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최완배 이사장 하수인 노릇했다”가 문제 돼
서원대학교 두 교수간에 명예훼손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98년 최완배 전 이사장 당시 재단퇴진운동을 겪으며 형성된 구성원간 갈등이 끝내 법정으로 비화, 길고 긴 법정싸움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해 3월 21일 김태봉 교수(중어중문학과)는 대학신문 ‘논단’란에 ‘화합 아직 이르다’는 글을 발표했다. 여기서 김교수는 “98년 4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모진 투쟁끝에 교수들은 최완배를 학원 밖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최완배가 사기꾼임을 확신한 대다수 교수들은 어떠한 협박과 불이익에도 굴하지 않고 농성장을 지키며 투쟁을 거르지 않았지만 일부 교수들은 그렇지 못하였다. 동료교수들이 사지에 내몰리는 상황에서도 최완배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당시 신임교수 등 상황을 잘 알지 못하던 교수들을 거짓과 협박으로 회유했다 …김진기 교수와 박철용 교수는 최완배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그가 퇴진할 시 동반 퇴진할 것임을 누차 교수와 학생들 앞에서 공언하였다”고 썼다.
그외에도 김 교수는 일의 경중에 차이는 있겠지만 당시의 학장들과 평교협 탈퇴자들을 위시한 농성불참자들도 최완배 사수를 위해 일정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전제하고 일부 교수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며 책임질 일은 책임지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칼럼에 거론된 김진기 교수(국어교육과)가 사실과 다르다며 김교수를 지난해 7월 청주지검에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면서 일이 커지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조사를 받은 김태봉 교수는 지난해 9월 17일 약식기소(벌금 20만원) 됐으나 이에 불복, 정식재판을 진행중인 상태다. 재판은 지난 3월 14일 처음으로 열렸고 4월 11일이 두 번째.

“무조건적인 화합은 있을 수 없다”

김교수는 액수상으로는 20만원이라는 소액재판이지만 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명예훼손 혐의를 인정하는 것이므로 정식 재판을 청구하게 됐다며 말문을 열었다. 문제의 글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해 그는 “김정기 총장은 당선된 후 98년 이사장 퇴진운동 당시 있었던 일을 가지고 어떤 얘기도 하지 않겠다는 ‘화합선언’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구성원들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교수협의회를 중심으로 반발 의견들이 나왔다. 그러던 차에 교협 회장이자 대학신문 논설위원인 나에게 원고청탁이 들어와 교협 운영위원회에서 논의한 끝에 우리 대학이 안고 있는 문제를 거론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한일합방을 이야기 할 때 이완용을 빼놓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 학교도 화합을 거론할 때 일부 교수들의 행적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김진기 교수는 교무위원 겸 학생처장으로 최완배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그래서 교수들을 파면하고 재임용 탈락시키는데 앞장 섰다. 이런 관계로 그는 이해동 전 이사장 당시 파면을 당했다가 교육부 교원징계재심위에서 감봉 3개월로 감면조치됐고, 2000년 초에는 학생들이 김교수의 수업을 거부해 ‘강의 없는 교수’로 직위해제 됐으나 다시 교육부 교원징계재심위에 진정, 복직명령을 받았다. 따라서 이 칼럼으로 인해 명예훼손을 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고 분개했다.
또 김교수는 김진기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98년 당시 1학년이었던 학생들로부터 받은 확인서를 내보였다. 김교수에게 전공과목인 ‘작문교육론’을 배웠다는 학생들은 “김진기 교수는 최완배씨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집으로 보내왔다. 그래서 각자 항의의 편지를 보냈다. 김교수는 강의시간에 최 이사장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강변하면서 만일 이사장의 잘못이 밝혀지면 나도 이사장과 함께 학교를 떠나겠다고 몇번이나 말했다”고 확언했다.

“내가 왜 최완배 하수인이냐”

그러나 김진기 교수는 “98년도에 나는 학생처장으로 체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개혁을 하더라도 체제유지를 하면서 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사람이다. 단지 최완배를 검증하지 못한 불찰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 때는 최 이사장의 잘못이 드러난 것이 없었다. 그리고 최완배가 퇴진하면 나도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는 한 적이 없다”며 “논단은 과학적이어야 하는데 김태봉 교수의 글은 사실과 다르다. 최완배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고 하는데 내가 왜 하수인이냐”고 반박했다.
그는 또 “당시 딸 둘이 서원대를 다녔는데 날마다 울고 왔다. 그리고 학생들은 우리 아파트까지 쫓아와 페인트로 글씨를 써놓고 차를 부수었다. 가족들이 당한 정신적인 피해는 말로 다할 수 없다. 나는 이제 뺏길 것 다 뺏기고 아무 것도 남은 게 없다. 올해 안으로 학교를 정리할 것”이라며 일부 구성원들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김교수는 지난 98년부터 현재까지 학생들의 수업거부로 강의가 폐강된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학교측은 전공과목 10명, 교양과목 30명 이하일 때 폐강을 시킨다고 밝혔다.
한편 김정기 총장과 교수일동은 지난 3월 14일 김태봉 교수가 칼럼을 게재한 것은 개인이 아니라 교수협의회 차원에서 한 것이며, 법적인 것을 떠나 학내사태 전반을 이해하고 선처바란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청주지방법원에 제출했다. 현재로서는 두 교수 모두 ‘끝까지 가보겠다’며 벼르고 있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98년 당시 최완배 이사장 퇴진운동은 10여 개월간이나 계속돼 청주지역 사회는 물론 전국 대학교수들에게도 화제가 되었다. 특히 이 ‘사건’은 단합하기 힘든 조직으로 알려진 교수들이 뭉쳐 소기의 목적을 달성시킨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구성원들 간에는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일들이 발생, 최완배가 인도네시아로 도피했음에도 현재까지 감정들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이 교수들의 말이다. 특히 ‘해교자(害校者)’ 처리문제를 놓고 강경파와 온건파 간에는 여러 가지 갈등이 있었다는 설이 설득력있게 제기됐다.
모 교수는 학내사태 과정에서 개인비리들이 발견돼 후에 자정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었으나 원로급 교수들과 관선이사들이 이를 무마, 결국 명백한 혐의사실이 있음에도 덮어 버려 이로 인한 갈등이 크다고 거들었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일제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이 발목을 잡듯이 서원대 역시 똑같은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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