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귀국 사할린 동포들의 설레는 고국의 봄
생활에 잘 적응, ‘일하고 싶지만 제약’ 아쉬워

지난해 10월 영구귀국해 청원 오송에서 새 삶을 시작한 81명의 사할린 동포들은 고국에서 맞는 첫 봄이 매우 설렌다.

며칠만 참으면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아 완전한 대한민국 국민이 된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모여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기도 한다.

▲ 고국에 오자마자 응급 심장수술을 받은 위상환 씨. 곧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아 온전한 대한민국 국민이 되게 됐다며 강외면사무소 직원의 안내에 따라 지문을 찍고 있다.
벌써 고국에 돌아온 지 반년이 지났다. 겨울을 나고 따뜻한 봄기운을 느끼면서 하나둘 변하는 것들에서 더 이상 러시아의 설움이 아닌 고향의 따뜻한 정을 느낀다.

일제에 징용됐거나 돈을 벌수 있다는 말에 현혹돼 사할린으로 강제로 끌려간 이들의 가슴속에는 수십년의 세월도 막지 못한 고향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지문날인, 행복하네요’

사할린 동포 어르신들을 만나러 오송단지 주공아파트를 찾은 것은 지난 10일. 점퍼가 부담스러울 정도의 때 이른 초여름 날씨에 대부분 환갑을 넘긴 사할린 동포들도 밖에 나와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이들은 가칭 ‘사할린 영구귀국 한인회’를 만들어 면사무소와의 연락이나 낯선 고국 땅에서 겪어야 되는 크고 작은 일을 함께 하고 있었다.

이날은 때 마침 강외면사무소에서 직원들이 나와 주민등록증 신청을 접수받는 날이었다.

경로당 한쪽 방에 임시 접수처를 마련하고 동포 한사람 한사람 지문 날인을 받으며 주민등록증 발급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다.
면사무소 직원 안내에 따라 정성껏 열 손가락의 지문을 찍는 이들의 모습에서 깊은 감회를 엿볼 수 있었다.

콧털을 멋있게 기른 위상환 씨(64)는 아직 한국어가 서툴러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지문을 찍는 동안 주민등록증을 언제 받아볼 수 있는지 몇 번이나 되물었다.

그도 그럴것이 위 씨는 지난 1월 갑자기 쓰러져 응급 심장수술을 받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60년 넘도록 타국땅에서 설움 받으며 살다 겨우 내 나라에 왔는데 주민등록증을 만져보지 못하고 눈을 감을 뻔 했다는 것.

늦어도 보름 안에 주민등록증을 받아 볼 수 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입가에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자리를 비켰다.

아직은 러시아 말이 편해서 미안

사할린 영구귀국 한인회는 아파트 경로당을 임시로 빌려 자신들의 모임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주민등록증 신청 접수 하는 동안 커다란 방에서는 우리말에 서툰 동포들을 위해 한글교실이 열리고 있었다.

우리말을 잊지 않은 사람들은 도우미가 돼 돕고 있었고 강사도 어린아이들을 대하듯 쉽고 친절하게 가르치고 있었다.

해방 이전에 사할린으로 강제이주 됐거나 그곳에서 태어나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라 오랜시간 공부에 집중하는 것은 무리지만 이들은 그래도 열심이다.

이곳저곳 질문이 나오고 서로 가벼운 핀잔도 오가며 한글교실의 열기도 높아 갔다.

한 동포는 “아직은 한국어 보다 러시아말이 편한데 미안하다. 열심히 공부해 한국말을 잘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하기도했다.

한글교실 뿐 아니라 일부 동포들은 강외면 주민자치센터에서 진행되는 취미 프로그램에도 참여하는 등 새로운 생황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강예구 강외면 사회복지사는 “동포 대부분이 부모를 통해 한국 문화를 접하고 살았고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많았기 때문에 적응이 비교적 쉬운 것 같다. 이미 국적취득과 가족관계등록부 작성은 완료됐고 주민등록증만 발급되면 완벽한 대한민국 국민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은 당분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것 같다. 낯선 환경이야 시간이 가면서 적응하겠지만 이들을 이용하려는 아찔한 사건도 발생하고 있는 것.

국가기관이나 복지단체를 사칭해 물품을 판매하려는 시도가 있었는가 하면 12층에 사는 동포집에 방문해 방범용 창을 설치해야 한다며 금품을 뜯어내려는 일도 있었다.

“소득이 생기면 안 된다니 답답해요”
김정욱·김인재 부부의 고국생활 적응기

▲ 사할린으로 강제이주당하는 열차안에서 태어났다는 김정욱 씨(오른쪽) 부부.
김정욱 씨(68)는 영구귀국 했지만 고국은 그리움의 대상이었을 뿐 기억은 전혀 없다. 1942년 강제로 사할린으로 끌려가던 열차 안에서 어머니가 김 씨를 낳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씨는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까지 밥상에서 식사를 했고 집안에서는 한국어만 사용하는 등 한국의 문화를 잊지 않았다.

심지어 김 씨 부모님은 언제 고국에 돌아갈지 모른다며 러시아 국적을 갖지도 못하게 했다. 때문에 부모님 생전에는 교육을 받지도 못했다.

“부모님이 세상을 뜬 뒤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러시아에서 교사로 일했어요. 그러다 아내(김 씨)를 만나 4남매와 5명의 손주도 뒀죠. 교사가 러시아에서는 돈 못버는 직업이지만 그래도 열심히 일해 노후준비도 하고 아들들도 엔지니어로 키웠어요. 그런데도 한국에 오고 싶어 영구귀국을 선택했는데 부모님이 하늘에서 이끈 탓인지도 모르겠네요.”

김 씨 부부에게 고국에서의 지난 6개월은 마치 꿈결 같았다. 러시아에 두고 온 자녀들과 손주가 그리운 것 말고는 모두가 만족스러운 일상이었던 것.

따뜻하게 맞아주고 채소나 고기 같은 식재료 값도 싸 큰 불편 없이 새 생활에 적응 하고 있으며 손주들도 방학을 맞으면 보러 오겠노라고 하니 보고픔도 참을만 하다.

곧 주민등록증도 나올테니 휴대전화도 마련하고 주민등록번호만 외우면 의료보호증을 가져가지 않아도 병원 진료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처지다. 기초생활수급자로 분류돼 두 부부에 월 82만원이 지원되는 것으로 생활하고 있는데 소득이 생기면 그만큼 지원이 깎이게 되니 섣불리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것.

“우리 부부야 70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환갑이 안 된 사람도 몇 있어요. 그 사람들 일하고 싶어도 잘못하다 지원금 깎일까봐 일 못하고 있죠. 우리들도 이제 어엿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직업도 갖고 뭔가 고국에 의미 있는 일도 하고 싶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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