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영대원 3명 무의도서 강간인질사건 벌여, 생존자 1명 처형
실미도 684부대의 훈련성과는 대단했다. 10kg의 완전무장 상태에서 1시간만에 11km를 주파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김신조 무장간첩단의 무장행군 능력을 능가는 것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상부로부터 보급, 지원이 소홀해지면서 훈련대원들의 불안감이 더해졌다. 훈련초기에는 월급도 꼬박꼬박 지급됐고 각종 부식보급도 원활하게 이뤄졌다. 하지만 68년 10월, 가을로 접어들면서 지원체계가 꼬이기 시작했다.
부식보급이 여의치않아 자체적으로 자급자족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수류탄으로 고기를 잡아먹기도 하고 지나가는 고기잡이 배에서 반찬꺼리를 얻어다 먹기도 했다. 겨울에는 기름이 지원되지 않아 기름난로에 연탄을 때기도 했다. 땔감을 구하기 위해 인접한 유인도인 무의도까지 건너가야만 했다. 언제부턴가 월급지급마저도 흐지부지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주석궁 폭파작전을 성공리에 마치고 귀환하기만 하면 ‘상당한 보수를 받고 새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대원들을 부여잡고 있다. 당초 3개월 훈련 뒤 주석궁 폭파작전에 투입하겠다는 약속은 이미 깨진 상태였지만 자신들의 존재 이유인 ‘D데이’에 대한 희망은 포기하지 않은 상태였다.
마침내 69년 8월, 학수고대하던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특수부대원들은 완전무장을 갖추고 38선 최북단의 섬으로 이동했다. 작전수행 능력이 세계 최강이라고 할 만한 684특수부대가 북의 코앞에 진을 친 것이다. 침투개시 명령만 기다리며 섬 안의 군사기지에서 3∼4일을 대기했다. 사망시 각 자 집으로 보내주기 위해 머리카락과 손톱을 자르는 의식까지 마쳤지만 작전은 돌연 취소되고 말았다. 김신조간첩단 문제로 긴장이 고조됐던 남북이 상호비방금지등 일련의 성과물을 얻어내자 ‘주석궁 폭파’라는 강력한 보복전술이 명분을 잃게 된 것.
실미도로 귀환한 대원들의 사기는 급속도로 떨어졌고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거냐’는 질문이 기간요원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군내부에서 조차도 비밀에 붙여진 684부대의 미래에 대해 누구하나 대답할 입장이 아니었다. 당시 훈련교관이었던 김방일씨는 "작전이 취소되자 우리 기간요원들도 불안감이 커졌다. 오지에서 혹독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월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니었고, 보급도 엉망인 상태에서 향후 684부대를 어떻게 처리할 지 우리도 답답했다. 부대장과 상의해 특수부대 해체를 포함함 일종의 건의안을 상부에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책임있는 답변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때부터 684부대는 ‘버려진 부대’가 돼버렸다"고 증언했다.
기간요원들은 대원들의 동요를 막기위해 훈련일정을 그대로 강행했다. 하지만 ‘작전을 위한 훈련’이 아닌 ‘훈련을 위한 훈련’일 뿐이었다. 대원들은 자신들이 버려진, 버려질 처지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언론에 알려지지않은 실미도 ‘1차 난동사건’이 벌어진다. 작전취소 2개월만인 69년 10월, 3명의 훈련대원이 부대를 이탈, 인근 무이도에서 강간 인질극을 벌인 것이다. 당시 훈련대원들의 유일한 오락시간은 저녁식사후 영화관람이었다. 주로 전쟁영화 비디오를 틀어주었는데, 사건 당일 기간요원과 훈련대원들이 영화에 빠져있는 틈을 타 3명의 훈련대원이 탈영했다. 이들은 탄약고에서 수류탄을 훔쳐 무의도로 잠입했다.(실제로는 소이탄이었다) 무의초교로 들이닥친 이들은 여교사와 마을처녀등 2명을 강간하고 출동한 경찰과 인질대치극을 벌였다.
684부대에서도 실탄을 지급, 탈영대원을 진압을 위해 출동했다. 포위망 속에 인질극을 벌이던 3명의 대원들은 인질을 풀어준 뒤 각자 소지한 단도로 상대방을 찔러 동반자살을 시도했다. 현장에서 2명이 사망했고 부상을 입은채 목숨을 건진 1명은 실미도로 압송됐으나 이날 밤 대원들에 의해 처형됐다. 특수부대원들이 민간인 마을을 습격해 무장난동을 벌인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언론에는 단 한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684부대에 대한 대외보안이 그만큼 철저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무의도 무장난동 사건이 터지고 나자 훈련대원에 대한 감시가 강화됐다. 탄약소지가 금지됐고 후속적인 탈영사고를 막기위해 대원들은 밤이면 머리에 수건을 쓰고 활동하게 했다. 고립된 무인도에서 서로를 감싸주던 기간요원과 훈련대원의 끈끈한 전우애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684부대가 사실상 684수용시설로 바뀌면서 이들 사이에는 감시자와 수용자라는 긴장기류가 조성될 수밖에 없었다. 함께 입소한 동료 가운데 이미 7명이 목숨을 잃은 상황을 목격해온 대원들은 실미도에 갇혀 훈련만 받다가 죽게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70년 8월, 마침내 버려진 섬 실미도에 죽음의 그림자가 닥치고 있었다. 8월 21일 금요일, 자신이 특수부대원 출신으로 훈련대원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김방일 교관이 실미도를 잠시 비우게 된다. 교육대장의 지시로 일을 보기위해 인천으로 나온 김교관은 그날 밤 소름끼치는 악몽에 시달렸다. "실미도와 무의도 사이 바다 한가운데서 고기잡이배 그물을 건져올렸는데 큰 그물에 684부대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나오는 꿈이었다. 부대원들은 그물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고 대원들을 구해야 한다고 소리치는 상황에서 꿈에서 깨어났다. 온몸에 식은땀이 비오듯 했고 돌이켜보면 그 꿈이 불행을 생생하게 예고한 셈이었다"
/권혁상 기자


실미도 美 ‘타임’지 집중취재 해외관심 증폭
세계 각국의 특수부대 역사상 유례를 찾기힘든 ‘실미도 무장난동사건’이 미국 영화사의 투자협약에 이어 미국 유수 언론사의 취재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3월 미 콜럼비아 영화사가 130억원의 제작비 투자를 결정한데 이어 최근 ‘타임’지가 김방일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등 직접 취재에 나선 것이다. 지난 10일 타임지 아시아판 지면게재를 위해 홍콩지사장등 취재진과 실미도 현지를 다녀왔다. 하지만 워싱턴 본사에서 전 세계에 보급되는 본지 지면을 할애하기로 결정, 보충취재를 하기로 했다는 것.
한편 콜롬비아영화사 투자로 영화제작을 시작한 한맥영화사(감독 강우석)측은 제작발표이후 ‘내가 실미도특수부대 대대장, 참모장이었다’고 소개하는 정체불명의 전화를 수차례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에서는 영화제작 자문을 조건으로 대가를 요구하기도 했다는 것. 한맥영화사측은 지난 98년 발간된 백동호의 소설 ‘실록 실미도’를 근간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부대 창설이후 난동사건때까지 훈련대원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김방일씨는 지난 2000년 기간요원 출신 17명과 함께 ‘실미전우회’를 결성하는등 실미도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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