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세운 비석 ‘문중의 단재’만을 내세웠을 뿐
청원군, “유족·종중 합의하면 무조건 따르겠다”

단재 망명루트를 따라 만주에서 베이징까지
①뤼순의 단재 어디서 순국 했나?
②베이징에 남아있는 신채호 흔적
③신채호와 만주 그리고 대고구려
④며느리 힘들어 사표내고 싶었다

다롄에서 지안까지 단재의 망명루트를 추적해온 단재문화예술제전 추진위 답사단은 1월7일 베이징에서 단재의 며느리인 이덕남 여사를 만났다. 이 여사는 “때로는 단재의 며느리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사표를 내고 싶었다”고 고충을 털어놓았지만 인터뷰의 말미에는 “촌부의 딸이 그래도 단재의 며느리로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며 자신이 끝내 내려놓을 수 없는 사명감에 대해 토로했다.

“김구의 항일투쟁을 테러로 규정하고 정신대를 돈벌이로 비하하는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을 보면 나라가 망해가는 징조다. 기왕에 신채호를 위해서 일하시는 분들이라면 애국사상이 국민의 정신을 뚫고 스며들 수 있도록 단재의 시비를 세워달라…” 이 여사는 2시간여에 걸쳐 피를 토하듯 울분을 삭이지 못했다.

이덕남 여사는 2004년 5월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뒤 중국 베이징에서 사업을 하는 딸의 집에 머물고 있다.

이덕남 여사는 1972년 도민의 뜻을 모아 세운 사적비와 1941년 한용운 선생 등이 세운 묘표비가 뒷전으로 밀려나고 문중사(門中史)에 치우친 새 사적비 세워진 것에 대해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 있는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의 묘소는 ‘수맥이 흘러 14차례나 봉분이 무너졌다’며 이덕남 여사에 의해 파묘(破墓), 이장된 지 3년8개월여 만인 지난해 5월에 새롭게 단장됐다. 새로이 단장된 선생의 묘는 봉분 높이가 2.5m, 지름은 약 8m에 달해 초라했던 최초의 묘소나 가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위용이 당당하다. 또 묘소 앞에는 상석과 선생의 일대기가 적힌 비석, 석물 등이 새로 설치됐다.

문제는 단재의 장남인 수범씨(1991년 작고)가 1972년 세운 사적비와 한용운이 세운 묘표비가 각각 화장실과 인근 폐가 앞에 방치됐다는 것. 특히 새 사적비는 독립운동가 단재를 부각시키기보다 ‘본관은 고령이며 세종조에 출사 집현전학사로 한글 창제에 큰 공을 세우고 성종조까지 주석지신으로 국가를 위해 충성한 문충공 신숙주선생의 후손’임을 강조하는가하면 문중 이사회 임원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는 등 ‘민족의 단재인가 문중의 단재인가’하는 논란(본보 559호·2008년 12월19일자 18면)을 낳고 있다.

“72년 비문 1년 넘게 고증한 것”
이덕남 여사는 1972년 사적비가 단순히 유족들의 뜻에 의해 건립된 것이 아님을 고증했다. 이 여사는 “당시 20여분이 모였다. 이은상 선생과 송건호 선생도 함께 했다. 훗날 사적이 될 것이니 꼼꼼하게 비문을 쓸 사람을 선정하자는 논의 끝에 당시 충북대 학장인 조건상 선생이 비문을 쓰게 된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1년이 넘게 검증을 했고, 비석을 세우는데 100여명이 정성을 모았다”고 증언했다. 고 조건상 학장이 비문을 쓴 것이 단순히 지역 차원에서 비석을 세운 것이 아님을 입증한 것이다.

이 여사는 돌을 구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열 번도 넘게 돌아다니다가 비석으로 쓸 제천오석을 구했다. 지붕은 강화애석이다. 그런 비석이 순간적으로 뽑힌 것을 보고 너무 무참했다”고 토로했다. 단재기념사업회와 종중이 사적비를 새로 세운 명분은 잘못 새겨진 글자가 있고, 단재의 부인인 박자혜 여사(1943년 병사, 화장 후 산골)의 위패를 합폄(유골 없이 합장)했기 때문이다.

이 여사는 이에 대해 “김구 선생도 합폄을 했지만 사적비를 새로 세우지 않았다. 잘못 새긴 글자는 석공의 실수였고 이미 2001년에 당시 독립기념관장이던 김삼웅 선생이 지적한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새로 세운 사적비는 가족의 이름도 다 틀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새 사적비 시비로 재활용 하겠다”
이덕남 여사는 72년 사적비를 다시 세우고 새 사적비는 시비(詩碑)로 재활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 여사는 “문중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청원군도 ‘원상복구하면 되겠냐’며 내 뜻에 따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주장했다.

이 여사가 시비를 세우겠다는 것은 최근 뉴라이트의 역사교과서가 김구 선생과 유관순 열사를 비하하는 등 민족정기가 왜곡되는 마당에 동상 하나를 세우는 것보다도 단재의 사상을 오롯이 드러내는 시비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 여사는 이와 관련해 “‘아버지의 뼈를 팔아먹지 않는다’는 것이 남편의 유지였다. 이를 따를 뿐”이라며 어떤 사심도 없음을 강조했다.

청원군 관련 부서에 확인한 결과 이 여사의 주장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진척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청원군 관계자는 이에 대해 “새로 세운 사적비를 폐기하고 이전 사적비를 다시 세우는 것에 대해 우리는 유족과 문중, 기념사업회의 결정에 무조건 따르기로 했다. 우리 임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번 주 목요일(2월19일) 청원군청에서 3자가 만나기로 했다”고 답변했다.   
 
한때는 남편 간첩인줄 알아
이덕남 여사가 단재의 며느리가 된 것은 운명에 가깝다. 고 신수범씨와 23살이라는 나이 차도 그렇고, 당시 테니스 선수로 젊음을 자랑했던 이 여사가 신씨와 결혼에 이른 스토리는 이번 인터뷰에서도 차마 묻지 못했다. “시합이 끝나고 나면 만나자고 쪽지를 건네는 남자가 많았다. 그런데 내가 (남편을) 따라다녔다. 고생은 했어도 원망하지는 않는다…” 이 여사가 스스로 밝힌 지난 40년의 소회다.

이 여사와 신씨의 만남이 운명에 가깝다는 것은 이 여사가 단재의 존재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결혼식을 올렸기 때문이다. 한때는 남편이 간첩이 아닌가 의심했다는 것.

이 여사는 “아들을 낳은 지 6개월 만에 일본의 단재 연구가인 와타나베 교수로부터 ‘용과 용의 대격전’이라는 아버님의 저서를 받았다. 그런데 남편이 2만원을 주며 ‘애는 내버려두고 너는 너대로 도망을 가라’고 하더라. ‘이 사람이 혹시 간첩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신고를 하려다 말았다. 나중에 남편이 ‘꼭 만나야 될 사람이 있다’며 이은상 선생댁에 나를 데려갔다. 이 선생이 맨발로 뛰어나오며 ‘시아버지가 누군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렇게 10명을 만나고 완전히 세뇌(?)가 됐다”며 단재의 며느리로 사는 숙명에 대해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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