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이 돌아왔다고 한다. 1944년에 태어나 동족상잔의 비극을 어린 눈망울에 담고, 봉건적 권위주의가 조국을 유린하던 60년대에 독일로 건너갔던 그가 37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유신 독재에 항거했기에 아버지의 죽음을 지키지 못했고, 이데올로기의 각축이 족쇄가 되었기에 어린 아들에게 조국의 산하를 보여주지 못했던 송두율이 돌아왔다고 한다.

이렇게 서두를 시작하니 북한로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일지도 모르는 송두율을 너무 두둔하는 것은 아닌가하고 걱정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무책임한 발언일지는 몰라도, 나는 그의 정치적 실체가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다만 나는 그가 오랜 세월동안 조국을 그리며 살아온 아픈 가슴의 소유자인 것은 안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조국과 뜻을 같이 하지 못했기에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았지만, “양극단은 안 된다”고 주장하며 남북한 서로에 대한 “비판적 수용”을 주장하였던 망명객인 것쯤은 안다.

송두율은 스스로를 “경계인”이라고 부른다. 그는 한 때 남한사회를 지배하던 권위주의 체제와, 지금도 맹위를 떨치는 세계자본의 위력을 비판한다. 그는 세계역사의 사각지대로 몰리는 북한의 현실에 안타까워하면서도, 그 현실을 “내재적 관졈에서 바라볼 것을 주장한다. 어느 쪽에도 흔쾌히 몸을 싣지 못했기에 경계인일 수밖에 없었고, 또 그렇기에 그에게서 이청준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훈을 연상하게 된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라며 시작하는 소설 ‘광장’에서 이명준은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남한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이념의 칼날이 난비하는 광증의 사회였고, 북한은 이데올로기의 허구 속에 구호와 명령만이 난비하는 회색의 사회였다.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기에, 서로를 인정하며 인간적 보람이 가득한 공동체적 삶을 위해 ‘광장’을 찾아 나섰고, 그런 그에게 인도 상선 타고르 호와 깊고 푸른 동지나해는 광장으로 향하는 유일한 탈출구였을 것이다.

우리는 지난 세월동안 이데올로기로 인해 참으로 많은 고통을 경험해 왔다. 한 시대의 이념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무참하게 짓밟아 왔는지를 몸으로 경험했고, 이념의 잣대가 자유 의지를 얼마나 억압했는지 피부로 느껴 안다. 또한 세계가 탈 이데올로기의 세계로 나아갈 때, 이데올로기 경쟁으로 인해 사회적 에너지를 얼마나 소모적으로 사용했는지도 잘 안다.
송두율로 표상되는 이데올로기 각축과 경계인의 질식을 불행히도 오늘 이 사회에서 나는 목격한다. 송두율이 질식했던 이념 갈등이 남북간 대립이자 지난 세기의 갈등이라면, 오늘 이 사회에서 목격되는 이념 갈등은 남남(南南)간 대립이자 21세기 미래를 옥죄는 갈등이다. 오늘 우리는 광화문 광장에서 열리는 8.15 경축식에서, 그리고 대구의 유니버시아드 경기장에서 무수히 대립하는 양극단을 목격한다. 서로가 서로를 극단적 우파와 좌파로 규정한 채, 대화 없는 대립만이 지속되고 있다.

극단의 소리는 언제나 크게 들린다. 그들은 항시 구국의 일념과 정의의 독점을 주장한다. 그러기에 비판적 수용을 거부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역사를 통해 안다.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극단은 결국 헛된 구호이자 아집으로 뭉쳐진 망령에 불과한 것임을 말이다. 우리는 스페인의 프랑코로부터 극단정치의 망령을 목격한다. 자신의 파시스트 정치를 위해 60만 명의 생명이 필요했던 그의 주장은 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의 화폭을 통해 그 허망성과 참혹성을 확인한다. 아니, 구태여 프랑코와 스탈린 등을 거론하면서 극단적 주장의 무모함을 확인하지 않아도 좋다. 이 땅의 역사가, 그리고 20세기의 경험이 그 집착성과 허망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점차 높아가는 극단의 소리가 두렵다. 배타만이 횡행하는 이 사회에서 침묵하는 경계인이 늘어가는 것이 두렵다. 그리하여 토론과 활기가 넘치는 광장을 찾아 남의 나라로, 동지나해로 떠 돌 저들 망명객의 존재가 슬프다. 광장을 찾아 떠났던 송두율과 이명훈의 운명을 21세기 조각난 남쪽 땅에서 다시 발견하는 것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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