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대장 한봉수, 만세운동도 ‘신출귀몰’ 앞장섰나?
시민행동 표지석 제막 계기, 봉기시점 조명 본격화

1971년 발간 독립운동사- 의병장 한봉수, 7일 봉기
한봉수 면담 신경득 교수- 이튿날(2일) 첫 만세운동
충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 23일 봉화시위에서 발화

청주지역의 역사·문화단체 관계자들로 구성된 ‘3.1운동 90주년 시민행동’이 3.1운동 90주년을 맞는 지난 1일 청주시 남주동 옛 우시장터(구 남주동사무소 자리)에 ‘3.1운동 표지석’을 제막하면서 지역 내 3.1운동사에 대한 조명작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특히 청주지역의 3.1운동 봉기 시점과 관련해서는 1차와 2차 사료, 38년 전의 구술자료 등을 근거로, 각각 3월2일과 7일, 23일이 봉기일이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어 향후 정확한 고증이 필요한 상황이다.     


▲ 3월1일 ‘3.1운동 90주년 시민행동’ 청주시 남주동에 ‘3.1운동 표지석’을 제막(사진 위)하면서 청주지역 3.1운동 봉기 시점에 대한 논란이 불붙고 있다. 특히 청주 출신 의병장 한봉수 선생(사진 동상)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구술기록과 2차 사료가 논란의 핵심이다.
시민행동이 이날 표지석을 세운 근거는 1971년 12월 독립유공자사업기금 운용위원회가 발행하고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쓴 ‘독립운동사 3권’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이 책의 청주군(淸州郡)편은 “3월7일 읍내 소장터(牛市場)에서 많은 장꾼들이 만세를 불렀다. 이날 의병장이었던 한봉수가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왔는데, 서문장터 우시장 입구 마차 위에서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고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한봉수(1883~1972)는 알려진 대로 이른바 ‘번개장군’으로 불렸던 청주 출신의 의병장이다.

횃불봉화시위 전국적 특이사례
실제로 이 책은 청주지역의 3.1운동 상황과 관련해 “3월2일 벌써 일제 경찰에게 독립선언서 286매가 발각되어 관계자가 검거돼 취조를 받았다”는 내용을 필두로 “청주농업학교 2학년 학생 31명이 3월10일 밤 시험 연기청원서를 학교에 제출했고, 또 1학년생 15명도 이날 밤 비밀리에 기숙사를 나왔는데 ‘서울에서 연락꾼이 내려온 기미가 있다’고 일제 측의 보고는 기록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한 연락꾼은 서울 중앙학교 재학생으로 3월1일 독립선언서를 입수한 뒤 청주로 내려와 이를 청주농업학교 학생들에게 전한 청주 출신의 신영호(1902~1947) 선생을 일컫는 것이다. 신 선생은 거사를 준비하다 체포돼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이 책은 또 청원군 강내면 태성리에서 조동식(1873~1949) 선생이 3월23일 횃불봉화시위를 벌인 것을 필두로 “청주군 내 청주면, 오창, 강외, 부용면에서 대 횃불운동이 벌어지고, 또한 북일, 북이, 옥산면 등에서도 일어남으로써 도합 8개면, 즉 청주군의 서북쪽 태반이 모두 불바다와 만세소리로 진동했다”고 기록하는 등 청주군(현재 청원군) 지역의 횃불봉화시위에 상당 지면을 할애하며 비중을 두고 있다.

박 교수 “독립운동사 공신력은 인정”
충북대학교 사학과 박걸순 교수는 이에 대해 “청주농업학교를 중심으로 한 3.1운동은 비록 모의단계에 그쳤지만 3~10월의 실형을 받은 공판기록이 있고, 조선족 최고위층으로 중국정협 부주석을 지낸 조남기 장군의 조부인 조동식 선생은 횃불봉화시위와 관련해 일제로부터 2년형을 선고받는 등 1차 사료가 분명하다”면서 “이에 반해 3월7일 한봉수 의병장의 만세운동이나 천도교인 민원식이 주축이 된 22일 시위는 2차 사료인 독립운동사(1971년 발간)에 처음으로 언급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그러나 “독립운동사가 나름대로 공신력이 있는 저술인데다, 1972년까지 생존했던 한봉수 선생의 구술 등을 거쳤을 것이기에 개연성은 충분히 인정된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공판기록에 근거해 충북지역의 3.1운동이 3월19일 괴산 장터에서 촉발돼 4월19일 제천 송학면 시위에 이르기까지 모두 44차례에 걸쳐 이뤄졌으며 1차 사료에 입각한 청주지역의 본격적인 시위는 3월23일 이후 번진 횃불봉화운동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신 교수 “한봉수 진술, 정황 구체적”
어찌 됐든 의병장 한봉수 선생이 도내 3.1운동의 첫 기치를 들었다는 점을 역사적 사료로 받아들이더라도 시점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란이 제기된다. 증평 출신인 신경득 경상대 국문과 교수가 한봉수 선생을 직접 면담한 것을 근거로 첫 시위 시점을 3월2일 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 교수는 “1970년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낙선하고 실의에 잠겨 있었는데 친구들이 한봉수 의병대장에 대한 소설을 써보라고 권유해 1971년 정초에 한봉수 의병장을 찾아갔다”며 “당시 한봉수 선생으로부터 동향 출신이자 민족대표 33인의 좌장격인 의암 손병희 선생의 지시를 받고 ‘3월2일 오전 8시 우시장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는 말을 직접 들었다”고 밝혔다. 

한봉수 선생이 당시 신 교수에게 전한 발언의 요지는 고종황제의 인산(장례)을 앞두고 3월1일 새벽 서울의 의암 손병희 선생을 찾아갔다가 태극기와 문서를 받아 밤을 새워 청주로 내려왔고, 2일 오전 8시 남주동 싸전거리에서 장꾼들을 선동해 만세운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신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통신 및 이동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상황을 고려할 때 서울과 거의 동시에 청주지역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진 셈이다.

사료 확인되면 그야말로 ‘번개대장’
신 교수는 당시 상황에 대해 “(한봉수 선생이) 의병활동에 대해서 질문할 때는 ‘88세의 고령이라 기억이 희미하다’며 따님에게 대신 설명하게 했지만 3.1운동에 관한 대목이 나오자 순간 눈에서 불길이 일어나며 직접 진술을 했다. 당시 구술한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신 교수의 기록에 따르면 한봉수 선생이 군중을 선동한 내용, 기마경찰대와 몸싸움을 벌인 정황 등이 구체적으로 언급돼 있다.

기자의 취재과정에서 신경득 교수의 주장을 처음 접하게 된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는 “역사는 기록에 의존하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은 사실이 묻힐 수는 있다. 한봉수 선생이 만세운동과 관련해 1년6개월을 복역한 사실이 있지만 당시의 공판기록은 선생이 고향인 청주군 사외일면(현재의 북일면) 세교리에서 4월2일 벌인 시위와 관련한 것 뿐이다. 선생이 의병활동으로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청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다시 고향에서 이를 이어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으로 본다. 어찌 됐든 새로운 주장이 제기된 만큼 충분히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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