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럭이는 그대 - 권영국 선생을 보내며

도종환

그대가 있어서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대가 있어서 우리가 한 시대를 덜 부끄럽게 살았습니다
우리의 맨 처음이고 맨 앞이던 그대
우리가 깃발을 들기 두려워하고 주저할 때면
스스로 깃발이 되어 맨 앞에서 펄럭이던 그대
우리가 한 발짝을 먼저 디디면
열 발짝 앞서 있어서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던 그대
먼저 깨닫고 먼저 준비하고
먼저 고난 받던 그대
그대에게 우리는 갚지 못한 빚이 있습니다
그대의 낙천주의 옆에서 함께 웃음을 나누어 먹으면서도
그래서 늘 미안하였습니다
그대가 홀로 힘들어하며 미륵의 계곡을 오르거나
폐허의 서쪽으로 한없이 걸어가고 있는 걸 보았을 때도
그대를 다만 지켜볼 수밖에 없어 마음 아팠습니다
오늘도 먼저 가는 그대를 지켜볼 수밖에 없어 미안합니다
그러나 대열 맨 앞에 서서 저지선을 향해 나아가다
곤봉에 머리를 맞아 낭자하던 선혈
그 흐르는 피를 싸매던 손수건을
나는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대가 떠난 뒤에도 나는 이 세상에 남아
그대의 핏자국과 함께
피 흘리며 지켜낸 한 시대와 함께
그대를 오래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절망의 텃밭을 어떻게 희망으로 일구어 가는지 알려주고
고난 속에서도 우리가 왜 웃으며 일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지금 어렵게 시작하는 일이
나중에 어떤 의미가 되는지 일깨워주고
열정이 우리를 생의 어디까지 끌고 가는지 말해주며
서둘러 떠나는 그대
펄럭이는 펄럭이는 그대
그대의 이름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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