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강희 교육문화부장

10년,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지요. 씨를 뿌려 싹이 나고 열매를 넉넉히 볼 수 있는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이름조차 생소한 ‘충청리뷰’가 이 땅에 태어나 10년을 살았습니다. 저희는 “거기 뭐하는 덴데요?”라는 질문을 무수히 받다가 요즘들어 “아, 충청리뷰요” 하는 대답을 듣습니다. 독자들에게 저희의 존재를 인식시키는 것도 억지로 안되더군요. 반응이 느린 충청도라 그런지 이름 알리는 데도 족히 10년은 걸린 것 같습니다.

1∼2년 버티다 악성부채를 감당못해 쓰러진 언론들이 많은 현실을 감안하면 참 용케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도 5살 되기 전에는 무수한 병치레를 합니다. 툭하면 감기, 배탈, 피부병으로 병원 다니는 게 일입니다. 그러다가 5살이 넘어서면 면역이 생겨 웬만한 것은 저 스스로 이겨내지요. 이제 그 정도 시간은 되었다고 봅니다. 돌이켜보면 저희들도 어려운 시절이 많았습니다. ‘충청리뷰’ 간판을 내건, 온전히 저희들 것만의 사무실이 없어 사직2동에서 곁방살이부터 시작했거든요.

이후 운천동, 봉명동, 다시 운천동, 수동 사무실을 거쳐 수곡동에 보금자리를 틀었습니다. 번듯한 건물이 없으니 이사 다니는 게 일이었죠. 신혼 10년 동안 1년에 한 번씩 10번을 옮겨다녔다는 사람처럼 저희도 그에 가까운 숫자의 이사를 했습니다. 그 때마다 명함을 다시 만들었습니다. 명함 바뀌었다고 내밀면 “또 이사했어?” 하는 게 인사였을 정도였으니까요.
IMF의 긴 터널을 건너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저희들은 자진해서 월급의 일정부분을 ‘반납’하고 인고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당시 여유있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마는 저희가 겪은 내핍의 시간들도 짧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 떠나겠다고 짐을 싸는 동료를 붙잡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현실이 원망스러웠죠.

‘충청리뷰’가 걸어온 길은 ‘치열한 10년’ 이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 못지않게 성역을 없애는 일도 힘들었으니까요. 보수적이기로 이름난 충북에서 토착세력들의 비리를 캐내는 일은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지역사회에서 힘깨나 쓰며 자신들의 성을 구축한 그들은 언론을 우습게 생각하며 권력자들에게 청탁하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체질화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청주지역에는 의외로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이들과의 전쟁을 작은 ‘충청리뷰’가 벌였던 거지요.

2002년의 검찰사태와 2003년의 양길승 향응파문 특종보도는 저희를 외부에 알린 구체적인 사례였습니다. 일부 독자들은 “이제 전국지가 됐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디 그 것으로 언론의 사명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침소봉대하지 않는 진실한 신문, 회사의 이익에 따라 칭찬과 비난을 마음대로 하지 않는 신문, 애써 취재한 기사를 광고나 현금으로 바꿔먹지 않는 신문이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래도 ‘충청리뷰’가 언제 배달될까 기다렸다 읽었다는 독자들로 인해 저희는 행복했습니다. 앞으로 그런 독자들이 늘어나도록 열심히 뛰겠습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