원을 해 줄 것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첫째인 이옥녀 씨는 “아버지는 북한에서 짐승보다 못한 생활을 했고, 자녀들도 신분상의 불이익으로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며 “아버지가 개인을 위해 전쟁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이어 “지금까지 탈북에 성공한 가족들이 북에서 가져온 국군포로의 유해가 6명이지만 그 중 우리가족만 국가유공자가 됐다”며 “생환한 국군포로에게 많은 지원이 이뤄지는 것을 보면 북에서도 차별대우 받았는데 남에서도 차별대우를 받는다는 설움이 밀려온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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