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돕기 발벗고 나선 김창성씨

“제 2의 중국동포를 만들면 안 됩니다”
고려인돕기 운동본부, 고려인 돕기 후원의 밤. 요즘 간간이 신문 지상을 통해 접하는 말이다. 고려인은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연해주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를 말한다. 이른바 까레이스키로 불리는 이들이 고려인이다. 지금 그들을 돕기 위한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고 , 충북에선 김창성씨(38. 청주청년회의소 회장)가 앞장서고 있다. 도내에 이 사업의 취지가 구체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지난 3월 17일 청주청년회의소 주최로 청주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고려인 돕기 후원의 밤 행사다.
고려인 돕기 운동은 숙명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해외 영농을 주도하는 ‘돌나라 한농(韓農)’ 회원들이 연해주에 진출하면서 한국동포의 고난을 직접 목격한 것이 결정적 동인이 됐다. 돌나라 한농은 지난해부터 고려인을 돕기 위한 각종 행사를 주관하면서 후원회의 사단법인화를 위해 현재 전국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JC가 후원행사를 주최한 것은 충북이 유일하고 그 역할을 청주청년회의소가 맡은 것이다.

재산 몰수 당한채 다시 유랑길

“1863년 한인 13가정이 조선 왕조의 수탈과 가난을 피해 두만강을 넘은 것이 고려인 이주사의 시작입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많은 독립운동가가 이곳을 찾았고 자연스럽게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1937년 어느 추운 겨울날, 우리의 동포 고려인들은 스탈린의 무자비한 소수민족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영문도 모른채 대륙횡단 열차에 몸을 실었고, 구 소련 전역에 흩어진 것입니다. 그 곳에서 황무지를 개척하며 반세기를 살아 온 이들은 다시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로 각각의 독립국가에 의해 전 재산을 몰수당한 채 빈손으로 연해주에 되돌아 온다고 합니다. 바로 이들을 돕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김회장은 사실 우리 민족에 대한 정서가 각별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의 부친(68)은 평안북도 선천이 고향이다. 이곳은 압록강과 바로 인접한 지역으로 부친은 중국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칠 정도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와중에 벌어진 가족과의 생이별은 지금까지 두고두고 한으로 이어졌고, 자연스럽게 그는 이런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동포에 대한 남다른 관념을 갖게 된 것이다. “아버지한테 고향이나 동포문제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듣고 자라면서 그 때마다 저 역시 많은 생각들을 했습니다. 한 10여년 전에는 아버지를 위해 가족들 모두 캐나다로 이민갈 고민까지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김회장이 처음 돌나라 한농으로부터 고려인을 돕자는 제의를 받고 선뜻 응하게 된 배경엔 이런 기억들이 크게 작용했다.

제 2의 중국동포는 만들지 말아야

그는 아직 고려인이 산다는 연해주에 가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자신이 나서서 이들을 돕고 있는 만큼 걱정도 많다. “지금 고려인들의 생활상은 특정층을 제외하곤 아주 참담하다고 합니다. 아직 연해주는 문호가 덜 개방돼 폐쇄적이지만 이곳도 조만간 외국과의 왕래가 활성화될 것으로 봅니다. 그럴 경우 같은 민족끼리 서로 사기치고 사기당하는 제 2의 중국동포를 양산할 수도 있습니다. 고려인들도 스스로 먹고 살기 위해선 한국행을 택할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중국엔 우리나라 장사꾼들이 먼저 들어가 물을 흐린 반면 연해주엔 외국 영농인 등 소위 생산 위주의 합리적 사고를 지닌 사람들이 앞섰기 때문에 지금같은 자연발생적인 후원회 조직도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연해주의 고려인만큼은 연변 중국동포의 전철을 밟게 해선 결코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난해 11월부터 고려인 돕기에 발벗고 나선 김회장은 지금까지 각계의 도움으로 모아진 2100여만원의 성금을 얼마전에 보내면서 다른 JC회원들과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고 한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고려인들이 경작하는 연해주의 농장과 직접 결연해 그들을 좀더 가까이서 돕고 싶다는 것이다. 연락 고려인돕기 청주 본부(043-269~4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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