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군벌 장쉐량 소유 저택 제2보합단 근거지로 사용
중국사회주의 시조 리따자오 도움 베이징대 도서열람

단재 망명루트를 따라
만주에서 베이징까지②

단재의 기질은 ‘외곬’이다. 한평생 타협이란 없었음을 수많은 일화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단재는 임시정부의 초대 수반으로 이승만이 거론되자 “없는 나라마저 팔아먹으려는 이승만이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 나쁘다”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베이징에 거주하면서 신문에 글을 싣는 것이 유일한 생계수단이었음에도 글자 하나가 틀렸다는 이유로 기고를 중단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 베이징대학 교정에 있는 리따자오의 동상. 그는 지금도 중국공산주의의 창시자로 추앙받고 있다.
왜놈 세상에서는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며 세수도 꼿꼿이 서서 했다는 단재에게는 과연 어떤 벗들이 있었을까? 독립운동가 중에서는 숙부뻘인 예관 신규식 선생을 비롯해 이회영·시영 형제,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이 단재와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신규식 선생은 구한말 육군의 부위까지 진급했으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죽음으로 항거하려고 음독했다가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쑨원(孫文)의 신해혁명에 가담하고 중국 국민당 요인들과 한·중 연합단체인 ‘신아동제사’를 결성했을 정도로 중국의 명망가들과 친분이 깊었다. 1922년 임시정부 안에 내분이 생기자 25일간 단식을 계속하다 목숨을 끊었을 정도로 그 꼿꼿함이 단재와 유사하다.

그런데 이번 베이징 답사와 취재과정에서는 대한남아 신채호 선생이 좌우를 넘어 대륙인들과 교유한 흔적을 발견하는 수확이 있었다. 뜻밖에도 동북군벌 장쭤린(張作霖)의 아들인 장쉐량(張學良)이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들에게 자신 소유의 저택을 근거지로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는 베이징에서 만난 단재의 며느리 이덕남 여사와의 인터뷰과정에서 확인됐다.

또 중국사회주의의 창시자로 추앙받는 리따자오와도 친밀한 관계를 나눴을 것이라는 정황증거도 포착할 수 있었다. 단재가 이와 같은 관계를 스스로 개척한 것인지, 아니면 다리를 놓아준 사람이 있는지는 더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덕남 여사 장쉐량과 관계 증언

▲ 리따자오의 고가에 있는 응접실. 여기에서 한중의 독립투사들과 교류했다는 기록이 있다.
단재 신채호가 군벌(무장세력을 가진 토호)인 장쉐량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가 없는 얘기다. 이는 7일 밤 베이징의 한 식당에서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 여사와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이 여사의 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여사는 중국의 유력인사들이 단재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내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시아버지가 상하이에 1년 정도 머물다 돌아온 뒤 박용만, 신숙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단체인 제2보합단을 만들었는데 이때 장쉐량 소유의 대저택이 근거지로 제공됐다”고 증언했다. 이 여사는 또 “거의 같은 구조와 규모의 저택이 두 곳이 있었는데 지금은 개발로 반이 헐렸다. 헐린 쪽에 근거지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장쉐량이 실력자였던 데다 울타리 안이 미로처럼 복잡해 함부로 침입할 수 없는 구조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음날 원창후통(文昌胡同)에서 헐릴 날만 기다리고 있는 장쉐량의 고가를 찾아냈다. 고가 일부의 주인이라는 50대 남자는 “장쉐량의 부인이 살았던 집이다. 국영통신사인 신화사 통신이 대부분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 남자는 부동산 가치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한국 돈으로 200억 정도가 된다”고 귀띔했다.
 
리따자오에게 보낸 편지 관심

▲ 장쉐량이 단재 등 보합단 관계자들에게 근거지(사진 왼쪽)로 제공했다는 저택으로 가는 입구.
“저는 전후 10년간을 정처없이 방랑하여 지난한 세월 지치고 시달리며(중략)몇몇 열사와 함께 나라를 위해 죽음으로 적과 싸우기를 기도하였더니 벌써 정세는 틀어지고 기회는 더욱 멀어져 안타깝게 머리를 어루만지는 동안 어느덧 40을 지났습니다(후략)”

단재 신채호가 중국공산주의의 창시자이자 베이징 도서관의 주임이었던 리따자오에게 1922년 가을, 도서열람을 요청할 목적으로 보낸 편지는 그답지 않게 울적하고 갑갑한 심경을 털어놓고 있다.

리따자오는 지금까지도 중국 내에서 추앙을 받는 인물로 베이징대 교정에 리따자오 동지라는 금석문과 함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번 기행의 단장인 허원 서원대 교수는 “단재의 성격으로 볼 때 중국 유명인사들과의 교류에 숙부뻘인 예관 신규식 선생이나 일찌감치 베이징에 터를 잡았던 이회영·시영 형제가 중간자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 편지를 보면 선생이 직접 나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관심을 나타냈다.
허 교수는 또 “단재가 논설을 쓰는 신문의 판매량이 눈에 띄게 늘어날 정도로 선생의 글은 베이징의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며 “리따자오 역시 공산당 초기에 무정부주의자까지 받아들였을 정도로 폭이 넓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깊이 교유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장쉐량 저택과 리따자오 고가 50m 거리

▲ 장쉐량 소유의 저택은 내부가 미로와도 같아 함부로 침입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사진은 허물어져가는 건물.
이덕남 여사의 설명을 듣고 보합단 근거지로 사용됐다는 장쉐량 소유의 저택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얻은 뜻밖의 수확은 장쉐량 저택과 이대조 고가가 직경 상으로 불과 50m 거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구불구불한 후퉁의 골목길을 따라가더라도 두 집의 거리는 100m 남짓일 정도로 가깝다.

장쉐량은 항일보다 공산주의 말살을 염두에 두고 있던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蔣介石)를 감금한 뒤 죽이겠다고 협박한 이른바 시안(西安)사건을 통해 1937년 항일민족통일전선인 제2차 국공합작을 이끌어낸 독특한 이력의 인물이다. 결국 장제스의 미움을 사 타이완으로 끌려간 뒤 40년 동안 연금생활을 했으며 장제스 사후에 하와이에서 숨을 거뒀다.

장쉐량과 이따자오의 집이 가깝다고 해서 두 인물이 교류를 했을 것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뒤에 벌어진 일이지만 리따자오는 장쉐량의 아버지인 장쭤린이 보낸 사람에 의해 1927년 사살된다. 

다만 단재가 보합단 활동을 했던 시기에 리따자오가 고가에 머무르며 한중의 투사들과 폭넓은 교분을 나눴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단재 신채호와 리따자오가 각별한 사이로 지냈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허원교수는 “단재가 1920년대 초에 보합단 활동을 했고 리따자오가 고가에 머물며 사람들을 만난 시기도 1920~1920년까지이기 때문에 ‘두 사람이 막역하게 지내지 않았을까’하는 추정을 할 수 있다”며 “실제로 리따자오의 고가에는 이 같은 만남을 목적으로 한 응접실이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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