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대망'(야마오카 소오하치 작)으로 번역된 소설에서는 이렇게 전했다.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야 한다."(오다 노부나가),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해야 한다."(도요토미 히데요시),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도쿠가와 이에야스)

요즘 내가 붙들고 있는 고민이 '울지 않는 두견새'를 두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꼭 그 꼴이다.

내게 '두견새'는 도무지 풀리지 않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양극화, 실업문제이다. '울지 않는 건' 도무지 도서관을 뛰쳐 나오지 않는 학생들이고, 실업문제에 대해 사회와 국가의 책임에 침묵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다.

왜 나오지 않을까. 왜 침묵 이외의 반응은 보이지 않을까. 현 정부의 실업대책을 신뢰해서일까. 아니면, 노무현 패밀리의 사기극의 충격 때문일까.

도서관에 답이 있을까. 누누이 이야기했지만, 도서관에 있는 백 명의 학생 중에서 공무원이 될 수 있는 학생은 한두 명에 불과하다. 현 정부의 정책은 그나마 있는 공무원 인력을 감축하고, 공기업의 10%를 구조조정하는 거다. 즉, 양질의 일자리는 더더욱 줄여버리는 정책이다. 그런데도 이에 대해서 말이 없다.

유럽의 어떤 기업가(노동자가 아니다)는 국민들 전체에 일정액의 월급을 주는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재원은 기업과 일하는 노동자가 같이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몽상처럼 들릴 이야기가 유럽 전역으로 퍼져 공론화(사회적 의제)가 된다고 한다.

말이 없다. 하루 천여 명이 찾는다는 청주종합고용지원센터에서 노동자 권리를 홍보하는 홍보물을 기꺼이 뿌리치는 노동자들!

우리나라 속담에 '우는 아이에게 젖 물린다'고 했다. 아직까지 나는 이 속담에 우리 사회에서는 진리에 가깝다고 본다. 떼법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는 걸 알지만, 이것이 잘못된 것을 입증하는 사례는 결단코 없다.

울어야 할 두견새가 있다. 그런데 울지 않는다. 자문한다.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은 해법을 자문한다.

김치만두와 고기만두가 있었다. 만두의 김치속과 고깃속이 서로 싸운다. 내가 더 맛있다고.

이를 지켜보던 만두피가 말했다. '내 안에 너 있다'고.

사실 따져보면 경제위기, 실업대란 속에서 정규직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실업, 노령실업 따질 것 없다. 굳이 구분해 볼 필요도 없다. 우린 모두 하나의 만두피 속에 있는 내용일 뿐 우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내 안에 너 있다'고 하는데 우리 같이 울어볼 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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